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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9월 21일 월요일
[(홍)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성 마태오 사도는 카파르나움에서 로마 제국을 위하여 세금을 걷는 세리로 일하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도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9). 마태오 사도가 전하는 증언의 핵심은 “부활하신 이 그리스도께서 바로 복음서가 서술하는 나자렛 예수님과 동일한 분이시라는 것”(『주석 성경』, ‘마태오 복음서 입문’)이다. 전승에 따르면, 마태오 사도는 에티오피아 또는 페르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다.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성령께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마태오를 부르시고 세리와 죄인들과 음식을 드시며, 당신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그리스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세워 주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4,1-7.11-13
형제 여러분,
1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2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3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4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5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6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7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혜의 양에 따라,
우리는 저마다 은총을 받았습니다.
11 그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어떤 이들은 목자나 교사로 세워 주셨습니다.
12 성도들이 직무를 수행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일을 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3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9-13
그때에 9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0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11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2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13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예수님 시대에 세리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세금을 거두어 로마 제국에 바쳤습니다. 로마 제국은 세금을 수월하게 거두고자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세리가 되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돈을 받고 세금을 걷는 권한을 넘겨주었습니다. 세리들은 지정된 세금을 로마 제국에 바치고 나머지 돈은 자기 몫으로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같은 민족 사람들에게 혹독하게 세금을 거두어들였고, 결국 미움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바로 그러한 세리 출신이었습니다. 돈이 많아서 편안하게 살았을지는 모르지만, 하루하루를 외롭게 살았으리라 봅니다. 그런 마태오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오의 마음속에 있는 외로움과 괴로움을 보셨습니다. 그 지친 마음을 위로해 주시면서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였던 마태오를 제자로 받아 주셨습니다. 마태오는 예수님과 맺은 특별하고 소중한 관계가 어떻게 사람을 뿌리 깊이 변화시킬 수 있는지 자신의 삶으로 보여 준 인물이었습니다.
과연 우리는 우리 삶에서 공허함을 무엇으로 채우며 살고 있나요? 그리고 그 자리를 채워 주시는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얼마나 마음에 드시는 모습으로 변화와 성장을 이루고 있나요? 우리의 모습을 돌아봅시다.(왕태언 요셉 신부)
오늘도 죄인들을 당신 제자로 부르시는 주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인간관계 안에서 자주 느끼는 바이지만, 언어로써 내 생각과 감정과 의견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우리의 표정과 몸짓, 눈빛, 음성 등의 분위기로 더 많은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젊은 시절 너무 아프고 힘들어, 더 이상 단 한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가 있었습니다. 이러다 죽겠구나, 싶어 몇 일 휴가를 내서 부모님께 갔습니다. 어머니 앞에서 힘들었던 그간의 과정을 줄줄이 털어놓았습니다.
워낙 오랜 세월이 흘러 그때 어머니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때의 분위기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안타깝게 저를 바라보던 그 눈빛, 쯧쯧 혀를 차시던 모습 등등. 그러면서 그렇게 힘들면 그냥 집으로 오라고 마음을 편히 해주시던 그 따뜻한 기억,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도 마찬가지셨을 것입니다. 그분은 말씀으로도 당신의 생각과 의견을 전달하셨지만, 눈빛과 음성, 몸짓과 분위기로도 많은 것을 백성들에게 건네셨습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마태오 복음사가와의 첫 만남 장면도 그랬을 것입니다. 길을 가시던 예수님께서 세관에 앉아 있던 마태오를 보십니다. 아마도 한참 동안 바라보셨을 것입니다. 그 시선은 한 마디로 측은지심의 시선이었을 것입니다.
그간 로마 제국과 백성들 사이에 끼어 살아오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얼굴을 보아하니 저런 일 할 사람이 아닌데,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가족들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매일 세관에 출근하고, 윗사람으로부터 압박을 받고, 백성들로부터는 미움을 받고, 하루 하루 얼마나 힘겨웠을까?
그런 연민과 자비의 시선이 계속되자 마태오 역시 그 시선을 느꼈을 것입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결심하십니다. 비록 저 사람이 세리로 살아왔지만, 잘 인도하고 교육시켜서 인류 구원 사업의 협조자로 써야겠다. 세리였던 저 사람을 내 제자로 삼고 구원으로 인도하면, 주변에 있던 세리와 죄인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요 희망이 될 것인가?
이윽고 예수님께서 마태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예수님의 초대앞에 마태오는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저 대단한 분께서는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잘 아실텐데, 이런 나를 부르시다니...
마태오는 너무나 황송하고 감지덕지해서 두 눈에서 눈물이 쉼없이 흘러나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을 것입니다. ‘새로운 인생길로 불러주신 주님을 위해 내 나머지 인생을 모두 바쳐야지.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바쳐야지.’
마태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목숨처럼 소중히 여겼던 수입지출 장부도, 고액권이 잔뜩 들어있는 금고도, 사랑하는 가족도 모두 헌신짝처럼 던져버리고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참으로 파격적인 예수님의 제자 발탁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그 소식을 들은 많은 동료 세리들과 죄인들이 몰려와 깜짝 잔치가 벌어졌는데,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들과 어울리며 포도주잔을 기울였습니다.
그런 모습에 충격을 받은 바리사이들이 제자들에게 외쳤습니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지속적으로 따라다니면서 수시로 태클을 거는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이 참으로 통쾌합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죄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해 힘겨워하는 오늘 우리 모두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오늘도 연민과 측은지심 가득한 시선으로 우리 죄인들을 당신 제자로 부르시는 주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포트워스 신부님과 함께 산타페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여행 경비는 약 600달러 정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여행 경비보다 훨씬 많은 돈이 예상하지 못한 곳에 들었습니다. 산타페로 갈 때 한 번, 달라스로 돌아올 때 한 번, 두 번이나 교통법규 위반 티켓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함께 여행하다가 생긴 일이니, 범칙금의 절반을 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2주 뒤 신부님에게서 문자가 왔습니다. 범칙금의 절반을 내준다고 해서 고맙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범칙금은 생각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여행 경비보다도 많았습니다. 저는 약속대로 범칙금의 절반을 보내 드렸습니다. 기쁨을 함께 나누었으니, 고통도 함께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지를 바꾸어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일 제가 티켓을 받았을 때 신부님이 “내가 절반을 내겠습니다.”라고 했다면 저 역시 참 고마웠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누가 네 속옷을 달라고 하거든 겉옷까지 내주어라.” 신앙은 좋은 말을 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신앙은 약속을 지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짐을 함께 지는 것입니다. 기쁨뿐 아니라 고통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사랑은 마음속의 아름다운 감정이 아니라,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약속을 지키는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오늘은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의 축일입니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 세리였습니다. 당시 세리는 로마 제국을 위해 세금을 거두었기에 동족들에게 죄인과 배신자처럼 여겨졌습니다. 사람들은 마태오를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 있던 마태오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라.” 마태오는 그 말씀을 듣고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오의 과거를 먼저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잘못을 했는지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지를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마태오에게서 죄인을 보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서 사도를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세리를 보았지만, 예수님께서는 복음사가를 보셨습니다. 마태오는 돈을 계산하던 손으로 복음을 기록하였습니다. 세금을 기록하던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기록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던 사람이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부르심의 신비이고 회개의 은총입니다.
우리는 마태오 복음사가의 글을 통해 예수님의 생애를 생생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동방박사들이 별을 따라 아기 예수님을 찾아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성가정이 이집트로 피난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 장면들은 수많은 성화와 음악과 문학의 소재가 되었고, 지금도 우리 신앙의 등불이 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마태오 복음의 산상 설교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세상은 많이 가진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이 성공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마음, 자비로운 마음, 깨끗한 마음, 평화를 이루는 삶이 참된 행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우리는 내일을 걱정하고, 건강을 걱정하고, 자녀를 걱정하고, 경제적인 문제를 걱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새를 바라보고 들의 꽃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알고 계시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저 역시 이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깊은 위로를 얻습니다. 걱정의 무게를 내려놓고, 더 높이 날아오르는 ‘갈매기의 꿈’을 꾸는 것 같습니다.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하느님 나라의 비유도 참 아름답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단순히 죽은 다음에 가는 시간과 공간의 장소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삶이 변화되는 곳에서 시작됩니다. 미움이 용서로 바뀌는 곳에서 하느님 나라가 시작됩니다. 욕심이 나눔으로 바뀌는 곳에서 하느님 나라가 시작됩니다. 무관심이 연민으로 바뀌는 곳에서 하느님 나라가 시작됩니다. 다른 사람의 짐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들어 주는 곳에서 하느님 나라가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태오는 바로 그 말씀의 증인이었습니다. 자신이 죄인이었지만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완전한 사람들만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상처받은 사람들이 위로받고, 죄인이 용서받으며, 넘어진 사람이 다시 일어나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아픈 사람을 찾아가며, 외로운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의 짐을 함께 들어 주는 것이 곧 예수님께 해 드리는 일입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예언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선포자로, 어떤 사람은 목자와 교사로 세워 주십니다. 역할은 서로 다르지만, 목적은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성장시키고, 사랑과 평화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성 마태오 사도는 세관을 떠나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자신의 과거를 내려놓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기록하여 2천 년이 지난 오늘까지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오늘 주님의 부르심을 듣습니다. “나를 따라라.” 그 부르심에 응답하며,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글이 아니라 삶으로 복음을 기록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먹는 밥>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태 9,11ㄴ)
그저 주린 배만
채우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삶을
함께 이루는 것이니
차린 거 별로 없어도
여럿이 함께 먹어야
밥은 맛날 뿐만 아니라
참으로 밥이지요
함께 밥 먹을 사람 많은
사람에게야
함께 먹는 밥이
뭐 그리 대단할까 마는
아무도 선뜻
밥 함께 먹자 하지 않아
서럽게 홀로
밥알 삼키는 사람에게
함께 먹는 밥은
참으로 꿈같을 테지요
이 자그마한 소중한 꿈
우리 함께 이뤄보면 어떨까요
오늘의 성인
성 마태오(Matthew)
신분 : 사도, 복음사가, 순교자
활동연도 : +1세기경
같은이름 : 마두, 마태우스, 마테오, 마테우스, 매튜
성 마태오(Matthaeus)는 원래 카파르나움에서 로마 제국을 위해 세금을 걷는 세리였으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고 제자가 되었다(마태 9,9-13). 그는 갈릴래아 태생인 듯 하며, 마르코 복음에 의하면 알패오의 아들로 원래 이름은 레위였다(2,13-17).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신 것처럼, 레위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마태오라는 새 이름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마태오는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뜻이다. 열두 사도 중의 한 명인 성 마태오는 일찍부터 마태오 복음서의 저자로 알려져 왔다. 그는 70년에 로마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후, 80-85년경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첫 번째 복음서를 집필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특별히 유다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동료 유다인들을 위해 복음서를 저술하였다.
전승에 의하면 마태오 사도는 유대 지방을 순회하다가 에티오피아와 페르시아까지 갔고, 그곳에서 복음을 선포하다가 화형 또는 돌에 맞아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로마 순교록은 그가 에티오피아에서 순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유해는 에티오피아에 묻혔다가 10세기경에 이탈리아 남부의 항구도시인 살레르노(Salerno)로 옮겨져 공경을 받고 있다. 4복음서를 동물로 상징할 때 마태오 복음서는 글 쓰는 사람이나 천사의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는 예수님의 족보로 복음서를 시작한 데서 기인한다. 그는 은행원과 장부 기장자, 회계사와 세무 직원들의 수호성인이다. 동방 교회에서는 11월 16일에 그의 축일을 지낸다.
성 요나 (Jonas)
활동년도 :
신분 : 구약인물, 예언자
지역 :
같은 이름 : 요나스, 조나스
구약성서 열두 소예언서 중 다섯 번째 자리에 배치된 요나서는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서 다른 예언서들과 매우 다르다. 예언서는 일반적으로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으로 이루어지는데, 요나서에는 전기나 자서전적인 부분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그 비중이 미미하다. 그리고 요나서는 요나라는 이름을 지닌 예언자가 한 가지 사명을 수행하는 이야기만 전한다. 그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말은 고작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는 무너진다!”라는 한마디이다(3,4).
요나서에 의하면 요나 예언자는 주님으로부터 니느웨로 가서 그분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니느웨 반대쪽으로, 당시 사람들이 세상 서쪽 끝이라고 생각하던 다르싯으로 달아나려고 배를 탄다. 주님은 바다에 큰 폭풍을 일으키신다. 뱃사람들은 겁에 질려 저마다 자기 신에게 부르짖으면서, 재앙을 피하려고 애를 쓴다. 모든 것이 소용없자 그들은 변고의 원인이 누구인지 알아보려고 주사위를 던진다. 배 밑창에서 잠을 자다가 끌려 나온 요나에게 주사위가 떨어진다. 그는 자기에게 모든 탓이 있음을 순순히 고백하고,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권고한다. 선원들은 뭍으로 돌아가려고 마지막 노력을 기울이지만 사태는 나아지지 않는다. 그들은 마침내 주님에게 용서를 청하며 요나의 말대로 한다. 그러자 바다가 조용해진다. 사람들은 주님 곧 요나의 하느님에게 희생 제물을 바친다. 주님은 큰 물고기를 시켜 바다에 떨어진 요나를 삼키게 하신다. 사흘 뒤에 그 물고기가 요나를 육지에 뱉어내는데,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있을 때에 하느님께 감사의 시편을 노래한다.
이렇게 주님은 요나를 살려내신 다음 처음과 똑같이 사명을 부여하신다. 이번에는 요나도 주님의 지시를 순순히 따른다. 니느웨로 가서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는 무너진다!” 하고 외친다. 그러자 니느웨의 임금을 비롯하여 모든 주님이 나서서 참회하며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한다. 그들이 회개하는 모습을 보신 하느님은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신다.
요나는 이러한 하느님의 처사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니느웨를 용서하시는 하느님과 그러한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요나 사이에 갈등이 빚어진다. 요나는 주님이 자비하신 하느님이심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느님이 그들을 용서하시는 일이 벌어지자, 화를 내며 자기를 차라리 죽여 달라면서 하느님께 대든다. 그리고 나서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려고 성밖으로 가서 초막을 치고 앉는다. 주님은 그 위로 아주까리를 자라게 하시어 그늘을 드리워 주신다. 그래서 요나는 기분이 매우 좋았는데, 이튿날 벌레가 아주까리를 쏠아 시들게 한데다가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고 뜨거운 바람까지 불자, 다시 죽는 게 낫다고 하느님께 투덜거린다. 그러한 요나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아주까리를 너는 그토록 가엾이 여기는구나!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느웨를 내가 어찌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느냐?” 요나서는 하느님의 이 질문과 함께 끝난다.
요나서의 문제는 하느님의 예언자인 요나가 뱃사람들, 특히 니느웨인들로 대표되는 이민족들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이다. 이 예언서는 관습과 선입관의 색안경을 벗어 던지기를 요구한다. 지금까지의 좁은 안목을 버리고,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대양과 해심과 니느웨처럼 전망을 넓혀 세상과 하느님을 생각할 것을 촉구한다. 과거와는 다른 시각으로, 곧 바다와 물을 창조하시고(1,9) 이민족들의 하느님도 되시는(3,8 참조) 한결같으신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촉구한다. 그리하여 인간의 정의를 초월하시는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에 따른 보편적 구원을 이 세상에 구현하는 사명을 수행하라고 그분의 백성을 부른다. 이렇게 볼 때 요나서는 독특한 의미이기는 하지만 하나의 예언서로서 다른 예언서들과 자리를 같이할 수 있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