영천에있는 완산보를 찾아 가기로하고 지번을 찾으니 잘 보이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위성지도를 참조하여 찾으니 그제서야 지번이 나와 쉽게 답사를 가게 되었다.
완산보에는 선무사 이중하 비가 있는데 전국에 남아 있는 이중하 비는 다 보았다고 생각하였는데
영천에서 하나 더 있다는 정보를 알아내어 이번에 갔다온 것이다.
완산보는 금강산성 아래에 있으며 자연적인 해자를 역하를 하는 것으로 보이고 그 아래로 좁은 길을 따라가면
이제는 그역핡을 하지 못하는 보 가 있다.
영천시내에서 2-3분 거리에 있는 완산보는 조선시대에는 벼 농사에 충분 한 물을대기 위한 것으로
이에 대한 조세가 많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해 나라에서 파견한 선무사 이중하를 모셔 와서 해결한것으로 생각된다.
이중하는 충청도 암행어사를 역임하고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 하였기에 곳곳에 선정비가 남아 있다.
영천은 선정비가 아니고 송덕비 였다.
송덕비에는 그를 칭송하는 명문이 있다.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宮田勒稅(궁전늑세) 궁전에 세금을 내라 하고
寔繁掊克(식번부극) 빈번하게 조세를 다그치니
使節南指(사절남지) 임금의 명으로 남으로 오시어
宣上威德(선상위덕) 주상을 덕을 베풀고 위엄을 갖추니
積瘼打疂(적막타첩) 오래된 폐단을 처리 하시어
不動聲色(부동성색) 목소리와 얼굴 색을 변함이 없으시네
永民報功(영민보공) 백성들이 오래도록 보은을 갚고자
石語千億(석어천억) 돌에 새긴 글 천년을 기억하리라
監役 成宗式
郡吏房 李祐禎
여기에는 이중하 비만 있는 것이 아니고 유학과 전군수의 비가 같이 있다.
백성들의 부당한 세금을 깍아주고 많은 헤택을 주었으니 어찌 잊을수가 있을까하여
송덕비를 세웠는데 대부분 남아 있는 선정비나 송덕비가 이와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한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후경(厚卿), 호는 규당(圭堂) · 탄재(坦齋). 현감 이인식(李寅植)의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좌랑(佐郎)으로서 1882년(고종 1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홍문관교리가 되었다.
1885년 공조참의 · 안변부사가 되었다가 토문감계사(土門勘界使)로서 청국측 대표 덕옥(德玉) · 가원계(賈元桂) · 진영(秦瑛) 등과 백두산에서 백두산정계비와 토문강지계(土門江地界)를 심사하였다. 국경 문제를 놓고 담판을 벌였으나 견해차가 심한데다 청국측이 강압적인 태도로 나와 회담은 실패하였다.
1886년 덕원항감리(德源港監理)가 되었다가 1887년 다시 토문감계사가 되어 회담을 재개했는데, 청국측이 조선측의 주장을 거절, 위협하자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국경은 줄일 수 없다.”며 끝내 양보하지 않았다. 1890년 이조참의가 되어 충청도암행어사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1894년 외무부협판 · 의정부도헌이 되었고, 동학운동이 일어나자 경상도선무사(慶尙道宣撫使) · 영월영천안핵사(寧越永川按覈使) · 경상도위무사(慶尙道慰撫使)로 진압에 앞장섰다. 이 해 말 김홍집내각의 내무부협판이 되어 갑오농민운동 때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나, 이듬해 김홍집내각이 무너지고 지방제도가 개편되자 대구부관찰사로 임명되었다. 관찰사 재직시 을미의병 봉기로 많은 관리가 희생되었으나 이중하는 민심을 얻어 무사하였다.
1898년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의 요구로 성립된 중추원에서, 무기명투표로 11명의 대신후보자를 선출할 때, 2위로 천거되기도 하였다. 1903년 외무부협판 칙임2등(勅任二等)이 되어 문헌비고찬집당상(文獻備考纂輯堂上)을 맡았다. 그 뒤 평안남도관찰사 · 경상북도관찰사 · 궁내부특진관을 거쳐 장례원경(掌禮院卿)이 되었다.
1909년 일진회(一進會)가 대한제국과 일본의 '정합방론(政合邦論)'을 주장하자 민영소(閔泳韶) · 김종한(金宗漢) 등과 국시유세단(國是遊說團)을 조직하여 그 해 12월 5일 원각사(圓覺社)에서 임시국민대연설회를 열고, 그 주장이 부당함을 공격하였다. 또, 1910년 규장각제학으로 한일합방에 극렬히 반대하였다. 지방관리 재직시 청렴하고 강직한 인품으로 이름이 높았다.
저서로 『규당문집』 · 『감계전말(勘界顚末)』 · 『감계일기(勘界日記)』 등이 있다.--한국민족대백가사전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