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은 즐거움과 장식, 그리고 능력을 위해서 도움이 된다. 즐거움을 위한 주 효용은, 혼자 한거(閑居)할 때에 나타난다. 장식용으로서는 담화 때에 나타나고, 능력을 기르는 효과는 일에 대한 판단과 처리 때에 나타난다. 숙달한 사람은 일을 하나 하나 처리하고, 개별적인 부분을 판단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일에 대한 전반적인 계획, 구상, 통제에 있어서는 학문있는 사람이 제일 낫다.
학문에 지나친 시간을 소비하는 것은 나태다. 그것을 지나치게 장식용에 쓰는 것은 허세다. 하나에서 열까지 학문의 법칙으로 판단하는 것은 학자의 버릇이다. 학문은 천품(天稟)을 완성하여 경험에 의해서 그 학문은 완성된다. 왜냐하면, 천부의 능력은 마치 자연 그대로의 식물과 같아서 학문에 의한 전지(剪枝, 가지치기)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문은 경험에 의하여 한정되지 않으면, 그것만으로는 거기에 제시되는 방향이 너무 막연하다. 약빠른 사람은 학문을 경멸하고, 단순한 사람을 그것을 숭배하고, 현명한 사람은 그것을 이용한다. 즉 학문의 용도는 그 자체가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어디까지나 학문을 떠난, 학문을 초월한 관찰로써 얻어지는 지혜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반대하거나 논박하기 위해 독서하지 말라. 또는 믿거나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혹은 얘기나 논의의 밑천을 삼기 위하여 독서하지 말라. 다만, 재량하고 고찰하기 위해 독서하라. 어떤 책들은 그 맛을 볼 것이요, 어떤 책은 그 내용을 삼켜 버릴 것이고, 어떤 소수의 책은 씹어서 소화해야 한다. 즉 어떤 책은 다만 그 몇 부분만을 읽을 것이고, 어떤 책은 다 읽긴 하더라도 세말하게 주의해서 읽을 필요는 없고, 어떤 소수의 책은 정성껏 주의해서 통독해야 한다는 뜻이다. 어떤 책은 또한 대리를 시켜서 읽게 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만든 발췌문을 읽어도 무방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수롭지 않은 제목, 저급한 종류의 책에 대한 얘기다. 그 밖의 경우 개요만을 추출한 책은 마치 보통의 증류수와 같아서 무미건조한 것이다. 독서는 충실한 인간을 만들고, 담화는 기민한 사람을 만들고, 문필은 정확한 사람을 만든다. 그러므로 글을 적게 쓰는 사람은 기억력이 좋아야 하고, 담화를 별로 않는 사람은 임기응변의 재치가 있어야 하고, 독서를 적게 하는 사람은 모르는 것도 아는 것처럼 보일만한 간교한 꾀가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