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사태 때문에 모이지 말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들이 있었다.
세간에서는 신앙 보다는 헌금 때문에 모인다고 비판하는 의견들도 있었지만 나는 순수하게 신앙적인 원인에서 이유를 찾고 싶다. 안전하지 못할 때 불안해진다.
가정적, 사회적, 경제적, 법적, 육체적 그 어느 하나라도 안전하지 못하면 불안이 찾아온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과 전혀 상관이 없는 불안이 있다. 바로 ‘신앙적 안전'이 지켜지지 못한다는 불안이다. 그렇게 느끼는 이들은 자기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대가도 치르려고 한다. 이를테면 탈레반, IS 등이 그런 세력이다.
어느 영화감독을 인터뷰한 기사에서
“스크린 속 허구의 세계를 구성해 내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모든 실재를 깊고 넓게 아는 것이다. “라고 한 대목을 발견하고 무릎을 친 일이 있었다.
코로나 속에서도 예배를 드려야만 안전을 느끼는 것 보다는 코로나의 현실을 직시 하고 불안은 느끼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일본 말로는 ‘가다’ 조선말로는 ‘금형’이라는 것이 있다. 대량 생산되는 모든 공산품에는 금형이 있게 마련이다. 어떤 제품이든 먼저 금형을 떠서 사출을 해서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무엇을 보던지 자신만의 세상을 바라보는 사고방식 즉 사고의 ‘틀’이 있다. 무식하면 무식한 데로 유식하면 유식한 데로.
10 여년 전에 어느 교회에 청년부에 설교를 하러 갔다가 30분 동안 앉았다가 일어섰다가 팔을 들었다가 하는 벌을 섰다. 그나마 성당처럼 무릎을 꿇리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예배 전에 은혜, 평안, 축복, 영광, 능력, 거룩, 전능, 의지함, 주님만 바라봄 등의 허공을 떠도는 관념적 추상적 단어들로 나열된 가사를 반복 또 반복하는 복음송가를 불렀다.
젊은이들이 마땅히 관심 가져야 할 만한 세상의 산적해 있는 문제들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축복, 은혜, 사랑 등등의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언어들로 사고의 틀이 짜여지면 마치 뽕 맞은 사람처럼 현실을 정확하게 보기 어렵다.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무엇이든 끝에 ‘영적’을 붙이기를 좋아하는 이들이 있다. 그렇게 되면 현실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컴퓨터 게임은 실제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가상 현실 속에서 벌이는 시뮬레이션이다. 관념의 감옥에 빠지면 컴퓨터 게임처럼 항상 시뮬레이션을 하게 된다.
컴퓨터 게임에 빠져서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도 있듯이 구원, 선교, 해탈, 견성 등등 관념의 성을 쌓고 그 안에서 살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도 있다.
첫댓글 말을 안 듣긴 하죠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