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5부 10
브론스끼 백작과 골레니셰프의 명함을 가져왔을 때, 화가 미하일로프는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작업중이었다. 아침에 그는 화실에서 대형 그림을 그렸고, 집에 와서는 돈을 요구하는 집주인에게 제대로 대응할 줄 모른다고 아내를 향해 화를 쏟아 냈다.
“변명하지 말라고 스무 번도 더 얘기 했잖아. 그렇게 멍청한 사람이 이탈리아어를 변명을 하려 드니까 더더욱 멍청해질 수밖에.” 길게 이어진 말싸움 끝에 그가 말했다.
“그렇게 나 몰라라 하지 말아요. 나는 잘못한 거 없다고요. 돈만 있어도....”
“제발 나 좀 조용히 내버려 둬!” 미하일로프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고함을 치더니 귀를 막고서 칸막이 너머에 있는 자신의 작업실로 들어가 문을 잠가 버렸다.
‘미련한 여자 같으니!’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탁자 앞에 앉아 화첩을 열고 막 그리기 시작한 그림을 지체 없이, 유달리 열정적으로 이어 가기 시작했다.
생활 형편이 어려울 때, 특히 아내와 싸웠을 때만큼 그가 열과 성을 다해서 일을 하는 적은 없었다.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고 싶다!’ 작업을 계속하면서 그는 생각했다. 예전에 단지 이미 그려 놓았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다. ‘아니야, 저번 게 나아......그게 어디에 있더라?’ 그는 찌푸린 얼굴로 아내한테로 가서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자신이 큰딸에게 줬던 종이가 어디 있는지 물었다. 내버린 그림을 찾긴했으나 종이가 촛농으로 얼룩지고 더렵혀져 잇었다. 그래도 그는 그림을 집어다가 탁자 위에 놓은 다음 멀찌감치 떨어져 실눈을 뜨고 살펴보았다. 갑자기 그가 미소를 짓더니 기쁨에 겨워 두 팔을 흔들었다.
‘이거야, 이거!’ 그는 이렇게 뇌까리더니 연필을 쥐고 민첩하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촛농 얼룩이 그림 속 인물에게 새로운 자세를 더해 주었던 것이다.
그 새로운 자세를 그리던 그는 문득 여송연을 샀던 가게 주인의 불거진 턱과 활력 넘치는 얼굴을 떠올리고 그 얼굴과 턱을 그림 속 인물에 그려 넣었다. 그러고는 기쁨에 못 이겨 웃음을 터뜨렸다. 죽어 있던 인위적인 형상이 이제는 더 이상 바꿀 것이 없는 생기를 띠고 있었다. 그것은 살아 있었으며, 분명하고 확실한 모습을 갖추고 잇었다. 그 형상에 맞추어 그림을 고칠 수도 있었고, 심지어 다리의 자세를 달리하거나 왼팔의 위치를 완전히 바꾸고 머리카락을 뒤로 넘길 수도 있었을 뿐 아니라,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렇게 고치면서도 그는 인물의 형상을 바꾸지 않았고, 단지 그 형상을 가리고 있던 것들을 걷어 낼 뿐이었다. 마치 형상을 덮어 전부 가리고 있었던 덮개를 벗겨 내는 것만 같았다. 새로 긋는 선들마다, 촛농 얼룩 덕분에 별안간 발현된 넘치는 활력과 더불어 그 형상을 더욱더 드러내 보였다. 명함을 가져다주었을 때 그는 조심스럽게 인물 형상을 마무리 짓던 참이었다.
“지금 갈게, 간다고!”
그가 아내에게 왔다.
“이제 그만해, 사샤, 화내지 말라니까!” 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수줍게 말햇다. “당신이 잘못 했잖아. 나도 잘못했고. 내가 다 알아서 할게.” 이윽고 아내와 화해한 그는 벨벳 옷깃이 달린 올리브색 외투 차림으로 모자를 쓰고 화실로 향했다.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인물 형상은 이미 잊은 뒤였다. 이제 그를 기쁨으로 들뜨게 하는 것은, 마차를 타고 온 지체 높은 러시아인들이 자신의 화실을 방문하리라는 사실이었다.
지금 이젤 위에 놓여 있는 그림에 대해서는 마음 속 깊이 한 가지 생각을 품고 있었으니, 바로 그와 같은 그림은 지금까지 그 누구도 그린 적이 없다는 판단이었다. 자신의 그림이 라파엘로의 작품들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 그림을 통해 자신이 전달하고자 했고 실제로 전달한 것을 그 누구도 전달한 적이 없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오래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부터 그러한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판단은, 그게 어떠하든지 간에 그에게 너무나 중요하게 여겨졌고, 마음속 깊은 곳까지 그를 흥분시키곤 했다. 자신이 그 그림에서 본 것 가운데 아주 작은 일부라 할지라도 심판관들 또한 보고 있음을 드러내는 논평이라면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언정 그의 영혼 깊은 곳까지 전율케 햇다. 그는 항상 자기가 가진 것보다 더 크고 심오한 이해력이 자신의 심판관들에게 있다고 여겼으며, 자기 그림에서 그 자신은 보지 못한 어떤 것을 그들이 보기를 고대했다. 그리고 종종 관람객의 의견에서 그런 경우를 발견했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발걸음을 재촉하여 화실 문으로 다가간 그는, 흥분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현관 그늘 아래 선 채 온후하게 빛을 발하는 안나의 자태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녀는 열을 올리며 떠드는 골레니셰프의 얘기를 듣고 있으면서도 그리로 다가오는 화가를 돌아보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손님들에게 다가가면서 자기도 모르게, 여송연을 팔던 상인의 턱을 보고 그랬듯이, 그 인상을 포착하여 집어삼킨 뒤 필요할 때 꺼낼 수 있도록 어딘가에 숨겨놓았다. 반면 화가에 대한 골레니셰프의 얘기를 듣고 일찌감치 실망했던 방문객들은 그의 외모를 보고 더더욱 실망했다. 중키에 살이 찌고 걸음걸이가 경박한 미하일로프는 갈색 모자와 올리브색 외투에 이미 오래전부터 통이 넓은 바지가 유행하고 있는데도 통이 좁은 바지를 입고 있었으며, 특히 넓적한 얼굴의 평범한 생김새와 수줍어하면서도 위엄 있게 구는 태도가 불쾌한 인상을 불러일으켰다.
“들어가시지요.” 그가 태연한 척 애쓰며 현관으로 들어서서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