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수지 둑에서 내려다 본 마을의 전경-
강씨 집성촌인데 50여호의 세대에서 지금은 겨우 예닐곱 세대 노인들만 거주하고 있다.
동네 한 복판에 아무도 살지않는 나의 집이 있다네.
이십여리 떨어진 곳에서 시집오신 어머니는 이런 산간벽지가 있나 싶어 놀라셨다는데
빈부차이의 체감에서 느끼는 심리적 요인이 더 크게 작용한 듯 싶다.
그만큼 빈한한 마을이었다.
저수지 둑에서 좌측을 바라 본 구싯골의 풍경- 도시민의 별장 위 점점이 표기된 곳이
내 먼 조상님들의 묘소인데 이 곳에 첫 터를 잡은 8대 조상부터 증조부모까지,
그리고 85년 일찍 작고하신 울 아버지의 묘소가 함께 있다.
여동생은 어릴 때 멋모르고 할아버지 따라 나섰다가 저 산을 넘어 아득한 밀양까지
고모할머니댁을 걸어서 다녀왔다는 무시무시한(?) 증언을 해줬다.
저수지 둑에서 우측으로 바라 본 절골의 풍경-
월은산에 자리한 천년 고찰 대산사(화살표) 초입에 내 조부모님과 형제 내외분들의 묘소가 있다.(동그라미표)
내 어머니와 어쩜 내가 묻힐 지도 모를 묘자리까지 넉넉하다.
마을의, 아니 청도의 큰 어른이셨던 할아버님과 할머님 묘소에 들러 절을 올렸다.
두 분은 13,14 어린 나이에 결혼한 후 78년을 해로하시다가 2002년 봄,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구순 할아버지께서 손수 예법에 따른 장례를 진두지휘 하신 후 석달 뒤 조용히 따라 운명하셨다.
한 생애 78년을 온전히 살기 어려운 시절에 태어나 부부의 연으로 함께 하셨으니
"백년해로"가 따로 없는....그야말로 기네스 등재감이 아닐 수 없다.
자나깨나 나에 대한 그리움과 걱정으로 사셨던 두 분 생각이 간절하다.
차마 물어볼 수 없었던 말
"엄마 돌아가시면 여기 묻힐거유?"
*** 한재 미나리 ***
마을에 내려와 고향집을 둘러보고 싶었지만 여행 며칠전 시제때 방문해 동네 어른들께
식사와 술을 대접한 터라 생략하기로 했다.
마침 어스름 해거름에 집집마다 군불때는 연기가 피어오르니 허기가 발동하여 청도의
유명한 먹거리인 한재미나리 마을을 찾아 나섰다.
미리 인터넷으로 검색해 둔 사랑방가든을 방문하자 쥔장께서 한재 미나리의 특성과 먹는 법을
자상하게 설명해주시는데 내심 삼겹살에 얹어 먹는 미나리 쌈이 특별한 맛이겠나 싶었는데
왠 걸? 이구동성 "맛있다~~"를 외친다.
쫄깃한 고기와 아삭아삭 씹히는 미나리의 식감이 어우러진 조화는 생각이상의 식욕을 돋구어 주는 별미라
수술 후유증으로 밥 한 술,고기 한 점 겨우 삼키는 동생이 여행내내 안타깝고 미안할 따름이다.
***용암온천***
식사를 마친 7시쯤 일찌감치 숙소에 여장을 풀었다.
이 곳은 고향 방문시 가끔 찾는 곳인데 피로를 풀기에 뜨거운 온천수가 그만이다.
목욕을 마친 후 인근의 식당에서 농주와 수육으로 갈증을 달랜 뒤 이른 잠에 빠졌다.
청도는 지리적으로 안개가 많은 곳이다.
밤새워 고속도로를 달려 온 새벽의 청도는 늘 자욱한 안개를 품고 있었지.
일찌감치 일어나 온천장 주변의 마을 골목을 산책하며 나도 그 안개의 포실한 품에 안겨 본다.
***청도 역전과 추어탕 거리***
청도 읍내 중심가도 이제 많이 번화해졌다.
역전 입구에 청도의 명물인 경상도식 추어탕집이 여럿 있는데 오랜 전통은 내가 보장한다.
어릴적부터 삼촌이나 고모들과 함께 기차타고 내리면 모두들 하나의 의식처럼 역전에 있는
추어탕을 드시곤 했다.
고향의 내음을 흡입하 듯...
어쩜 객지의 청도 사람 모두 이 고향의 맛을 그리워하고 흠모하는지도 모르겠다.
당시의 허름한 오두막에서 국밥 말아 주시던 할머님들은 돌아가셨거나 은퇴하셨고
이젠 그 후손들이 대물림하여 문전성시를 이룬다.
입맛 또한 대물림 되는지,이젠 내가 어김없이 추어탕을 먹고 있다.
하루종일 개울에서 놀며 피래미 퉁가리 꺽지 메기 등 온갖 잡고기를 잡아 주전자에 담아 오면
할머님은 "오냐 내 새끼 기특하구마~"라며 손수 뚝딱 끓여 주시던 딱 그 맛이다.
역사 플랫홈 한 켠에 설치된 향토 박물관
"청도 외갓집"...우리의 여행에 딱 부합되는 작명아닌가.
이쯤에서 울 어머니 방과후 원두막에서 오빠들과 참외 지키던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이야기가 나오시고
외갓집 디딜방아는 내 즐거운 놀이터....그 집에서 사라진 디딜방아가 여기 있었네.
여물썰던 작두랑,물레, 숯다리미 등은 내게 친숙한 물건이다.
희한하게 소품과 도구들이 내 어릴적 외갓집의 그 것들과 넘 흡사하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풍금 역시 누구에게나 추억이다.
역장님 감사합니다.
어케 아시고 환영의 플랜카드를 ㅋㅋㅋ
60년대의 청도는 보통급행열차와 완행열차만 가끔 정차하는 작은 역이었기에
할아버지댁을 가기위해서는 많은 시간의 소요와 기다림의 인내가 필요했다.
밤 9시경 서울에서 출발하는 기차를 타면 새벽에 도착했는데 첫 차를 기다리는 동안 딱히 갈 곳이 없어
우린 그냥 텅 빈 역사와 플랫홈을 놀이터 삼아 뛰어놀거나 벤취에서 토막잠을 자곤 했다.
당시의 놀이터가 내 외갓집으로 변모했으니 어찌 감격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내 어린 날의 추억과 조우했다.
추억의 간식 감말랭이
콩잎 짱아찌
"할매 사진 찍어도 되능가예?"
" 참하게(예쁘게) 찍어 주이소"
고향에 발을 딛는 순간 어느새 사투리가 절로 나온다.
사투리때문에 서울에선 경상도 촌놈이요 시골에선 서울내기로 놀림받던 시절도 있었다.
"서울내기 ~ 다마네기~ 맛좋은 고래고기......"
부산에 가면 내 또래 친척들과 동네 친구들이 놀리며 부르던 가락이 그립다.
첫댓글 감상하며 내어린시절을 떠올려봅니다.
짧은 단편을 읽는 느낌이랄까요 갑장님
그쵸? 딱 우리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랍니다.^^*
싱싱한 미나리에겹살, 그리고 뜨끈뜨끈한 온천욕, 지난 시절을 찾아나선 추억여행 사진만 봐도 하네요. 그러고 보니 청도가 은근 유명한 것이 많네요. 미나리, 온천, 추어탕에 소싸움까지. 딱정벌레님의 그리움이 가득한 청도 정말 좋은 시간입니다.
일정이 짧아 미쳐 둘러 보지 못한 곳이 더욱 많아요.ㅎㅎ 넘 고향 자랑하네.
한재 미나리는 오직 한재 땅에서만 그 고유한 향기가 난다고 하네요.
한재 미나리가 재배 되기 전, 어떤 이슈가 있었습니다.
친구들이 군대에서 휴가를 나왔다고 저의 친정집에 모였지요.
밤에 동네 선후배들이 모여 내 친구 용맹이네 집 미나리를
베어 와서 소주와 쌈장에 맛있게 찍어 먹었습니다.
캄캄한 밤중에 미나리를 베어 왔기에 우린 완전범죄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낮에 주인이 보니 미나리깡이 훤빈하게 빈 것을 보고 함께 먹은 아이에게 추궁을 한 듯 합니다.
순진한 아이는 이실직고를 다 하니 주인은 화가 나서 미나리 먹은 사람들에게 모조리
벌금을 매겼다고 합니다. 각각 5천원 씩!( 지금의 5만원 정도?)
그 때 미나리를 훔쳐 먹을 때, 모두 남자 애들이 10명 가량 되었고
여자는 저 혼자였는데, 다행이 저에게는 벌금을 매기지 않더라구요. ^^
휴가를 마치고 군대로 돌아간 아이에게는 부모에게 돈을 받았고.
당시 미나리 가격으로 10배 정도가 넘었는 듯 싶어요.
저는 지금도 그 때 몰래 훔쳐 먹었던 미나리 맛을 잊을 수 없습니다.
길이가 약간 짧았지만 아주 상큼하고 맛있었거든요.
계절은 아마도 쌀쌀한 초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몇 년 뒤에 한재미나리를 본격적으로 재배하게 되었지요.
그 당시만 해도 미나리를 판매할 목적이 아니었고 가정에서 식품용으로 재배했으니....
미나리깡 쥔장께서 좀 야박하셨네요.^^
한재 미나리가 이젠 지역의 특산물로 확실히 자리매김한 듯 싶습니다.
저두 수박과 참외 서리해 본 기억은 있어요.
저도 청도에 딱 한번 가본 적이 있잖아요'랑 청도 운문사..그리고 와인터널' 연한 차이 저거 맛있는데...차말로
전유성씨가 운영하는 '니가쏘다쩨
청도가 고향인 분의 글은 역시 남다른 데가 있군요..샅샅이 알고 돌아다니는 것과 겉만 실실 보고 다닌 것과의
감말랭이
몇 해전 욜렛님의 방문 후기를 통해 니가쏘다쩨 다녀 오신 소감을 읽었습니다.
전유성씨 덕분에 청도가 제법 많이 알려 졌구요.
정작 저는 그 곳의 짬뽕과 피자맛은 보지못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