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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 생명에 대한 정견
2023년 10월 6일
【정견망】
1. 사유는 뇌에서 유래하는가?
혹자들은 사람의 생각이 뇌에서 유래한다고 생각한다. 즉 대뇌의 사고(思考)를 통해 다양한 사유, 사상 또는 느낌을 낳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지난 1980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과학 잡지 《사이언스》에 영국 셰필드 의과대학에서 정상적으로 생활하거나 심지어 지능이 높은 뇌가 없는 무뇌인(無腦人)에 대한 관찰 연구를 발표한 바 있다.
《사이언스》 1980년 12월호에 로저 르윈(Roger Lewin)이 쓴 논문에서는 같은 대학 신경학 교수 존 로버(John Lorber, 1915~1996)의 연구 성과를 소개했다. 전에 이 대학교 교의(校醫)가 한 수학과 학생의 병을 진단할 때, 뜻밖에도 그의 머리가 정상인보다 약간 더 큰 것을 발견했다.
이에 교의는 이 학생을 로버 교수에게 보내 추가적인 검사를 받아보게 했다. 이 학생은 성적이 우수했고 IQ가 126에 달했다. 로버 교수가 CT로 학생의 머리를 검사해보니 놀랍게도 그 학생은 대뇌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개인의 사생활 정보보호를 위해 해당 학생의 이름을 공개하진 않았다.
로버 교수가 보기에 이 사례는 비록 특수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드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대뇌반구가 매우 작지만 지능이 정상적이고 생활이나 학습에서 일반인과 다르지 않은 ‘무뇌인’들이 드물지 않기 때문인데 그는 이들에 대해 ‘대뇌가 보이지 않는다’고 표현했다.
오늘날 뇌수술 기법이 발달함에 따라 뇌의 절반을 잘라내도 멀쩡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중국 하남성의 8세 소년 정소한(鄭小寒 정샤오한)은 2010년 11월 뇌전증 때문에 좌뇌를 절제했다. 이후 그는 병세가 호전되었고 학습 능력도 향상되었다.
의사는 그의 우뇌가 한쪽으로 쏠리는 것을 막기 위해 좌뇌에 생리식염수를 주입한 후 좌우 뇌를 가림막으로 막아놓았다. 현대의학에 따르면 뇌전증 환자의 90% 이상이 뇌수술 이후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
미국 버지니아 주에서도 뇌 없는 아기가 있는데, 이 아이는 두개골 전체가 물주머니일 뿐이며, 의사는 불과 몇 주밖에 살 수 없다고 단언했지만, 사실 5년 동안 즐겁게 살았다. 이 아이는 TV 시청을 좋아하며, TV 프로그램에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오면 따라서 웃는다. 그렇다면 이 무뇌아의 의식은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사람의 의식과 뇌의 분리는 다른 과학 실험에서도 입증할 수 있다. 1966년 의사가 사람의 두개골을 열고 미세한 전극을 사용해 뇌의 특정 영역을 자극했을 때 자극 시작부터 인체가 반응을 보일 때까지 0.5초의 간격이 존재함을 발견했다.
만약 사람의 의식이 뇌의 기능이라면 자극과 반응이 거의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 이 지연 효과를 설명하려면 오직 의식과 뇌가 하나가 아니며 의식이 뇌와 독립적이라는 가능성만 존재한다.
1963년 노벨 의학상을 수상한 호주의 신경생리학자 존 에클스(Sir John Carew Eccles 1903~1997년)는 1978년 다년간의 연구 경험을 요약해 뇌의 흥분이 꼭 정신 및 의식과 같지 않다는 놀라운 견해를 제시했다.
그는 사람은 뇌와 독립적인 ‘자각(自覺)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뇌는 단지 그것의 물질적 도구일 뿐이라고 보았다. 이 자각정신은 뇌와 독립적인데, 우리가 전통에서 말하는 소위 ‘영혼(靈魂)’과 많이 닮지 않았는가?
이외 임사체험(臨死體驗), 최면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에서도 유사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최근 이런 유형의 연구에서 많은 돌파가 있었고 성과가 풍성해져서 이미 독립적인 학과를 형성했다. 독자 여러분들이 인터넷에서도 관련성과를 쉽게 검색할 수 있다. 여기서는 편폭의 제한으로 길게 언급하지 않겠다.
2. 정신과 물질의 관계
유물론자들은 늘 물질이 의식을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손이 화상을 입으면 사람이 통증을 느낄 수 있지만 반대로 통증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사람이 화상을 입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심리학자들은 이런 일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실험으로 입증했다.
그들이 실험 대상자(피험자)를 빈 방으로 데려가는데 이때 옆방에서 벽을 사이에 두고 이따금 비명이 들리게 했다. 의사는 피험자에게 이 테스트는 주로 사람이 통증을 견딜 수 있는 능력 한계를 테스트하는 것이라고 알려주고는 창문을 열어 전체적인 실험 과정을 참관하게 했다.
그러면 한 사람이 의자에 단단히 묶여 있는 것을 보는데 옆에 난로 안의 숯불이 빨갛게 타올랐고, 의사가 난로에서 빨갛게 탄 동전을 들어 묶여 있는 사람의 팔에 갖다 대 ‘칙’하는 소리만 들렸고, 팔에서 가벼운 연기가 피어오른다. 이어서 참혹한 비명 소리가 들린다. 실험이 끝나면 의자에 앉은 사람이 비틀거리며 내려오는데 화상을 입은 팔에 동전만한 크기의 화상 자국이 보인다.
의사는 피험자에게 동일한 시험을 몇 번 더 연속으로 보여준 후, 피험자를 실험실로 안내하고 그를 의자에 단단히 묶는다. 그리고 난로에서 똑같이 빨갛게 달아오른 동전을 들고 “지금 이 동전을 당신의 팔에 올려놓겠습니다.”라고 말한다.
피험자는 갑자기 뜨거운 물체가 팔에 떨어지는 것을 느꼈고, 그 후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고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의사들은 피험자의 팔에 동전 크기의 3도 화상 흉터가 난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피험자에게 미리 보여준 모든 실험은 다 거짓이었고, 화상이나 비명도 다 연기된 것이었다. 진짜 실험 대상은 단 한 명뿐인데 바로 마지막 피험자였다. 실제로 피험자의 팔에 떨어진 동전은 체온보다 약간 높은 온도를 가했을 뿐 화상을 입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이 3도 화상 흉터는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가? 오직 그의 정신 즉 그의 마음이 그의 근육에 화상을 입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즉 정신이 육체를 변화시켰고 물질적인 육체는 단지 정신의 도구일 뿐이다.
또 다른 비교적 흔한 사례를 들자면, 최면 심리 실험에서 의사가 끓인 물 한 잔을 손에 들고 피험자에게 말한다. 이것은 설탕을 많이 넣은 물입니다. 매우 달콤하고 달기 때문에 마신 후에는 매우 편안할 것입니다.
피험자는 깊은 최면에 걸린 상태에서 이 끓인 물을 마신다. 의사는 즉시 피험자를 깨우는데, 놀랍게도 피험자의 혈당 농도가 실험 전보다 훨씬 증가한 것을 발견했다. 마치 설탕이 많이 든 음료를 마신 것과 같다. 대체 누가, 어떻게 이 당을 혈액 속에 넣었단 말인가?
‘플라세보 효과(위약효과)’와 같은 심리적 암시는 일상생활에서 아주 흔하다. 1955년 헨리 비처(Henry K. Beecher) 박사는 환자의 약 4분의 1이 플라세보(僞藥 위약)을 복용한 후 요통, 관절통 등의 증상이 완화되었다고 지적했다.
여기서 플라세보란 맹물이나 전분 등 치료 효과가 없는 일반 물질을 전문 의약품으로 속인 가짜 약을 말한다. 비처는 환자 스스로 정신적으로 느낌이 훨씬 편안해졌을 뿐만 아니라 부종이 사라지거나 완화되는 등 신체가 실제로 물질적으로 변한 것을 발견했다.
마찬가지로 과학자들은 환자가 치료 효과를 믿지 않아 상태를 악화시킬 수 있다는 역(逆)플라세보 효과를 발견했다. 약물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끓인 물만 먹어도 환자 상태가 악화된다.
플라세보든 역플라세보 현상이든 모두 사람이 병에 걸리는 것은 “사람의 병은 정신이 70이고 질병은 30”이란 중국 속담을 확인시켜준다. 물론 사람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의지력이 강해서 외부인의 암시에 쉽게 이끌리지 않는 사람도 있다.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 마틴 가드너는 정신이야말로 생명의 진정한 중추이고, 한 사람을 정신적으로 무너뜨리면 그 사람의 생명도 변형된다고 주장했다.
사람의 정신 분야에 대한 이런 직접적인 연구 외에도 일부 다른 분야 학자들의 연구도 이를 서로 검증할 수 있는 발견을 얻었다.
‘물 결정 실험’은 일본의 에모토 마사루 박사가 1994년 IHM 연구소에서 시작했다. 그는 영하 25도의 낮은 온도에서 물을 얼음처럼 고체로 얼린 후 고속 카메라로 200~500배 확대해 물의 결정화 과정을 촬영했다. 에모토 박사는 먼저 물이 담긴 병에 서로 다른 글자가 적힌 다양한 메모지를 붙여 물이 ‘읽게’ 한 후 인류의 문자 정보를 읽은 후 물이 결정되는 상황을 촬영했다.
연구원이 물을 담은 병에 다른 글자나 사진을 붙여 보여주었다. 그 결과 ‘고마워’를 본 물 결정이 아주 아름다운 육각형으로 선명하게 나타난 반면 ‘망나니’라는 글자를 본 물 결정은 깨져 흩어지는 것을 발견했다. 이 연구소는 1994년부터 10년 이상의 실험을 통해 물이 선악(善惡)을 ‘느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실 유사한 실험을 쌀이나 다른 것으로도 확장할 수 있다. 중국 《남방도시보(南方都市報)》의 보도에 따르면 2011년 11월 광동성 천하구(天河區) 화성(華成)초등학교 3, 4학년 학생들 사이에서 ‘쌀 실험’이 뜨거운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이 실험은 10월 초 이 학교에서 방영된 물 결정 실험에 관한 과학 다큐멘터리 《물은 답을 알고 있다》에 관한 것이다. 사람의 행동이 사물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직접 확인하기 위해 3, 4학년 학생들이 쌀 실험을 홍보하기 시작했는데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그 결과 많은 아이들이 같은 결론을 얻었다. 같은 장소에 기본적으로 동일한 조건하에서 늘 칭찬을 받은 밥은 여전히 희고 약간 노랗게 된 반면, 늘 욕만 먹은 밥은 일찍 검게 변해 냄새가 나는 것을 발견했다.
2005년 대만에서도 유사한 실험이 발표되었는데 제목은 《학교 선념(善念) 실험 특집 (1) 선념이 당신에게 아름다움을 가져다줍니다》이다. 관심 있는 독자들은 한번 시험해 볼 수 있는데 전문가들은 실험자의 생각이 아이처럼 순수하고 선입견이 없어야지만 실험의 요구조건을 충족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최근에는 의념 통제에 대한 새로운 성과도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예를 들어 2006년 6월 8일 파리에서 열린 유럽연구혁신전시회에서 24쌍의 전극을 가진 모자를 쓴 미국인 과학자 피터 브루너는 즉석에서 눈을 통해 의념을 노트북에 전달해 큰 화면에 “B-O-N-J-O-U-R(안녕이라는 뜻을 지닌 프랑스어)”이라는 메시지를 적어 참관하던 과학자들과 관객들을 놀라게 했다.
2009년 대중(臺中) 근익(勤益) 과학기술대학교와 대보(大寶) 과학기술이 공동으로 개발한 의념 헤드셋은 피험자가 착용하기만 하면 의념을 통해 영상과 사물을 제어할 수 있다.
일본, 영국, 미국 및 기타 여러 국가에서 운동 마비 환자가 의념으로 의족(義足)을 직접 제어할 수 있게 하는 연구를 수행해 많은 고무적인 결과를 얻었는데 여기서는 일일이 열거하지 않겠다.
3. 영혼과 윤회의 객관적 증명사례
《동방여성(東方女性)》 잡지 2002년 7월호에는 해남(海南)성 동방(東方)시 감성(感城)진에 사는 ‘이세(二世) 기인’ 당강산(唐江山 탕장산)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당강산의 부모와 마을 노인들에 따르면 그는 세 살 때(1979년) 어느 날 갑자기 부모님께 이렇게 말했다.
“저는 당신들의 아이가 아닙니다. 전생에 진명도(陳明道)였고 부친은 삼야(三爹)입니다. 우리 집은 담주(儋州)에 있는데 바닷가 근처입니다.”
그는 또한 당시 문화대혁명 기간에 무장 투쟁에서 칼과 총에 맞아 죽었다고 말했다. 더욱 이상한 것은 그가 담주 방언을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원주: 담주 사람들이 쓰는 말은 복건 방언을 사용하는 해남과 다르다). 그의 허리에는 또 전생에 벤 칼자국이 남아 있었다.
당강산이 6살이 되던 해 부모는 그의 재촉을 견디지 못해 차를 타고 아들이 전생에 살았다고 주장하던 담주시 신영진(新英鎮) 황옥촌(黃玉村)에 갔다. 당장산은 곧장 진찬영(陳贊英) 노인의 집을 찾아가 담주 방언으로 ‘삼야(三爹)’라 불렀다.
그러면서 아들 진명도가 죽은 후 동방시 감성진에서 탁생했고 지금 전생의 부모님을 찾으러 왔다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자신의 두 누나와 두 여동생 및 마을의 다른 친지들을 알아보았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그가 전생의 여자 친구를 알아 본 것이다.
6살 당강산이 말한 전생이야기, 그가 기억한 전생 장면 및 친인척들의 확인을 통해 자신이 전생에 진명도였다고 설득하자 진찬양 노인은 그 자리에서 당강산을 부둥켜안고 울었고 그가 자신의 아들 진명도가 환생한 인물이라고 인정했다.
그 이후 당강산은 매년 동방과 담주를 왕래하며 두 집과 두 부모를 갖게 되었다. 진찬영 노인과 가족 및 마을 사람들은 그를 진명도로 여겼다. 진 노인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당강산은 줄곧 아들 노릇을 했으며 1998년 진 노인이 사망할 때까지 효도를 다했다.
이 잡지사 편집부 직원들도 처음엔 이 일을 믿지 않았지만, 반복적인 조사와 검증 끝에 이 일의 진실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같이 전생을 기억하는 사례들이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 다 있다. 또 동양의 전통문화에서만 윤회를 말하는 게 아니라 서양에도 관련 보고가 있으며 또 많은 학자들이 윤회를 연구하고 있다.
서양 의학에서 윤회전생(輪回轉世)에 대한 연구는 1960년대 무렵부터 시작되어 줄곧 발전해 왔으며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하나는 전생을 기억하는 아동들의 사례를 수집하고 검증하여 전생 가능성과 관련 현상을 연구하는 것이다.
이 방법의 절차는 먼저 대상자를 발견하고 자료를 수집하고, 의혹 제기하고, 직접 만나 증거를 수집하고 추적 관찰한 후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실행이 간단하고 신뢰할 수 있으며 또 누구나 이해하고 검증할 수 있다. 때문에 객관성과 신뢰성이 높으며 발굴된 일부 사례들은 아주 놀랍고 또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추적 및 관찰이 일반적으로 몇 년 이상 지연되기 때문에 이 방법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
또 다른 유형은 정신과 의사의 지도하에 최면 상태에서 전생을 회상하는 것이다.
첫 번째 방법은 미국 버지니아 대학의 저명한 정신과 의사인 이안 스티븐슨 교수가 대표적이다. 1960년 스티븐슨 교수는 미국심령연구협회(The American Society for Psychical Research) 저널에 《전생 기억 증거》라는 파격적인 문장을 발표했다. 이 글은 현대 서양 윤회 연구의 서막이 되었다. 이후 스티븐슨 교수는 윤회전생(輪迴轉生) 연구에 자신의 모든 정력을 집중했다.
지금까지 40여 년 동안 전 세계에서 2,600건의 사례를 수집하고 10권의 전문 저서와 수십 편의 학술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 중 많은 것들이 연구자들에 의해 고전으로 인용되고 있다. 그는 전통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연구를 수행했는데 어떤 유형의 연구자든 그의 저서와 논문들을 인용한다.
특히 《환생을 암시하는 20가지 사례》(Twenty Cases Suggestive of Reincarnation)와 《어떤 아이들의 전생 기억에 대하여》(Children Who Remember Previous Lives)가 흔히 인용된다. 그는 윤회전생 연구 분야에서 엄숙한 태도와 스타일 및 두드러진 학술적 지위 때문에 사회적으로 전례 없는 존중을 받았다.
두 번째 전생 추적 방법 연구자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브라이언 와이즈 박사다. 그는 자신의 첫 번째 저서 《나는 환생을 믿지 않았다(Many Lives, Many Masters)》는 이미 200만 부가 발행되어 20여 종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중국어 번역본 《전세금생(前世今生)》도 대만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나중에 윤회전생 연구에서 유명한 인물이 된 많은 전문가와 의사들이 애초 전생(轉生)을 믿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자신들이 직접 도출한 결과를 앞에 두고 회피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었으며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 대부분은 불신, 충격, 동요를 거쳐 마지막으로 믿게 되었고 적극적으로 연구에 임하는 과정을 거쳤다.
또 한 가지는 서방 특히 미국에 특이공능자(psychic 초능력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비록 직접 윤회전생 연구를 하진 않았지만 윤회전생이란 사실을 사회에 널리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 중 일부는 앞서 언급한 주류 연구 중의 일부 과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기이한 질병을 치료하거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특별한 능력 때문에 대부분 사회적인 지위와 명성을 지니고 있으며 일부는 아주 유명하다.
앞에서 언급한 두 번째 유형의 연구자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다른 사람의 질병을 치료해주거나 생활속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전생을 관찰한다. 차이점이라면 의사들은 ‘전생회귀’를 통해 환자 스스로 자신의 전생을 볼 수 있지만 이들은 자신의 공능(초능력)을 사용해 환자의 전생을 본다.
아래에서는 서양에서 유명한 윤회 사례에 대한 보도와 연구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2006년 9월 8일 영국의 ‘더 선’ 온라인에서 전생을 기억하는 남자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보도했다. 당시 6살이었던 캐머런 맥컬리(Cameron Macaulay)라는 소년은 겉으로 보기엔 보통 아이와 별 다른 차이점이 없었다. 유일한 차이점이라면 늘 전생의 엄마와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고 또 바닷가에 있는 하얀 집을 그리기 좋아했다는 점이다. 이는 모두 그의 현재 생활과는 전혀 무관한 것들이었다.
캐머런이 말한 장소는 모두 가족들이 가보지 못했던 곳이었는데 현재 그가 사는 글래스고에서 257km나 떨어진 바라 섬이었다.
그의 현생의 어머니인 노마의 소개에 따르면 캐머런은 말을 처음 배울 때부터 바라 섬에 살던 시절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그의 전생의 아빠는 교통사고로 죽었고 형과 누나가 있었다고 했다. 심지어 아빠 이름이 셰인 로버트슨(Shane Robertson)이라고 했다. 그는 또 자신이 말한 엄마는 전생의 엄마이며 자신은 전생을 진실로 믿으며 전생의 엄마와 가족들이 자신을 그리워한다면서 걱정했다.
집에 대한 묘사도 매우 구체적이었다.
“지금 집에는 화장실이 하나밖에 없지만 바라 섬 집에는 세 개나 있어요.”
“그 집에서는 비행기가 해변에 착륙하는 장면을 침실 창문으로 볼 수 있어요.”
캐머런은 끊임없이 노마에게 바라 섬에 데리고 가달라고 간청했다.
이혼녀였던 노마는 수년간 캐머런의 이야기로 고통을 받아왔다. 그녀는 캐머런이 말한 것을 전혀 믿지 않았으며 동생 마틴까지 영향을 받을까 두려웠다.
노마는 결국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아들을 데리고 바라 섬에 가보기로 했다. 마침 아동의 전생을 연구하던 미국 버지니아 대학의 심리학자 짐 터커(Jim Tucker) 박사가 동행했다.
캐머런에게 바라 섬으로 간다고 알려주자 아이는 기뻐서 펄펄 뛰었다. 캐머런 가족이 바라 섬에 도착한 것은 2006년 2월이었다. 노마와 터커 박사는 바라 섬에 도착하자마자 놀랐다. 비행기가 정말로 해변에 착륙하는 모습이 보였는데 캐머런이 말한 것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캐머런은 비행기에서 내릴 때 두팔을 휘두르며 “내가 돌아왔다!”며 큰소리로 외쳤다. 동시에 일행은 인근 호텔에서 로버트슨이라는 사람이 바닷가 흰 집에 살고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노마 일행은 캐머런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채 흰 집이 있는 장소로 가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려 했다. 그 장소는 매우 편벽한 곳이었으나 캐머런은 단번에 그 집을 알아보았다. 뛸 듯이 기뻐하던 캐머런은 막상 집 가까이 가자 흥분한 기색이 사라졌으며 안정을 되찾았다. 이전 집 주인은 이미 세상을 떠났으며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캐머런은 슬픈 기색이었다.
열쇠를 보관하고 있던 사람이 그들에게 집안으로 들어가 보게 했다. 집안에는 캐머런이 말한 대로 정말 화장실이 세 개 있었고 또 침실에서 바닷가 경치를 볼 수 있었다.
캐머런은 글래스고의 집으로 돌아온 후 많이 안정됐다. 바라 섬 여행은 캐머런의 마음을 후련하게 해주었으며 더 이상 바라 섬을 그리워하지 않게 했다. 가족들은 더 이상 캐머런이 한 얘기가 꾸며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캐머런의 경험은 이후 영국 TV방송국에 의해 ‘이 소년의 전생’이란 다큐멘터리로 방영되기도 했다.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12/7/2/25961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