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각오를 했습니다. 7점을 깔고 만약 지게 되면 새끼손가락을 끊겠다고. 목숨을 걸고 둔다는 조치훈 9단에 비하면 조족지혈의 각오였지만 말입니다. 대국은 초반을 지나 중반에 이르렀습니다. 바둑돌을 내려놓은 제 손끝이 떨렸습니다. 대마가 죽은 것은 아니었지만 바둑판 곳곳에서 일어난 작은 전투에서 조금씩 손실을 입었습니다. 7명 대 1명의 싸움은 7명이 이기지만 107명 대 101명의 승부는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200여 수가 지나자 승부는 더 이상 뒤집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7집을 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 애꿎은 새끼손가락만 바라보았지요. 김희중 사범님께서 희중희중 웃으시면서 복기를 해주었습니다. 제 후수의 선수끝내기를 칭찬하셨지요. 저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았습니다. 흐르는 물은 앞을 다투지 않지만 흐르는 눈물로 앞을 다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거든요. 새끼손가락의 미래를 위해 꾹 참았지요. 그리고선 김희중 사범님께 여쭈어봤습니다. 부끄러운 새끼손가락을 감추려고 팔짱을 낀 채 말입니다.
“사범님, 제 나이가 올해 스물 셋입니다. 지금부터 바둑공부를 해서 성공할 수 있을까요?” 그러자 김희중 사범님께서 머리를 숙이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요, 될 수 있고 말고요.”
그 한마디에 저는 올인 했습니다. 신문배달(엄밀히 따지면 분국을 운영한 것이지만)도 때려치우고 매일 오전 일찍 강남기원을 찾았지요. 저보다 상수인 분들과 하루에 서너 판은 족히 두었는데 승부는 공부량과 반비례했습니다. 김희중 사범님은 제게 수업료는커녕 밥한 끼 사드리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점심때나 저녁에 다른 프로기사님들과 식사하러 갈 때면 저까지 항상 데리고 가셨지요. 한상렬, 장두진, 박종렬, 장수영 사범님 등이 점심이나 저녁을 함께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무렵 여류국수 타이틀을 딴 이영신 사범님이 김희중 사범님과 대국하러 왔었습니다. 저는 특별대국실에서 숨을 죽이며 옆에서 관전을 했습니다. 머리를 빡빡깍은 채로 말이지요. “사범님, 요즘 공부 안하세요?” 김사범님께 속기 두 판을 내리 이긴 이영신 사범님의 말이 생각납니다. 기원에서 김사장님이라고 불리는 분께서 청출어람이라는 고사성어를 읊조리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영신 사범님의 어머니와 전 자주 대국을 했었지요. 승률은 반반이었는데, 박종렬 사범님께서 복기를 해주었습니다. 정작 이영신 사범님께 지도받고 싶었는데 스물 셋의 부끄러움이 있었던 저는 스물 둘이었던 이영신 사범님께는 말도 건네 보지 못했지요. 그렇게 몇 달간 꿈같은 시간이 정해진 곳으로 흘러간 어느 날, 기원에서 김사범님과 함께 짜장면을 먹고 난 후, 김사범님께서 그러셨습니다.
“나중에 연락할 테니 삐삐번호 적어주거라.”
당시의 기원 분위기를 감지하였던 저는 메모지에 삐삐번호를 적어드렸습니다. 그리고 매일 삐삐가 오기를 기다렸지요. 지금도 그렇지만 기다리는 일은 즐거운 일입니다. 괴로운 일이었지만 그 괴로움은 한 순간이지요. 폭설이 내리던 어떤 날, 누군가와의 약속장소에서 두어 시간을 꼼짝 않고 서 있던 때가 있었습니다. 약속시간이 가까워져도 그 친구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시간이 지나자 오히려 즐거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래, 내가 술을 사서 그의 결혼을 축하해줘야겠다.” 이런 기분마저 들어 한참 후에 그 친구가 나타났을 때, 빚에 쪼들려 땡전 한 푼 남아있지 않다는 말은 하지 못한 채, 술을 산 적이 있을 정도였지요. 그래서 지금은 누군가를 기다리더라도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단계를 배재하고 기다림 자체를 즐거움으로 느끼게 되었습니다.(계속)
첫댓글 ^^
바둑 두듯 글을....
끝내기 말고 조금만 친절해 주세요^^
나중 또 따로 얘기해요
스물셋 용성님의 참을성 덕분에
지금까지 온전헌 새끼손가락~!!!
7 대 1의 승부와
107명 대 101명의 승부는 다르다,
마음에 담아갑니다,
다음펀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