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每日新聞/2011년 8월 6일(토)
나의 살던 고향은 □김성한 전 영주우체국장의 성주군 수륜면
폐가 지키는 허리굽은 감나무, 50년 전 소년을 기억하려나…
어릴 적 툇마루에 엎드려 숙제를 하다가 머리를 들어보면 저 멀리 웅장한 가야산이 굽어보고 있었다.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가야산을 일컬어 불꽃처럼 솟아오른 형상이라 했다. 그 가야산 끝자락에 자리 잡은 성주군 수륜면 수륜리 윤동마을, 그 곳은 내가 태어나고 유년기를 보낸 고향이다. 어미 소의 잔등이 같은 능선이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고, 앞들 논에는 진초록 벼가 춤을 추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또한 그곳은 단아하게 자리 잡은 고택들이 많다. 꼿꼿했던 선비들의 숨결이 서려있는 곳이다.
그러니까 벌써 몇 해 전 일이다. 초복이 얼마 남지 않은 7월 초순 무렵이다. 사무실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짱구 성한이가?” 투박한 사투리에다 가래 끓는 중년남자의 목소리이다. “누군데 초등학교 때 별명을 다 부르지.” 투덜거리며 “누구세요?”라고 물어보니 초등학교 동창회 총무란다. 이번 주말 고향 동네 앞 다리 밑에서 열리는 ‘지사초교 33회 동창모임’에 참석해 달란다. 픽! 쓴웃음이 나왔다. 다리 밑에서 동창회를 열다니. 거지도 아니고……. 그러나 모두들 다 안다. 발가벗고 멱 감으며 피라미 잡던 그곳이 보고 싶은 것을.
동창회가 열리는 그 날, 대구에서 고령을 거쳐 가야산이 보이는 고향동네인 성주 수륜 윤동까지 가는 길이 왜 그리도 멀게만 느껴지던지. 마음은 또 얼마나 설레던지. 이윽고 모임장소에 도착했다. 그런데 깜짝 놀랐다. 그 곳에는 웬 낯선 중늙은이들이 웃으며 떠들고 있지 않은가. 까까중머리에 콧물 흘리던 악동들은 다 어디가고……. 얼굴들이 참 많이도 변했다. 하긴 짧게는 오륙년에서, 길게는 근 반세기 만에 보는 얼굴들도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고 보니 사람만 변한 게 아니고 고향산천도 옛날 같지 않다. 저 멀리 가야산만 의구(依舊)히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을 뿐, 동네 앞 대가천도 많이 변했다. 내(川)중간 중간에는 잡풀이 무성하다. 냇가의 모래톱도, 자갈밭도 조붓해져버렸다. 콸콸 굽이쳐 흐르던 시냇물은 말할 것도 없고. 상류에 들어선 댐 수문(水門)조절로 내 폭이 좁아져서 그렇게 되었단다. 동네 앞 들판도 변하긴 마찬가지이다. 지금쯤 한창 진 초록색 벼로 도배되어 있어야 할 논에 하얀 비닐하우스가 지천으로 서있다.
“내 놀던 옛 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산천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
라는 노래가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다.
시멘트 다릿발에도 세월의 때가 덕지덕지 묻어 있다. 유년 시절 이 자리에는 섶 다리가 놓여 있었다. 아래뜸 ‘중리어른’ 키만큼이나 깊은 물속에 두 다리를 벌리고 서있는 섶 다리는 매년 가을걷이가 끝나면 마을사람들이 울력을 해서 놓는다. 물에 강한 두 갈래의 물푸레나무로 다릿발을 만든 다음 그 위에 참나무와 청솔가지를 올리고, 뗏장과 흙을 깔아 상판을 만들면 다리가 완성된다. 건널 때마다 약간씩은 흔들리지만, 기실은 황소를 몰고 가도 꺼지지 않을 정도로 튼실하다. 다리공사가 끝나면 마을에서 가장 연세가 많으시고, 허연 수염까지 기른 토실어르신이 제일 먼저 건너셨다.
그 옛날 산 높고 골 깊은 두메산골에는 사람들이 그립다. 특히나 이쪽 동네에서는 내(川) 건너 저쪽 마을사람들의 소식이 궁금하다. 섶 다리는 양쪽 마을사람들의 안부를 품고 있었으리라.
갑자기 다리 밑이 왁자지껄하다. 모두들 초등학교시절 빛바랜 추억 보따리를 풀어헤치느라 갑년(甲年)을 넘긴 얼굴들에는 낯꽃이 피어 있다. 공부시간 중에 묘사 떡 얻어먹다가 엉덩이 큼지막한 여선생님에게 혼난 일, 운동장 한쪽 채소밭에 인분(人糞) 퍼 나르던 얘기와, 혁명공약을 못 외어서 벌 청소하던 일 등 끝이 없다. 봄이면 학교 뒷산 진달래 꽃무리에 숨어있던 문둥이(한센병 환자)가 ‘간을 내어 먹었다.’라는 얘기도 나온다. ‘누구는 누구를 좋아했다.’에 이어 ‘어느 남선생님과 여선생님이 뽀뽀하는 장면을 봤다.’라는 얘기에는 모두들 배꼽을 잡고 웃는다. 그 옛날 앞니 빠진 갈가지(범의새끼를 일컫는 방언)가 아닌 누런 금이빨들이 웃고 있다.
옆 자리 창환이와 함께 냇둑 위로 올라가 보았다. 냇물을 에워싸고 있는 모래사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옛날 한가위 보름달이 둥실 떠오르는 날 밤이면, 이곳 모래톱에서는 마을 아낙네들의 ‘칭칭이놀음’(‘쾌지나칭칭 놀음’의 경상도 방언임)이 벌어졌다. “청천 하늘에는 잔별도 많다∼.” “칭 기나 칭칭 나 네∼” 선소리꾼인 안골댁이 사설(辭說)을 메기면 하얀 옥양목을 입은 마을 여인네들은 덩실덩실 춤을 추며 후렴을 부른다. “우리네 가슴엔 수심(愁心)도 많다∼.” 채 서른 살도 되기 전에 청상(靑孀)이 된 안골댁의 한(恨)서린 목소리 가 냇물을 따라 번져나간다. “칭 기나∼ 칭칭∼ 나 네∼” 아낙네들의 후렴도 내 건너 절벽을 받고 되돌아온다.
일 년 내내 바쁜 농사일 때문에, 또는 시어머니의 눈총이 무서워서 밤 마실 한번 제대로 못 가던 여인네들도, 추석날 밤이면 이곳 모래사장에 모여 한 바탕 춤사위를 벌였다. 늘 땀에 전 삼베적삼만 입다가 이날은 하얀 달빛을 닮은 옥양목 저고리를 입었다. 쪽진 머리에 쓰고 다니던 하얀 손수건도 이날만은 나풀나풀 함께 춤사위를 벌였다.
갑자기 꼬맹이 시절 뛰어놀던 새마골 마을이, 오남매 일곱 식구가 살았던 집이 궁금해진다. 같이 냇둑에 올라온 창환이도 궁금하긴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옛 마을에 한번 들러보잔다. 반 마장 떨어진 그 곳에 가보니 집 꼴이 말이 아니다. 슬레이트 지붕은 반쯤 내려앉았다. 벽은 곧추 서있지도 못하고 비스듬히 기대어 서있다. 안방은 거미들이 씨줄날줄을 그려 놓았다. 거미들의 문패로 바꿔단지도 오래되었다. 다행히 허리 굽은 감나무 한 그루가 폐가를 지키고 있다. 우듬지에 매달린 오종종한 풋감들이 50년 전 감꽃 꿰매던 소년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 옛날 고향 마을에서 시오리나 되는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 사택 뒤편에는 감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이름 모를 들꽃이 지천인 오월이 되면, 감꽃도 뒤질세라 노란 꽃술을 삐죽이 내밀었다. 봄볕에 새카맣게 그을린 얼굴에다, 검정 책보자기를 허리에 동여맨 우리들은 학교 파하기가 무섭게 감꽃을 줍곤 했었다. 주운 감꽃을 실에 꿰어 팔찌도 만들고 목걸이도 만들어 보았다. 감꽃 화관(花冠)을 만들어 친구들 머리에 씌워주며 깔깔대던 기억이 난다.
내 건너 밭둑에는 헐렁한 고무줄 바지를 입은 촌부가 호박이파리를 따고 있다. 어린 시절 보릿고개를 막 넘긴 이맘때쯤이면, 두레상 위에 자주 오르는 것이 호박잎쌈이다. 모기떼가 앵앵거리는 여름날 저녁, 아버지께서는 모깃불 피워놓은 마당 가 살평상에 앉아 날된장에 보리밥 한 덩어리를 호박잎에 싸서 잡수시곤 했었다. 매캐한 모깃불 연기가 담벼락을 넘어가는 날 밤이면, 뒷집에 사는 ‘놀부 식이’가 자주 놀러왔다. 놀부 별명 값을 하려는지, 식이는 어린 호박에 욕설 새기는 짓을 좋아했다. 칠팔월 뜨거운 햇볕에 호박이 커지면 욕설도 따라 커져갔다. “콧물 찔찔이 식아, 어디에서 정붙이며 살고 있노?” 문득 어느 시인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난다.
‘ㅇㅇ아, 보고 자퍼서 죽겠다. ×펄’
칠월 긴 긴 하루해가 오늘은 참 짧다는 느낌이 든다. 온종일 대지를 달구던 태양이 냇물 속에 얼굴을 반쯤 담근 채 눈을 찡긋하고 있다. 작별인사라도 나누려는 모양이다. 이 때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들 일어서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김성한(수필가. 전 영주우체국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