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도록 차안에 앉아 가는 것은 여간 힘든일이 아니더군요..
티벳 다닐때 삼일 밤낮을 좌석도 없이 통로에 앉아 버스를 탓던 것에 비교하면 호화로운 것이지만요..
옆에 처사님께서 "아이쿠~~ 허리야~" 할 때면 마음이 아팠습니다.. 될 수 있으면 낮에 다니는 것이 좋겠습니다.
백담사 주차장인 용대리에 들어서니 새벽 5시더군요.... 용대리에서 백담사 까지 운행하는 버스는 7시에 운행한답니다... 6시부터 하는 줄 알았는데 한시간을 더 기다려야한다니 약간은 씁슬하더군요..
강원도에 들어서니 비가 계속내립니다.. 백담사 주차장에서 기다리는데도 그치지 않더군요..
6시가 넘으니 먼저 와 있던 차들에서 사람이 내리더니 앞을다투어 줄을 섭니다. 아직 3~40분 이상 남았는데 우의 입고 비맞으며 기다려봐야 얼마나 일찍간다고.... 우리는 7시에 나와서 잠시 기다린후 마을 버스를 타고 백담사를 향했습니다..
백개의 웅덩이를 지나야 백담사가 있다고 할 정도 아름다운 계곡엔 물이 많이 불어 누런 흑탕물이 계곡을 덮어 휩쓸고 내려 갑니다..
장관이라면 장관이지만 물구경을 많이 해보니 그렇듯 큰 감동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백담사에 도착하여 먼제 대웅전 앞에 모이라해서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독송했습니다..그리고 대중들에게 말했습니다..
"봉정암 가는 길을 통제하고 있다고 합니다..대통령이 와도 화요일까지는 못올라간다고 합니다..그래도 우리는 전진 할 것입니다.. 통제하는 곳까지라도 가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말씀드리고 일단 공양먼저 드시라고 했습니다..
그사이에 스님들과 일정을 논의 했습니다.. 이대론 올라갈 수 없으니 일정을 변경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건봉사에서 사시불공을 올리고 점심공양을 합시다.. 그리고 낙산사를 참배한후 오대산 상원사 중대에 가서 저녁공양을 하고 기도합시다.. 내일은 법흥사에 참배후에 각자의 집에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렇게 합의를 본후 건봉사에 연락을 해서 공양준비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10시 반쯤에 건봉사에 도착했습니다...마침 불공중이라 큰법당에서 기도를 올렸습니다. 적멸보궁도 참배하고 부처님 치아사리도 참배 했습니다..
건봉사의 치아사리는 임진 왜란때 사명대사께서 통도사의 사리를 건봉사로 옮겨온 것이라고 하더군요..그럼 통도사는 지금 어떻게 된 것일까요?
건봉사게 유명한 것은 또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바로 염불만일회입니다.. 31명이 염불만일회를 결성하여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만일동안이나 하여 회향하는 날 모두 정토에 왕생했다고 합니다..그래서 이곳은 미타신앙의 중심지 였습니다..
건봉사를 뒤로하고 양양의 낙산사를 참배했습니다.. 볼이나서 민둥산이 되어버리니 보기가 안스럽더군요.. 그래도 불사는 한창진행중입니다... 어떤 법당은 다 완성하기도 했구요..
홍련암만 참배 하면 되지 않을까 했는데 구석구석 의외로 참배할 곳이 많습니다..
불사가 완성되면 장엄한 도량이 될 것같습니다.. 불사가 어서빨리 원만히 성취되길 바랍니다..
5시까지 오대산 상원사에 가려니 갈길이 바쁩니다..
이번 순례길엔 사진을 제대로 찍지 못했습니다..대중들을 통솔하려니 사진기 들고 다니기가 좀 거시기 하더군요.
건봉사---------------------
6·25전쟁 이전까지는 31본산의 하나였으나 현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神興寺)의 말사이다. 520년(법흥왕 7) 아도(阿道)가 창건하여 원각사(圓覺寺)라 이름했다. 758년(경덕왕 17) 발징(發徵)이 중건하고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를 베풀었는데 이것이 한국 만일회의 시초이다. 신라말 도선국사가 중건한 뒤 절 뒤쪽에 봉형(鳳形)의 돌이 있다고 하여 서봉사(西鳳寺)라 개칭했으며 1358년(공민왕 7) 나옹(懶翁)이 중수하고 건봉사로 다시 바꾸었다. 1464년 세조가 행차하여 자신의 원당(願堂)으로 삼은 뒤 어실각(御室閣)을 짓게 되자 이때부터 역대 임금의 원당이 되었다. 6·25전쟁 전에는 대웅전·관음전·사성전·명부전·어실각·불이문 등 총 642칸에 이르렀으나 6·25전쟁 때 거의 폐허화되었다. 유일하게 불타지 않은 불이문은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5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외에도 8기의 탑, 48기의 부도, 31기의 비석, 44점의 고승영정 등이 있었다.
낙산사-----------------------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神興寺)의 말사로서 해변에 위치하며 관동팔경의 하나로 꼽힌다. 낙산은 산스크리트의 보타락가(補陀洛伽 Potalaka)에서 유래한 말이며 관세음보살이 항상 머무는 곳을 뜻한다. 우리나라 3대 관음기도 도량의 하나인 낙산사는 671년(문무왕 11) 의상(義湘)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낙산사 창건 이후 이 절과 관련된 〈삼국유사〉의 기록으로는 원효(元曉), 조신(調信), 사굴산파의 개산조 범일(梵日)의 이야기 등이 전하고 있다. 이 절은 858년 범일에 의해 중건된 후 여러 차례 불타 중건이 거듭되었으나 6·25전쟁 때 완전히 소실되었고 1953년과 1976년에 다시 복구해서 원통보전(圓通寶殿)·종각(鐘閣)·일주문(一柱門)·선당(禪堂)·승당(僧堂)·객실(客室) 등의 건물이 있다. 문화재로 지정된 유물·유적은 낙산사동종(보물 제479호), 낙산사7층석탑(보물 제499호), 낙산사홍예문(강원도유형문화재 제33호), 낙산사원장(강원도유형문화재 제34호), 낙산사홍련암(강원도유형문화재 제36호), 양양낙산사사리탑(강원도유형문화재 제75호) 등이 있다. 1977년에 화강암으로 만든 동양 최대의 해수관음입상(海水觀音立像)이 있으며, 절 앞에는 의상의 전설이 담긴 홍련암 등이 있다. 그러나 2005년 4월 5일 강원도 양양 지역에서 발생한 큰 산불로 낙산사원장·원통보전·일주문·낙산사홍예문 등 주요 전각과 낙산사동종이 소실되고, 낙산사 7층석탑이 일부 손상되었다.
낙산사에 있는 조선 초기 동종. 1469년작. 보물 제479호. 높이 158cm, 입지름 98cm. 종의 정상부에는 등을 맞댄 용 2마리가 고리[鈕]를 형성하고 있다. 종의 어깨[鐘肩]에는 모서리가 없이 정상부에서 둥글게 몸체[鐘身]로 이어지고 있다. 어깨부분의 문양대에 연판(蓮瓣)을 1줄 둘렀는데 연판의 형태는 조선 초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장식적인 형태이다. 종신의 중앙에 굵고 도드라진 가로선을 3줄 둘러 상하 2단으로 크게 나누었는데, 상단에는 네 방향에 큼직한 보살입상을 1구씩 돋을새김했다. 보살상 사이에는 간격이 고르게 범자(梵字)를 4자씩 돋을새김하고, 어깨부분의 연판 문양대 밑에도 16자를 1줄로 배열했다. 보살입상은 합장한 자세이며 둥근 머리광배 안에 화려한 보관(寶冠)이 있고 어깨를 따라 흘러내린 천의(天衣)가 매우 유려한 곡선으로 퍼져내리고 양쪽 발은 각각 연화좌를 밟고 서 있다. 하단에는 종의 입부분[鐘口]에서 약간 올라온 곳에 폭 9.5cm의 문양대를 두어 고사리 모양으로 이어지는 물결 무늬를 양각했다. 이 범종은 조선시대 종으로는 비교적 큰 편이며 신라와 고려종의 구조나 표현양식을 벗어나 조선 초기에 형성된 특징을 보여주며, 장식과 형태가 아름다운 걸작품이다. 중앙의 가로선대와 물결무늬대 사이에 '성화 5년 기축'(成化五年己丑)으로 시작되는 긴 명문이 있어 주성연대와 조각장(彫刻匠), 주성장(鑄成匠)에 관한 사항 등을 알 수 있다. 2005년 4월 5일 양양 지역에서 발생한 산불로 낙산사가 불에 타며 낙산사동종도 소실되었다.
낙산사7층석탑 /낙산사7층석탑(조선), 보물 제499호, 높이 ...
낙산사에 있는 조선시대 석탑. 보물 제499호. 높이 6.2m. 낙산사의 원통보전 앞에 있는데 부분적인 손상은 있으나 상륜부까지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으며 고려시대 석탑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2단의 층을 이룬 지복석(地覆石) 위에 12잎의 복련(伏蓮)이 조각된 지대석(地臺石)이 있다. 중석(中石)에는 모서리기둥이 없고 그위의 갑석(甲石) 밑에는 부연(附椽)과 2단의 굄이 있다. 탑신부는 옥신석과 옥개석이 각각 1개의 돌로 되어 있는데 옥신석에는 모서리기둥이 없고 밑에 넓은 별석(別石)을 각 층에 삽입한 것이 특이하다. 옥개석은 평평하고 얇으며 추녀 끝은 반전(反轉)되었으며, 받침수는 모두 3단이다. 라마식의 영향이 보이는 상륜부는 별석 받침 위에 노반(露盤)이 있고 그위에 청동제의 복발(覆鉢)·보륜(寶輪)·보주(寶珠) 등이 청동제 찰주(擦柱)에 꽂혀 있다. 탑신에 비해 기단의 폭이 좁고 옥개석의 체감비율도 낮아 전체적으로 고준한 느낌을 준다. 이 탑은 낙산사가 세조(1455~68 재위) 때 크게 중창되면서 함께 건립된 것으로 생각되며, 강릉 신복사지3층석탑(神福寺址三層石塔)과 유사점이 있다. 2005년 4월 5일 양양 지역에서 발생한 산불로 낙산사가 불에 타며 낙산사 7층석탑의 일부가 손상되었다.
첫댓글 스님 대중들 들과 함께함이 힘들었을텐데 수고 많이 하셧습니다.홍련암에서의 기도와 상원사 적멸보궁기도는 환희심이 절로 우러 나왔답니다. 오랜만에 스님하고 같이 기도함이 너무 좋았답니다.스님 고맙습니다.성불하십시요.
평소에 가고 싶었던 월정사와 상원사를 참배되어 기뻤습니다. 상원사 적멸보궁에서 저녁기도와 처음 새벽예불을 올리게 되었는데 비몽사몽 졸다가 깨다가 제대로 기도를 드리지 못해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맑은 도량에서 스님들께서는 너무 열심히 기도해 주셨는데....다음엔 더욱 열심히 기도 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수고해주신 많은 분들 덕분으로 편안하게 다녀왔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감사합니다()()().
비롯 봉정암 참배는 못 하셨지만, 다녀오신곳이 참배 하기엔 힘든 곳으로 좋으셨겠어요.. 저도 8월엔 건봉사를 참배 하였는데 사찰에서 30분 이면 금강산을 갈 수 있다고 하여 바로 갈려하니.. 15일 전에 신청 체크 받아야 한다고 해서 되돌아 왔지요.. 건봉사는 남북한 합쳐 4대 사찰에 속한 규모가 큰 곳 이었대요.
스님_()_ 모두 건강히 잘 다녀오셨서 기쁨니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낙산사의 역사를 자세히 알려주시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작년에 저희들이 갔을땐 밤 늦게 폭풍우에 도착한 저희들에게 무척이나 친절히 대해 주셨던 두 분의 거사님과 평생 그렇게 간절한 마음이 되어 해수관세음보살님께 기도드린것과 다음날 폭풍으로 보타전의 기와가 마당에 바다를 이루어서 위험하다고 그냥 가라고 어느 보살님께서 말씀하셨지만, 평생 한번, 기약할 수없는 방문이라 저는 뛰어서 법당까지 다녀온것과, 해수관음보살님은 멀리서 바라보고만 올 수 밖에 없었고, 홍련암은 감깐 들어갈 수 있었지요. 참 아쉬움이 많았던 방문이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우기에도 불구하고 여러곳을 무사히 잘다녀 오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