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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과 전체_하이젠 베르크
16 연구자의 책임에 대하여(1945~1950)
- 환경: 우라늄클럽, 억류생활(영국의 시골 마을 고드만체스터의 팜-홀 저택)
- 논의: 우라늄 핵분열을 발견한 학자 오토 한이 원자폭탄 투하 소식을 접하고 은둔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과 더불어 학문에 대하는 태도를 고민했던 흔적이다.
- 등장인물과 언급된 인물
하이젠 베르크 | 양자역학의 발전과 무엇이 "실제"인지에 대한 명백한 모순적 함의는 과학적 관찰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를 포함하여 심오한 철학적 함의를 가졌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루이 드 브로이는 입자가 항상 객관적으로 참된 운동량과 위치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던 실재론자들이었으나 (둘 다 측정할 수는 없더라도), 하이젠베르크는 "실재"의 직접적인 지식은 과학의 범위를 벗어난다는 반-실재론자anti-realist였다. 하이젠베르크는 그의 《책 물리학자의 자연 개념 (The Physicist's Conception of Nature)》에서 쓰기를, 궁극적으로 우리는 입자에 대한 무엇인가something을 기술하지만 입자 자체에 대한 "진정한" 접근access은 결코 가질 수 없는 '지식'(표에서의 숫자)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를 우리는 더 이상 관찰 과정과 독립적으로 입자의 거동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최종 결과로 양자 이론에서 수학적으로 공식화된 자연법칙은 더 이상 기본 입자 자체가 아니라 기본 입자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다루고 있다. 이 입자들이 시공간에 존재하는지 객관적으로 묻는 것도 더 이상 불가능하다... 우리 시대의 엄밀한 과학에서 자연의 그림을 말할 때 우리는 자연의 그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우리의 관계의 그림'을 말한다. ... 과학은 더 이상 객관적인 관찰자로서 자연을 대면하지 않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이러한 상호 작용에서 스스로를 행위자로 본다. 분석하고, 설명하고 및 분류하는 과학적 방법은 개입에 의해 조사 대상을 변경하고 재창조한다는 사실에서 발생하는 한계를 인식하게 되었다. 다른 말로, 방법과 객체는 더 이상 분리될 수 없다. |
오토 한 | 원자핵에 중성자를 충돌시키면 원자핵이 두 조각으로 깨지는 원자핵 분열을 처음으로 발견했다.(이들은 처음에는 자신들이 핵분열반응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우라늄-235가 중성자를 흡수해 질량이 비슷한 바륨과 란탄의 원자핵으로 분열한 것으로, 방사선은 이 핵분열의 일부로 발생한 것이라는 해석이었다. 이후 우라늄 원자핵이 작은 원자핵으로 분열할 때 엄청난 에너지를 방출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 원리를 이용해 원자폭탄이 만들어졌고, 원자력발전도 가능해졌다. 1kg의 우라늄에서 얻을 수 있는 에너지는 석탄 300톤의 에너지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원자력에너지는 제3의 불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
막스 폰 라우에 | X선 결정학의 선구자(엑스선 회절의 발견) X선 회절로 알려진 기술을 고안함으로써 일찍 노벨상을 타게 된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라우에의 발견은 "물리학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견 가운데 하나"였다. |
발터 게를라하 | 발터 게를라흐, 독일의 물리학자(1889~1979). 1921년에 슈테른(Stern, O.)과의 실험을 통해 원자 구조론에 공헌하였다. 원자의 자기 모멘트와 스핀이 양자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증명 |
칼 프리드리히 폰 바이쯔재커 | 1937년~1939년 동안 한스 베테와 함께 항성 속에서의 핵융합 과정을 밝혀내었고, 이는 오늘날 베테-바이츠제커 과정(영어: Bethe–Weizsäcker process)이라고 불린다. 1938년에는 태양계의 생성 과정에 대한 유명한 이론을 발표하였다 |
칼 비르쯔 | 못찾음 |
포앵카레 | 쥘 앙리 푸앵카레(프랑스어: Jules Henri Poincaré, 프랑스어 발음: [ɑ̃ʁi pwɛ̃kaʁe], 1854년 4월 29일 ~ 1912년 7월 17일)는 프랑스의 수학자이다. 수학의 많은 부분에 업적을 남겼다. 그 밖에는 특수 상대성 이론에 기여했으며, 당시 스웨덴의 왕 오스카르 2세가 상을 건 태양계의 안정성 문제에 도전함을 계기로 삼체 문제(태양·지구·달 세 천체의 궤도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 연구하여 혼돈 이론에 업적을 남겼다. 또한 중력파를 제안하였고 양자역학에서 양자화를 정의하였다. 과학 철학에도 기여하였다. |
로렌즈 | 에드워드 노턴 로렌즈(Edward Norton Lorenz, 1917년 5월 23일~2008년 4월 16일)는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의 수학자, 기상학자이다. 혼돈 이론의 선구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발견한 로렌즈 끌개(끌개이론)는 나비효과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진 배경이 되었다. |
페르미 / 졸리오 / 갈바니 / 볼타 |
- 독일의 우라늄 클럽 / 미국의 맨하탄 계획
우라늄 클럽 | 제2차 세계대전 | 맨하탄 계획 | un 창설 |
나치 독일의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 '우란프로옉트'는 우라늄 (Uran)과 계획 (Projekt)의 합성어이다. 하이젠베르크와 그가 책임지고 있던 빌헬름 카이저 연구소의 연구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핵무기를 손에 넣지 못한 것은 확실하다. 나치 독일은 벨기에에서 4천 톤의 우라늄 광석을 채굴했고, 점령한 노르웨이에 수력발전소에서 추출하는 중수 탱크도 있었지만... 이 중수탱크는 2차대전 당시 연합군 측에서 (미영연합군이) 특공대를 보내서 폭파했으며 중수를 이동하는 배도 같이 수장하는 바람에 연구에 큰 차질이 생겼다. 현재는 독일이 핵무기를 만들 능력이 아예 없었다고 보는 시각과 독일과학자들이 의도적으로 연구를 사보타주했다는 의혹을 둘 다 반반 사실로 인정하고 있다. 1945년 패망하는 그 날까지도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고 결국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하면서 프로젝트는 공식적으로 종결된다. | 1939년 9월 1일부터 1945년 9월 2일까지 일어났던 세계대전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꼽히고 논쟁도 많지만, 대표적으로는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스페인 내전, 중일전쟁, 소련-일본 국경 분쟁과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의 파시즘 대두와 긴장 고조가 꼽힌다. 제2차 세계 대전의 개전일은 통상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폴란드 침공을 개시한 1939년 9월 1일로 본다. 뒤이어 영국과 프랑스가 9월 3일 독일에게 선전포고했다. 1939년 8월 맺어졌던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에 따라 독일과 소련은 폴란드를 분할하고 핀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루마니아의 세력권을 분할하는데 합의했다. 1939년 말부터 1941년 초까지 독일은 여러 군사작전과 조약을 통해 유럽 대륙 대부분을 정복하거나 지배하고 파시스트 이탈리아, 일본 제국 등과 동맹을 맺고 추축국을 수립했다. 북아프리카와 동아프리카 전역이 시작되고 1940년 중순에는 프랑스가 항복하면서 전쟁은 유럽의 추축국과 대영제국 사이 발칸반도, 영국 본토의 대공습, 대서양 해전으로 이어졌다. 1941년 6월 22일에는 독일을 주축으로 한 유럽 추축국이 소련을 침공하기 시작해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전구인 독소전쟁이 발발했다. 한편 아시아와 태평양을 전부 지배하러는 일본 제국은 1937년부터 중화민국과 전쟁을 치르기 시작했다. 1941년 12월에는 일본이 진주만의 미국 함대를 공격하고 동남아시아와 중앙태평양에 대한 전면적인 공세로 미국과 영국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미국이 일본에 선전포고한다. 1944년과 1945년에는 일본이 아시아 본토에서도 역전당해 밀리기 시작하고 연합군이 일본 제국 해군을 무력화하고 서태평양의 주요 섬을 탈환했다. 실제로 일본이 공식적으로 항복한 날짜는 1945년 9월 2일로 이 때 공식적으로 아시아 지역의 전쟁이 종전되었다 |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미국이 주도하고 영국과 캐나다가 공동으로 참여했던 핵폭탄 개발 프로그램이다. 맨해튼 계획은 레슬리 그로브스 소장이 지휘하는 미국 육군 공병대의 관할로 1942년부터 1946년까지 진행되었다. 민관 합동으로 진행된 맨해튼 계획의 군사 부문은 맨해튼 지구(영어: Manhattan District)라 불렸고, 전체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공식 이름은 대체 자원 개발(영어: Development of Substitute Materials)이었다. 맨해튼은 공식명을 대신하는 미국측 암호명이었고, 영국 측 참가 조직의 암호명은 튜브 앨로이스(영어: Tube Alloys, 특수강관(特殊鋼管))이었다. 사용 예산 약 20억 달러(인플레이션을 감안한 2020년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약 230억 달러) 아인슈타인-실라르드 편지 1939년 8월, 물리학자인 실라르드 레오와 유진 위그너가 훗날 아인슈타인-실라르드 편지로 알려진 문서의 초안을 작성하였다. 이 문서에는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새로운 유형의 폭탄"이 개발될 수 있는 가능성이 언급되어 있었다. 이 편지는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서명을 받아 당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에게 전달되었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의 로렌스가 이끄는 팀은 전자기적 분리 방법을 연구. 컬럼비아 대학교의 에거 머프리와 제임스 웨이크필드 빔스 팀은 기체확산법을 연구, 카네기 연구소에 있었다가 뒤에는 해군 연구소로 옮긴 필립 아벨슨은 열영동을 연구하기로 하였다. 머프리는 결국 성공하지 못한 원심분리도 함께 연구. 프린스턴 대학교 등의 연구자들과 협력여 시카고 대학교에 야금 연구소(영어: Metallurgical Laboratory)를 만들었다 일리노이스 대학교의 로버트 세베르는 중성자가 어떻게 핵 연쇄 반응을 일으키는지 연구하여 핵분열에 대한 일반 이론을 정립하였다. | 칸트는 "영원한 평화"와 '세계 시민'이라는 정치적, 윤리적 주체 개념을 제시하였다. 이는 정치적 이상주의의 실질적 효시로도 여겨진다. 3가지의 방법을 평화를 위해 주장하였다. 1. 국제기구, 즉 유엔같은 기구를 창설. 2. 전 세계의 공화정화 칸트는 민주주의를 통해 권력을 분립시키지 않으면 평화가 올 수 없다고 보았다. 특히 그가 저술한 영구평화론에 따르면 민주정부가 많아질 수록 평화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왜냐면 그는 전쟁이 일어나는 이유는 전쟁과 무관한 자들이 전쟁의 결정권을 쥐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독재체제나 왕정제에서는 왕이나 독재자는 전쟁이 나도 자신의 안위를 보존할 수 있으므로 전쟁을 쉽게 결정하지만, 반면 민주국가의 경우 시민들이 정치적 결정권이 있고, 설령 대의제라고 하더라도 정치인들이 시민들의 의사를 무시할 수 없기에 시민들이 고통을 받는 전쟁이 쉽게 결정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민주정부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전쟁을 기피하게 되고 결국 궁극적으로 영구평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3. 경제교류의 활성화. 칸트는 경제적으로 교류하고 있는 국가 사이에서는 자신에게 올 수 있는 경제적 여파를 우려해 전쟁을 삼간다고 생각했다. 2.2 |
- 칼 프리드리히와의 대화-
과학의 발전은 세계적인 척도에서 역사 과정이다.
역사 과정에서 개개인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한 걸음을 내디딘 개개인에게 응용으로 야기된 파탄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죄 / 선 / 악 / 지식의 힘 / 발견 / 발명
제2차 세계대전은 역사상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사건이며 희생자들은 절대 다수가 전쟁과 직간접 영향이 전혀 없는 민간인이다. 세금은 기본적으로 지대와 통행세다 보호를 조건으로 걷는다. 보호는 무력을 말하며 세금은 군사력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자본으로 사용한다. 헌데 보호를 빌미로 방어를 명분 삼아 자국민의 희생만 가중시킨 사건이다.
‘16 연구자의 책임에 대하여(1945~1950)’를 읽으면서 몇 년 전에 우리나라에서 유독 크게 화제가 되었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연상되었다. 개인과 집단에서의 죄와 선과 악의 정의, 옳고 그름의 판단이란? 등등에 관해 화두를 던졌던 책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하게 되었다.
인간은 예측하는 동물로 과거와 현재를 검토하여 미래를 상상한다. 앎의 추구도 같은 형식으로 사고한다. 인간은 일상생활에서 이러한 형식의 사고로 자신의 행위에 상응하는 결과를 예측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일반적으로 일상생활에서 개인과 개인사에서는 일상의 집단 내에서 자신의 행위가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본인의 간섭없이 너무도 뜻밖의 부정적인 결과로 나타나면 대부분이 사과와 화해로 마무리된다.
그러나 어떤 사건들은 인류사의 오점으로 커다란 상처로 남는다. 그리고 상처는 딱지가 안 떨어지고 대대로 이어진다. 이 정도면 어느 한 진영의 문제가 아닌 지구생명체 모두의 일이 된다. 16장에서 다루고 있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사건이 그렇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주 추축국인 독일이 항복 선언을 한 상태에서 일본은 소련의 중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총력전을 표명하였다. 일본 내어서의 총력전 외침은 죽창 수준의 것이었고 당시 도쿄는 연합군의 집중포화로 온 도시가 불타고 있었다. 화마를 피해 강물로 뛰어든 사람들은 포화의 열기로 물의 온도가 천도까지 올라가 끓는 물에 삶아졌다. 역사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일본 군부는 천황제를 포기할 수 없었고 외교적 수사로 천황제를 유지 시켜 주는 조건으로 항복하겠다는 말을 에둘러 표현했는데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오역으로 그 뜻이 전달되지 않았음을 후에 연합군도 인정했다고 한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사건은 일본의 총력구호가 허세임을 알고 있던 연합군이 독일도 항복한 상황에 버티는 일본을 완전 무릎 꿇리자는 공감대가 만든 또 다른 광기처럼 보인다.
어느 집단이나 거슬리는 사람, 즉 기존 질서를 흩트리는 사람은 축출당하기 마련이다. 고대에는 추방으로 곧 죽음에 이르는 길로 보내졌고 근현대사에서는 감옥을 개발해 공동체에서 격리하는 방법으로 사회적 동물인 사람의 사회성을 제거해 버림으로써 말살하는 효과를 낸다.
그럼 내게 ‘집단의 거대 광기로 인한 악행은 어떻게 다루어져야 하는가?’라는 숙제가 남는다.
1960년에 이루어진 독일의 전범 재판에서 아이히만이 보여준 ‘악의 평범성’은 유명하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홀로코스트, Holocaust)은 광신도나 반사회적 성격장애자가 아닌 상부의 명령에 순응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자행되었음을 기술하면서 나온 말이다. 여기에서 핵심은 순응자들이 초기에 패륜을 인식했음에도 후에는 내적 갈등 없이 순종한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의 일상을 추적한 글에 그는 평범하다 못해 오히려 모범적인 가장의 모습이었다. 다정한 아빠요 건실한 남편으로 착실한 신자의 삶을 충실히 살았던 사람이다.
‘악의 평범성’은 1961년 미국의 예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이 실시한 실험으로 인해 집단 내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현상임이 알 수 있었다.
다시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사건으로 되돌아가 이야기하자면
인류의 발달은 인류의 생활과정이었고 자연과학이라는 축적되는 지식은 거기서 파생될지도 모르는 악을 제어하고 선이 승리할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을 확신했었다. 학자가 자연과학이라는 생활과정에 참여하는 일을 죄악이라고 간주할 수는 없다. 당시에는 그 누구도 물리학의 방향을 통찰할 수 없었다.
인간 생활이 광범위하게 과학의 발전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문제는 발전과정을 한 방향으로 돌리고 지식의 확장을 인간 복지를 위해서만 이용하여야 하되, 발전 자체는 방해받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과학의 발전을 「세계적인 척도에서의 역사과정」으로 간주한다면 개개인은 역사적 발전과정에 마침 그 자리에 놓여진 것뿐이다. 따라서 문제는 개개인은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인가, 또 연구활동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어떠한 의무가 부여될 수 있는 것일까?
이러한 문제는 세계사에 있어 옛날부터 제기된 문제이다.
여기서 발견자와 발명자를 구분해서 생각해야 한다. 발견자는 대체로 그 이용가능성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었고 실제적 이용까지 거리가 멀다. 발명자는 목표 달성을 하나의 가치를 가지고 특정한 실용적 목표를 계산한다.
기술적 진보의 결과라고 볼 수 있는 원자폭탄을 도대체 어느 테두리에 종속시킬 것인가.
원자핵의 분열은 하나의 발견이었고, 원자폭탄 제조는 하나의 발명이라면 물론 원자폭탄을 제조한 미국의 원자물리학자들(물론 그들은 개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전투력을 비약적으로 강화시키려는 전쟁 지도층이 속한 인간공동체의 분명한 위탁 아래 행동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들은 원자폭탄에 의한 히틀러의 승리는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나찌의 강제수용소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비판할 자격이 없다. 우리도 정부가 저지른 무서운 일들을 조금도 저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전모를 몰랐다는 건 변명이 못 된다. 좀 더 노력했더라면 좀 더 확실하게 알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세계사에 있어서 善(선)을 위해서 모든 수단이 허용될 수 있으나 악을 위해서는 허용될 수 없다는 대원칙, 좀 더 나쁘게 표현한다면 목적은 수단을 신성화한다는 이 원칙이 항상 반복해서 실천에 옮겨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고과정을 저지시킬 수 있는 무엇이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일까? 발명자가 자신의 목표를 지구상의 기술적 진보라는 커다란 연관성에서 통찰해야 한다는 점을 이야기 했습지만 아무도 원자폭탁 투하 같은 전개 과정들을 미리 예측할 수는 없으므로 어떤 일이 선한지 악한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 일을 달성키 위하여 사용되는 수단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명제로부터 원칙을 도출해 본다면
과학적 기술적 진보는 결과적으로 틀림없이 이 세상에서 독립된 정치적 단위를 점점 크게 할 것이고, 따라서 그 수가 점차로 감소하면서 결국에는 하나의 중심적인 질서를 유지하는 관계를 지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중심적 질서로부터 여전히 개인과 개체적인 민족의 자유는 충분히 보장되기를 희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방향으로 나가는 것을 나로서는 거의 불가피한 당연한 거취라고 본다.
강대국은 그들의 노력 범위를 가능한 한 확장하려 한다. 본래 단순히 공동이익과 유사한 사회적 구조에 의해서, 또는 공통적인 세계관이나 경제적 정치적 압력에 의해서 생길 수 있는 동맹관계로 말미암아 실현된다.
앞으로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세계역사는 진행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추세에 반대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물론 강대국의 팽창정책은 제국주의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따라서 바른 수단의 선택에 대한 문제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즉 영향력 행사를 경제적인 측면과 문화정책 측면에서만 그 수단을 사용하고 상대국의 내정에 대한 폭력적 간섭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승리가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단계에서 원자폭탁을 사용은 단순한 힘의 과시로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결국 세력 확장을 위하여 서로 투쟁하고 있는 민족국가 시대로 역행을 의미하는 것이다. 원자폭탄의 존재 자체는 불행한 일이 아닐 것이다. 소수의 강대국 대비 대부분의 약소국은 한정된 독립성밖에는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정열과 망상이라는 모순된 이념 사이에 기술적 진보 앞에 개인은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하는지 알고 싶다.
과학적 내지는 기술적 진보에 기여만을 일생의 중요 과제로 세운 개인들은 이제 과제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학문적인 연구활동에서 객관적으로, 그리고 사실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배웠으며 특히 ‘커다란 연관성 안에서’ 사물을 생각하기를 배우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억류생활은 1946년 1월에 끝났고 우리는 다시 괴팅겐에서 커다란 공동체의 일부분이라는 자각을 갖고 파괴된 지난 과거를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선의를 가지고 이성적인 미래를 지향하는 하나의 신계를 건설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과거의 사고구조로부터 희망에 찬 미래를 향한 사고구조로의 이행, 과학의 진보에서 파생되는 기술이 도시나 산업의 물질적인 건설에서 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독일과 유럽의 전체적인 사회 구조에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학문적인 사고방식 도입이 매우 중요했었다. 독일의 국무부를 담당은 사실적으로 제약된 필연성, 즉 이 필연성은 현대라는 세계구조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그것을 단지 감정적으로 다시 말해서 비합리적으로 회필할 때에는 파국으로 이를 수밖에 없는 그러한 필연성이 항상 존재하나단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과학도 공적인 일에서는 어떤 주도권에 대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정치와 과학 두 분야의 완전한 분리, 이 문제를 놓고 법률학자인 라이저와 세부적인 대화를 가졌다.
개개인의 선한 의지만을 가지고는 어쩔 수 없으며, 항상 외적 관계에서 오는 강력한 강요만이 많은 사람들의 사고구조를 필연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