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이끼와 서양의 이끼
우리는 말로써 자기의 생각과 감정을 남에게 전달하고, 또한 말을 통하여 다른 사람의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말이란 이러한 의사 전달의 단순한 음성적 도구만은 아니다. 말은 쓰는 사람의 인격이나 의식 구조를 드러내는 하나의 징표이기도 하다.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학력 수준이나 교양의 정도는 말할 것도 없고, 그가 지닌 성격이나 사고의 높낮이도 함께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말은 그 사람의 내부에 갖추어져 있는 의식을, 귀로 들을 수 있는 소리로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신과 의사들이 환자의 언어를 듣고 분석하여, 발병 원인을 찾아내고 그에 대한 적절한 치료 방법을 모색하는 것도, 이러한 언어의 기능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영혼이라는 존재는 언어라는 집 속에서 산다. 모든 존재는 언어를 통하여 표현된다.
유럽인들은 원래 부족 끼리 떠돌아다니는 유목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이동 중에 다른 부족을 만나면 물물교환을 했는데, 자기들에게 남거나 불필요란 물건을 상대편에게 주고받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물건을 주고받는 것을 그들은 ghebe라 하였다. 이 말에서 ‘준다’를 뜻하는 ‘give’와 ‘가진다’는 의미의 라틴어 habere가 파생했다. 그 후 havere는 have로 변했다. 그러니 유럽인들에게는 give와 have가 본디 한 단어였던 것이다. 이러한 ‘ghebe의 집’에는 지금도 서구인의 ‘의식이란 존재’가 그 속에 살고 있다. give와 have가 한 집에 사는 것이다. 그들이 남에게 잘 베풀고, 사회에 환원하고 기부하기를 좋아하는 문화를 향유하고 있는 것은 거기에 연유한다.
이와 같이 말하는 이의 의식을 밖으로 드러내는 언어는, 거꾸로 사람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역할도 아울러 하고 있다. 고운 말을 사용하는 습관을 갖게 되면 심성 또한 곱게 다듬어지고, 거친 말을 버릇처럼 계속해서 사용하면 마음 또한 거칠어지게 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언어가 곧 존재가 되는 가역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처럼 언어는 인간의 의식을 밖으로 드러내기도 하고, 반대로 인간의 의식을 변화시키기도 하는 양면적 기능을 갖고 있다. 그래서 언어철학자 훔볼트(humbolt)는 ‘우리는 언어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대로 인식한다.’고 하였다. 그가 품고 있는 언어 수만큼 알고, 그 경계선 안의 세계만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를 몇 개의 단어 속에서 살펴본다.
한 단어가 지니고 있는 내포적 의미를 보면, 그것을 사용하고 있는 집단의 사고 유형이나 의식 수준을 알 수가 있다.
‘구르는 돌은 이끼가 안 낀다’는 속담은 우리나라에도 있고 영국에도 있다.
그런데 그 의미에 있어서는 양자가 서로 다르다. 우리나라에서는, 돌도 한 자리에 가만히 있으면 이끼가 앉듯이, 사람이 활동이 없으면 폐인이 된다는 뜻으로 쓴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한 곳에 자리 잡지 않고, 자꾸 옮겨 다니면 이익이 없다는 뜻으로 사용한다. 그 쓰임이 정반대다.
우리는 이끼를 나쁜 관념으로 떠올리지만, 저쪽 사람들은 좋은 개념으로 받아들인다. 우리는 이끼가 끼는 것을 썩거나 더러운 때가 끼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이끼가 끼다’란 말을 ‘돈을 번다’거나 ‘바람직한 것을 얻다’란 뜻으로 관념한다. 문화의 차이다. 그러므로 영국의 속담 ‘A rolling stone gathers no moss.’를 번역할 때는 직역할 것이 아니라, ‘새는 앉는 곳마다 털 빠진다.’ 정도로 의역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영어의 ‘father’를 한번 보기로 하자. 이 단어는 ‘아버지’란 뜻 외에 ‘성직자, 신(神)’의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다. ‘the father’는 기독교의 하나님을 뜻한다. 그러나 한국어의 ‘아버지’는 남자인 어버이 곧 부친(父親)을 의미하며, 그 이외의 뜻은 원래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상하 질서를 존중하는 문화 속에서 살아온 민족이기 때문에 ‘아버지’라는 말 속에는 자기를 낳아준 존엄한 아버지 이외의 다른 뜻이 들어올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둘일 수가 없는 것처럼 두 가지 뜻이 용납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특성을 살피지 아니하고, 초기 성경의 번역자들이 ‘father’를 그대로 아버지로 직역한 것은 다소 미숙한 번역이 아니었던가 싶다. 영어의 ‘father’에는 ‘창조주, 신’의 뜻이 포함되어 있지마는, 한국어 ‘아버지’에는 이러한 의미가 전혀 들어 있지 않음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기 아버지 이외의 그 누구도 아버지일 수 없다는 사고 체계를 가지고 살아왔다. 그러므로 그러한 번역은 문화적 충격을 빚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가 있다. ‘father’를 ‘아버지’ 아닌 다른 적절한 말로 번역했더라면, 새로 들어온 종교에 대해 좀 더 친근감을 갖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갖게 된다. 지금도 성경에 천부(天父)라는 말이 있는데, 처음부터 그런 말로 썼으면 훨씬 더 언중들에게 친근감을 주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다음으로 영어의 ‘yield’를 한번 살펴보자. 도로 표지판의 우리말 ‘양보’란 단어 아래 번역어로 함께 쓰여 있는 바로 그 말이다. 이 ‘yield’는 ‘양보하다’라는 뜻 이외에 ‘(농산물 등을) 산출하다’, ‘(이익을) 가져오다’라는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영어권 사람들이, 양보는 곧 생산적이며, 이익이 된다는 사고 체계를 갖고 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이웃과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횡적 질서를 강조하면서 생활해 온 그들의 문화에서 생성된 결과라 생각된다.
그러나 위아래의 종적 질서를 존중하면서 살아온 우리는, 이러한 횡적인 양보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한 연유로, 양보라는 말에 ‘생산’이란 의미를 내포시키지 못하였다. ‘먼저 걸음[步]을 내디디는 것을 사양[讓]한다’는 정도의 뜻만 갖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양보하면 오히려 손해 본다는 의식이 우리들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우리도 ‘양보’가 ‘생산적’이며 ‘이익’이 된다는 의식의 변화를 일으켜, ‘양보’라는 단어의 의미 속에 그러한 뜻이 담겨지는 날이 빨리 왔으면 싶다.
영어의 ‘give up’은 ‘포기하다’는 뜻으로 주로 쓰지만, ‘(자리를) 남에게 내주다, (일에) 열중하다, 몰두하다’의 뜻으로 더 널리 쓰인다. 영어권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포기가 포기 자체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내주고, 그것을 계기로 하여 일에 더욱 열중한다는 의미를 함께 갖고 있는 것이다. 즉 포기는 ‘up’하게 ‘give’하는 것이다. 우리도 포기라는 말 속에 한 단계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는 의미가 깃들이는 날이 빨리 왔으면 싶다.
독일어 ‘gift’는 선물이란 뜻과 함께 ‘독약’이란 의미도 있다. 선물에 대한 독일인들의 의식을 이 말에서 더듬어 볼 수가 있다. 적당한 선물은 주는 이와 받는 이 사이의 정을 돈독히 쌓게 하지만, 지나친 선물은 오히려 뇌물이 되어 폐해를 초래하는 법이다. 그야말로 선물이 독이 된 것이다. 아마도 독일인들은 선물을 주거나 받을 때, 그 속에 정이 담겨 있는지 혹은 독이 스며 있는지를 깊이 살펴볼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의 선물이라는 말의 선(膳)에는, ‘반찬이나 고기 따위를 먹거나 바친다’는 뜻밖에 없다. 그 속에 독이라는 뜻은 전혀 없고, 무조건 먹는다는 의미밖에 없다.
중국에서 오래 공부하고 온 지인이 원고를 청탁하기에 주저했더니, ‘객기(客氣)’를 부리지 마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때의 객기란 말은 상황에 맞지 않은 말이다. 우리말 객기와 중국어 객기는 그 말뜻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말 객기는 객쩍게 부리는 혈기나 분수를 모르는 협기(俠氣)를 가리킨다. 변영로의 명정 40년에, “취중 객기로 나도 평양을 가겠다고 벌떡 일어섰다.”는 구절이 나온다. 이와 같이 객기는 분수에 넘치는 혈기를 뜻하는 말이다. 반면에 중국어의 객기는 겸손, 사양을 뜻하는 말이다.
우리는 객기를 ‘마음의 주인’ 즉 본마음에 상대되는 ‘손님[客]과 같은 또 다른 기운[氣]’으로 관념한 반면, 중국인들은 주인에 대한 손님[客]으로서 갖는 예의 즉 사양[氣]의 마음으로 뜻매김한 것이다.
그분은 중국에서 오래 생활하다 보니, 그만 중국식 표현을 한 것이다. 한자가 같다고 하여 중국어와 우리말의 뜻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양자가 갖는 문화의 차이다.
이렇듯 언어는 그것을 사용하는 한 개인이나 민족의 사고 체계를 담고 있는 문화적 산물이다. 그러므로 단어 하나라도 그것을 다른 말로 번역할 때는 그것을 사용하는 언중의 정서에 맞게 번역해야 할 것이다.
영어에는 피동형이 많지만, 우리말은 주로 능동형이다. 그러므로 영어의 피동형을 옮길 때, 곧이곧대로 번역하면 문장이나 말이 껄끄럽게 된다. 우리의 정서와 의식에 맞게 번역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특히, 종교의 경전은 한 자 한 구가 다, 신자들의 양식이 되는 말씀이 되기 때문에, 더한층 신중을 기해야 한다. 성경에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구절이 있다. 이것은 아마도 영어 성경의 “Blessed are the poor of spirit for theirs is a kingdom of heaven”을 직역한 것으로 보인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함일까? 우리는 마음이 가난하다 하면, 마음가짐이 인색하고 여유롭지 못한 것을 가리킨다. 그러니 이 번역대로라면, ‘마음이 인색한 자는 복이 있다’는 뜻이 된다. 의아스럽기 그지없다. 그런데 영어의 ‘The poor’는 탐욕의 마음을 갖지 않은 사람을 뜻한다. 그러니 번역 과정에서 잘못하여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운 사람’을 ‘인색하고 가슴이 좁은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표층적 의미로만 직역한 탓으로, 원래의 뜻과는 정반대가 되고 말았다. 언어에 담긴 문화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 성경은 비교적 원뜻에 맞게 번역되어 있다. “虛心的人 有福了 因爲天國是他們的”라 번역하여 놓았다. 마음을 비운 사람은 복이 있다는 뜻이다. 우리도 이와 비슷한 말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
우리말로 번역할 때는 어법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요한복음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란 구절이 보인다. 이는 영어의 ‘And you shall know the truth, and the truth shall make you free.’를 직역한 것 같다. 그런데 여기의 ‘자유케’ 란 말은 우리말 문법에 맞지 않은 말이다. ‘자유케’ 는 ‘자유하게’ 의 준말인 듯한데, 이 말이 되려면 ‘자유하다’란 우리말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말에 그런 말은 없다. 이는 단순히 영어의 ‘make ~ free’를 직역한 것으로, 우리말의 의미를 고려하지 않는 결과로 빚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로 바꾸어 써야 옳다.
또 교회 이름에 ‘자유케하는교회’라고 지은 교회를 본 적이 있다. 이 교회 이름도 역시 ‘자유롭게하는 교회’로 바꾸는 것이 옳다.
말이 나온 김에 사족으로 덧붙일 것은 시대의 흐름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례로, 초기 성경 번역자들이 당시의 우리 생활상을 고려하여 ‘빵(bread)’을 ‘떡’으로 번역하였는데, 이런 어휘도 다시 고쳐야 하리라 본다. 당시와는 달리 지금은 빵이란 말이 생소한 단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란 구절은 영어의 ‘Man shall not live by bread alone.’을 번역한 것인데, 영어의 bread를 떡으로 번역하였다. 이제는 떡보다 오히려 빵이 일반화되어 누구에게나 친근한 말이 되었다. 또 성경의 문맥에서 볼 때, 그 말이 단순한 빵의 뜻이 아니라 ‘양식’의 제유(提喩, Synecdoche)로 쓰인바, 지금의 의미망으로 볼 때 떡은 그런 의미를 함축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중국 성경에서는 이 말을 ‘먹을 것[食物]’으로 번역 했다. 이런저런 것을 고려해 볼 때, 떡은 원래의 뜻을 살려 빵으로 고쳐 씀이 마땅하다.
또 사복음서에 고루 등장하는 오병이어(五餠二魚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영어의 ‘five loaves of bread and two fishes’를 번역한 것인데, 여기의 bread도 떡[餠]으로 번역하였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의식도 변했다. 그러니 떡도 그에 맞추어 이 역시 빵으로 바꾸는 것이 맞겠다.
의식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 언어다. 또한 언어는 의식을 바꾸기도 한다고 했다. 이 말은 곧 언어가 문화를 반영하고, 역으로 문화를 형성해 내기도 한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언어는 개인이나 사회의 문화적인 양상에 맞게 사용하고, 또 이를 잘 감안해서 다듬어 나가야 하는 음성 매체다.
우리말의 ‘예쁘다’는 ‘불쌍하다(어엿브다)’에서 왔고, ‘어리석다’는 ‘어리다’에서 왔다. 또 ‘사랑하다’는 원래 ‘생각하다’는 뜻이었다. 겉으로 보면 무관할 것 같은 두 말의 관계는 그 속을 들여다보면 사실 하나다. 나에게 예쁘게 보이는 대상은 항상 그 밑에 가엾고 애처로운 정서가 깔려 있고, 예쁜 사람이 조금만 탈이 나도 불쌍해 보인다. 그래서 ‘예쁘다’와 ‘불쌍하다’는 이음동의어(異音同義語)다. 또 어리면 역시 어리석다. 그래서 ‘어리다’와 ‘어리석다’는 쌍둥이 말이다. 그리고 사랑하면 늘 생각나기 마련이다.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와 같이 우리의 의식 속에는 ‘예쁘다’와 ‘불쌍하다’가 한 집에 살고, ‘어리다’와 ‘어리석다’도 같은 집에 산다. ‘사랑하다’와 ‘생각나다’ 역시 한집 식구다.
이처럼 앞으로는 ‘주다’와 ‘갖다’가 한 집에서 살고, ‘가다’와 ‘양보하다’가, 그리고 ‘이웃하다’와 ‘이해하다’가 같은 집에서 살면 좋겠다. 그리고 ‘전라도’와 ‘경상도’가 한 집 식구가 되는 말의 곳집을 만들어, 우리의 집단무의식 속에 그러한 내포(connotation)들이 하루빨리 자리 잡았으면 한다.
첫댓글 참으로 해박하신 필력으로 작성하신 글이라 직접 워딩을 해보았습니다. 교장선생님 소원대로 전라 경상이 한 식구가 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군생활 시 전라도 고참에게 큰 은혜를 입은 일이 있습니다. 지금도 목포에 사는 친구와 아주 친근하게 지내고 있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