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조통달 명창 소리인생 60년 “ 回(회) 演(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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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최 |
사)세종전통예술진흥회 |
장소 |
해오름극장 |
기간 |
2010-06-26 |
시간 |
오후 5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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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전화 |
010-2381-0272 |
관람료 |
R석 50.000원 A석 30.000원 B석 20.000원 |
1부 여는마당 - 헌정의 글 출연 : 유준열 외 제자 일동 - 비 나 리 출연 : 청배 사물단
- 판소리 연창 출연 : (수궁가)유태평양 외 4명, (흥보가) 김유진 외 5명 북반주/ 이정원 - 조통달류(아쟁산조) 출연 : 조통달, 반주/ 이진용 - 단막창극(화초장막) 출연 : 조통달(놀보),유태평양(흥보),송나영(홍보처) 반주/ 서영호(아쟁) 외 천·지·연 예술단
2부 축하마당
- 가야금 병창 출연 : 문명자 별빛가얏고 예술단 - 상 생 출연 : 유태평양(드럼),김태훈(베이스기타) - 전통무용(입춤) 출연 : 팝핀현준, 이현숙 무용단 - 화(和) (대중음악) 출연 : 유태평양 과 7월의 아침 유태평양(드럼),솔(보컬),태훈(베이스) 강민규(기타),강전호(퍼크션),가현(바이올린) - 25현의 추억 (락앤롤,붉은노을,꽃) 출연 : 가연하비 예술단 (노원호 외 11명)
- 조관우 (Special stage) 출연 : 조관우(가수), 팝핀현준(Dance) - 메나리 환상곡 출연 : 유태평양 과 천·지·연 예술단 유태평양(장구&모듬북),서영민(해금) 서영훈(피리·태평소),이진용(대금),노원호(가야금) 이명효(타악),정명수(베이스기타),현경윤(신디)
<조통달 명창의 소리세계 >
명창 조통달은 1945년 전북 익산 황등에서 태어나 그의 이모인 당대 최고의 여류명창, 박초월의 아들로 양자들어 판소리를 전수받게 된다. 태아적부터 소리 속에 묻혀 이미 귀명창이 되어 태어난 조통달은 판소리에 뛰어난 재질을 보이며 몸보다도 더 큰 소리북을 같이하며 5세가 되던 1950년 판소리에 입문하여 아기명창으로 데뷔한다. 타고난 성량과 목구성은 듣는 이들로 하여금 장차 대명창이 탄생할 것이라는 예언 속에 칭찬과 찬사를 받으며 성장하여 그가 15세 되던 해 이승만 대통령 탄신기념 전국명창대회에 1등상을 차지한 것은 대 명창으로 탄생될 것이라고 예견했던 사람들을 대변이라도 하 듯 판소리계의 샛별로 주목을 받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참 그가 성장할 나이에 변성기를 맞아 그의 특유한 수리 상성과 풍부한 성량을 잃게 되어 끝없는 좌절의 연속으로 삶과 죽음의 벽에 부딪혀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방황의 시간은 20년이 흘렀다. 강산이 두 번 변한 셈이다. 인내의 고통은 죽음의 고통보다도 더했던 20년 동안 인고의 세월은 헛되지 않고 그의 끈질긴 노력으로 100일 공부에 성공한다. 대구 앞산에서의 100일 공부는 세인이 말하는 인간의지의 승리로 점철될 수 있다. 말하자면 목숨걸고 소리와의 싸움에서 대승하여 득음이라는 옥동자를 잉태시킨 것이다. 이로 인해 그는 제2의 탄생을 시작한 것이다. 흔히들 판소리 명창이 되려면 득음을 해야된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생피를 토하며 얻어지는 득음의 과정이란 인간의 한계에 이른다고들 말한다. 그 어려움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쉬운 소리를 하며 모험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통달은 그 한계를 넘어 소리꾼의 일가를 이루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명창 조통달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그의 외길은 그가 걸어온 역정이 그러하듯이 평탄한 길만은 아닌 듯 싶다. 그러나 판소리에 인생을 건 지나온 일들은 후회없는 시간이었음에 틀림없다. 본인이 이야기하듯 하느님이 보내주신 소리꾼이기에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는 1972년 국립창극단 입단 이후 창극에도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하여 “흥보전”의 흥보역, “별주부전”의 별주부역, “송홍록전”의 송홍록역, “춘향전”의 사또역, “배비장전”의 배비장역 등 창극의 주인공역도 도맡았고 13번의 전국 판소리 명창대회에 출전하여 단 한번도 2등을 해보지 못하고 1등만을 하게된 조통달은 10대에 판소리 명창소리를 듣던 그인지라 봉황이 푸른 창공을 날듯 1982년 전주대사습놀이 명창대회에서 장원하여 30대 후반에 당당히 판소리계의 중진 대열에 오른다. 또한 1987년 광주에서 열린 특장부 명창대회에 도전하여 1등으로 대통령상을 차지했으며 1981년 수궁가완창을 필두로 판소리의 불모지인 부산 문화회관 완창까지 총 28회의 완창기록을 갖고 있다. 그는 국내에 알려지기 전 이미 해외에서 활약하여 1974년부터 3년간 미국 하와이 및 일본 삿보르 등지의 동포 위문공연 단장으로 국위를 선양했으며 1988년에도 유럽7개국, 11개 도시를 명창 안숙선, 고수 고 김동준 선생과 38일간이나 순회하며 공연한 바가 있다. 특기할 만한 것은 그가 오늘이 있기까지 그를 칭찬하는 원로 국악인들은 만능 국악인이라 평하고 있다. 이미 소리와 기악은 물론 무용에 이르기까지 두루 섭렵하여 모든 것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조통달이 7세 되던 해 고 박초월 선생은 당시 거문고 산조의 최고 명인인 신쾌동 선생을 초빙, 지도케하여 거문고에 눈을 뜨게 하였고 변성기로 인해 목을 잃었을 때 그의 한을 아쟁과 가야금에 실어 오늘의 조통달류 아쟁산조를 만들고 성금련류 가야금 산조를 자기에의 예술로 승화시켰다.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듯이 어느 누구도 그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명창 조통달은 국악을 위해서라면 한시도 시간을 허비해 본 적이 없는 만능 국악인이며 국악을 위하여 태어난 사람이다. 조통달 그는 이제 국악 인생 소리인생 60주년을 맞이하고 있다. 인생으로 말하면 회갑을 맞이한 것이다. 되돌아보면 어쩌면 조통달 명창의 60년 소리 인생은 본인이 말하듯이 피와 땀과 눈물로 얼룩진 세월이었다고 생각 된다. 그 외롭고 힘들었던 형극의 지난 길은 헛되지 않고 이제 우리 민족음악의 본류인 판소리 역사의 혼으로 반드시 자리할 것이다. 현재 사단법인 세종전통예술진흥회의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남대학교, 우석대학교, 전북대학교와 백제예술전문대학, 목원대학교에 출강하여 후학들을 지도하며 바쁜 생활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가 있는 곳에는 멋이 있고 예술인의 고집과 예술인의 열정이 응집되어 있다. “조통달” 그는 분명 우리나라 국악계의 크나큰 보내로써 큰 점과 획을 남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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