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씨와 봄눈
이 준 연
차거운 바람이 휘파람소리를 내면서 획획 지나갔읍니다. 바람이 텅빈 꽃밭 위로 스쳐갈 때마다 마른 잎들은 훨훨 흩날렸읍니다.
“욍! 욍!”
바람은 점점 더 거칠어졌읍니다. 조그만 봉선화꽃씨 하나가 꽃밭에서 떼굴떼굴 굴러다녔읍니다.
“아이 추워, 이걸 어쩌면 좋아, 텅빈 꽃밭엔 나 혼자뿐인걸, 아이 추워.”
봉선화꽃씨는 울상이 되었읍니다. 눈을 똥그랗게 뜨고 아무리 찾아보아도 텅빈 꽃밭엔 저 혼자뿐이었읍니다.
“다들 어디로 갔을까?”
해바라기, 채송화, 분꽃, 코스모스, 모두들 어디로 가버렸는지 영영 보이지 않았읍니다.
“버스럭 버스럭------”
수수깡울타리 밑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읍니다.
“어------춥다. 오늘밤에는 또 찬눈이 오겠는걸.”
새앙쥐 한 마리가 오들오들 떨면서 꽃밭으로 어슬렁어슬렁 기어나왔읍니다.
“새앙쥐 할아버지! 새앙쥐 할아버지---”
봉선화꽃씨는 바람에 굴러다니면서 목메인 소리로 새앙쥐를 불렀읍니다. 새앙쥐는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이렇게 추운 날에 누가 나를 찾을까? 이 꽃밭에는 아무도 없을 텐데----”
새앙쥐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중얼거렸읍니다.
“새앙쥐 할아버지! 저예요, 봉선화꽃씨예요. 여기 있어요. 여기예요.”
봉선화꽃씨는 새앙쥐에게 제가 있는 곳을 가르쳐주었읍니다.
“봉선화꽃씨라?”
“예! 그래요, 저예요.”
“허 참! 이거 큰일났구나 눈이 어두워서 잘 안 보이는구나.”
새앙쥐는 눈을 땅에다 바짝 대고 더듬더듬하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벌떡 일어났읍니다.
“오라! 됐다. 좀 기다려라. 우리집에 돋보기안경이 있을 게다.”
새앙쥐는 수수깡울타리 밑으로 뽀르르 기어들어갔읍니다.
얼마 후에 새앙쥐는 수수깡으로 만든 안경을 콧등에다 걸치고 나왔읍니다.
“오오라! 너였구나! 다른 꽃씨들은 모두 땅속으로 들어가서 지금쯤 쿨쿨 겨울잠을 자고 있을 텐데------? 너는 외톨이가 되었구나. 쯔쯔……”
봉선화꽃씨는 눈물을 쫄쫄 흘리면서,
“나뭇잎 속에 들어가 있었는데 미운 바람이 나뭇잎을 날려버렸어요. 생쥐 할아버지! 저를 땅속에다 묻어주세요, 네?”
“뭐어? 뭐라구? 이렇게 땅이 꽁꽁 얼었는데 나보고 땅을 파라고? 원, 별소릴 다 하는구나! 나는 지금 몸이 후둘후둘 떨리고 배가 고파서 죽을 지경이다.”
새앙쥐는 쌀쌀스럽게 머리를 흔들면서 펄펄 잡아떼었읍니다.
“새앙쥐 할아버지! 저녁은 좀 있다 잡수시고 절 묻어주세요.”
봉선화꽃씨는 울음섞인 목소리로 애원했읍니다.
“-----?”
새앙쥐는 우두커니 서서, 아무말 없이 봉선화꽃씨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
읍니다.
“새앙쥐 할아버지! 이대로 조금만 더 었으면 전 얼어죽을 것 같아요. 꽁꽁 얼어버리면, 저는 봄이 와도 초록눈을 뜨지 못해요. 예쁜 꽃도 못 피우고요. 아주 영영 죽어버리는 거예요.”
봉선화꽃씨는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읍니다.
“이크! 눈이다. 눈.”
새앙쥐는 소리를 버럭 질렀읍니다. 거무스름한 하늘에서 하얀 눈송이가 히끗히끗 내렸읍니다.
새앙쥐는 깡총깡총 뛰면서 쫓기는 목소리로 말했읍니다.
“하는 수 없군, 어서 이리 오너라.”
새앙쥐는 조심스럽게 봉선화꽃씨를 입에다 살며시 물었읍니다.
새앙쥐는 앞발로 땅을 파고 그 속에다 봉선화꽃씨를 가만히 놓았읍니다.
“아! 인젠 됐다. 봉선화꽃씨야! 외롭고 쓸쓸하더라도 나머지 겨울을 여기서 지내야 한다. 조금만 있으면, 곧 봄이 을 게다.”
“새앙쥐 할아버지, 고마와요. 봄이 오면 할아버지네 집 앞뜰에 예쁜 꽃을 가득히 피워드릴께요. 할아버지, 안녕!”
봉선화꽃씨는 스르르 눈을 감았읍니다.
“봉선화꽃씨야! 예쁜 꿈 많이 꾸고 잘 자거라.”
새앙쥐는 파놓은 흙은 살살 뿌리면서 봉선화꽃씨를 알뜰하게 잘 묻어주었읍
니다.
“앗.”
캄캄하던 땅속은 형광등을 켜놓은 방처럼 갑자기 밝아졌읍니다. 봉선화꽃씨는 눈이 휘둥그래졌읍니다.
여름날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던 꽃밭처럼 땅속엔 조그만 꽃밭이 생겨났읍니다.
“어머나! 이게 누구야? 봉선화 아가씨가 아냐?”
“아! 해바라기 아저씨랑, 분꽃 아가씨랑, 코스모스, 맨드라미, 모두 여기에 다들 있었군요. 아이 어쩜------”
봉선화꽃씨는 반가와서 어쩔 줄을 몰랐읍니다.
봉선화꽃씨도 조그만 꽃이 되어, 땅속의 꽃밭에 피어 있었읍니다.
“봉선화야! 어디서 뭘 하다가 인제 들어왔니?”
꽃들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시작했읍니다.
“하마터면 나 혼자 밭에서 꽁꽁 얼어죽을 뻔했지 뭐예요. 그런데 고마운 새앙쥐 할아버지가 땅을 파고 묻어주었어요.”
봉선화는 차근차근 밖의 이야기를 시작했읍니다.
“밖엔 무척 쓸쓸해. 노랗게 물든 고운 잎들은 모두 찬바람이 쓸어가버렸어.
하늘은 밤낮없이 무섭게 찌푸리기만 하고 바람이 왕왕 지나가면 대추나무 할아버지랑 단감나무 할머니랑 모두 추워서 벌벌 떨고만 있어. 그리고 지금 밖에는 하얀 눈이 내려오고 있어. 아, 추워!”
봉선화는 생각만 해도 몸이 움추러드는지 몸을 웅크리면서 말했읍니다.
“나도 눈을 처음 봤는데, 하얀 꽃잎같이 생긴 게 어찌나 차가운지 혼났어요.”
“그렴 지금 밖에는 하얗고 차가운 꽃잎이 내리고 있니?”
“그래, 아이들은 추운 줄도 모르고 좋아서 야단들이야.”
“으응! 정말 이상하다.”
땅속의 꽃밭은 갑자기 물을 끼얹은 듯한 고요속에 잠겼읍니다.
꽃들은 살며시 눈을 감고 저희들이 좋아하던 아이들을 생각하고 있었읍니다.
코스모스는 소영이와 선이를 생각하고 있었읍니다. 비가 오지 않을 때, 시원한 물을 뿌려주면서,
“코스모스야! 예쁜 꽃 많이 피워, 응.”
하고 속삭여주던 소영이와 선이를 그리었읍니다.
해바라기는 이글이글 타오르던 햇님과 파란 하늘이 보고 싶다고 하면서,
“나처럼 씩씩하게 무럭무럭 자라겠다고 하던 민우가 보고 싶구나. 어서 빨리 봄이 왔으면------”
하고 꿈꾸듯 중얼거렸읍니다.
꽃씨들은 땅속에서 꿈을 꾸면서도, 가슴 조이는 마음으로 봄을 기다리고 있었읍니다.
“싸르르, 싸악, 싸르르·
“앗! 저게 무슨 소리지?”
맨드라미꽃씨가 밖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를 듣고, 조용히들 하라고 가만히 소리쳤읍니다.
“싸락, 싸르르------”
꽃씨들은 귀를 쫑그렸읍니다.
“저게 무슨 소릴까?”
“글쎄?”
“바람소리 아냐?”
“아냐. 바람소리는 윙윙 하잖아?”
땅속의 꽃밭에 피어 있는 꽃들은 밖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를 알아맞히지 못했읍니다. 꽃들은 고개를 번쩍 들었읍니다.
“얘들아! 조용히 해봐. 밖에서 이야기소리가 들려.”
꽃들은 입을 꼬옥 다물고 밖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소리를 정신없이 듣고 있었읍니다.
“우리들은 왜 이렇게 쓸쓸한 곳으로 내려왔을까?”
꽃밭 위로 내려온 눈송이들은 몹시 쓸쓸했읍니다. 하늘에서 내려올 때는 기쁨으로 부푼 가슴을 안고 내려왔는데, 땅위에 내려와보니 누구 하나 반겨주는 아이도 없고 지나가는 참새떼들까지도 거들떠보지 않았읍니다. 눈송이들은 서운한 마음으로 하늘에서 내려올 때, 바라던 마음을 이야기했읍니다.
“나는 사과처럼 빨간 아가의 뺨에 입을 맞추어주고 싶었는데. 이게 뭐야. 아이 속상해.”
“나는 눈사람이 되고 싶었어. 그리고 아이들이 눈싸움을 하는 하얀 공이 되었으면 했는데------”
이파리없는 나뭇가지에 내려와서 하얀 겨울꽃이 되고 싶었던 눈, 땡땡 울리는 교회의 종탑 위에 앉아보고 싶은 눈, 아이들이 쓰고 다니는 빨간모자에 달린 초록방울에 대롱대롱 매달려보고 싶은 눈, 꽃밭에 내려온 눈송이들은 저마다 하늘에서 내려을 때, 마음속으로 바라던 생각들을 이야기하고 있었읍니다.
“얘들아! 밖에 누가 왔나, 우리 모두 불러볼까?”
“그래, 그래, 동무가 없어 쓸쓸한가봐.”
“자, 그럼 목소리를 합해서, 고운 소리로 시작!”
“꽃밭에 오신 손님 누구세요?”
땅속에서 들려오는 예쁜 목소리에 눈송이들은 깜짝 놀랐읍니다.
“어머나! 누가 우리들을 부르고 있잖아. 예쁜 목소리로.”
“글쎄, 누굴까?”
“얘! 우리들도 빨리 대답하자, 응? 빨리빨리.”
눈송이들은 소리를 모아서,
“우리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눈송이들이에요.”
“우리들은 봄을 기다리는 땅속의 꽃씨들이에요.”
“하하하·--”
“호호호---”
서로들 얼굴도 보지 못하면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에 재미있는지 꽃씨들은 땅속에서, 봄눈은 땅위에서 깔깔 웃었읍니다.
봄눈과 꽃씨들은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웠읍니다. 외롭고 쓸쓸한 곳이라고 짜증을 내었던 눈송이들은 땅위에는 외롭고 쓸쓸한 곳이 한군데도 없다고 생각했읍니다. 어디든지 내려와보면, 수많은 씨앗들이 봄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읍니다.
노란 아침 햇님이 벙글벙글 웃으면서 둥둥 떠올랐읍니다.
“꽃씨들아! 햇님이 나왔단다. 우리들은 녹아버릴 거야.”
눈송이들은 꽃씨들과 헤어지는 것이 섭섭한지 가만히 말했읍니다.
“그럼, 저회들하고도 안녕을 해야겠네요. 섭섭해서 어떡해요.”
“눈송이들아! 섭섭하지만 할 수 없는걸, 뭐.”
“요 다음에 올 때는 너희들이 좋아하는 봄비가 되어서, 보슬보슬 내려올께.”
“눈송이님들! 고마와요. 저회들은 봄비가 되어 오시는 보슬비님을 꼭 기다리고 있겠어요. 봄비가 되어서 우리 꽃밭으로 와주세요.”
“그래, 그래. 봄비 오는 날, 꼭 올께. 잘들 있어.”
햇님은 꽃밭 위에 하양게 쌓인 봄눈을 녹여버렸읍니다.
땅속의 꽃씨들은 봄비가 되어 오겠다고 약속을 하고 녹아버린 봄눈을 생각하면서 봄이 와주기를 꼬박꼬박 기다리고 있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