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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에 대하여
고전7:1~24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은 이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의 적용부분을 다루기 시작합니다.
먼저 혼인에 대한 문제부터 시작을 합니다.
당시 고대사회에는 혼인에 대한 두 가지 견해가 지배적이었습니다.
하나는, 다수의 견해로서 혼인과 출산은 중요하고 장려할 만한 일이라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혼인은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방해가 됨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가 그것이었습니다.
이런 견해가 주를 이루던 그 당시를 살던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은 혼인의 성경적인 원리에 대하여 교훈하기 시작합니다.
(1)/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함이 좋으나” 했습니다.
이를 보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아마 바울에게 이 문제에 대하여 편지를 써 보냈던 것 같습니다.
당시 고린도교회는 성적으로 타락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심지어 혼인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금욕주의를 요구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부간에 성관계를 금하는 것이 옳다 여기는 자들도 상당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부부간에 성적인 트러블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 때문에 다툼이 생기고 신앙생활에 방해가 된 것입니다. (예: 새벽기도 가는 아내에게 관계 요구 거절로 폭행, 풍비박산 난 가정)
그러므로 이들의 질문에 대하여 바울은 교훈하는데,
(2)/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했습니다.
이는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그 성적욕망을 채우기 위한 목적으로 혼인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성적 타락을 막기 위하여 부부의 관계를 갖는 것이 옳다 하는 것입니다. 즉 성적인 부도덕을 피하고 가정의 화평함을 위해서는 부부간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섬기는 그 일을 통한 하나님과의 화평을 위하여 성적인 타락을 피해야 한다는 (도망가다, 멀리하다) 것입니다.
이는 평안함 가운데 신앙생활을 영위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화평과 평안은 다른 의미입니다.
화평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즉 관계가 끊어져서 입었던 상처, 그 대가들이 회복 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롬5:1~8/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했습니다.
평안이란 이 세상에 대한 관계입니다.
즉 갈등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 세상의 가치들에 대한 미련, 그것을 좇지 않는 삶을 인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이 땅에서의 복, 선물입니다.
그래서 이 둘을 위하여 부부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어서 교훈하기를
(3)/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했습니다.
“그 남편, 그 아내”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즉 결혼한 남자, 여자는 그 남편과 그 아내 외에 성적인 관계를 가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남자, 여자에게 눈길을 두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서로가 정절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정절의 의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만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어서 부부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교훈하기를
(4)/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했습니다.
이는 부부간의 성관계에 있어서 항상 상대방 중심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기분에 따라서 무조건 요구하거나 거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내 욕구대로 하지 말고 상대방의 뜻을 배려하는 사랑으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또 이르기를
(5)/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 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 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당시 부부간의 성적인 문제로 다투고 분방을 하며 신앙생활이 허물어진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부간에 분방하지 말라고 교훈합니다. 각방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가끔 70이 넘으면 부부가 어디서 자는 지도 모른다는 우스갯소리를 듣곤 합니다. 아침에 눈 떤 후 어디에서 나오면 살아있었구나 한다는 겁니다. ㅎ)
분방하지 마라는 이유는 사단이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성적욕망이란 순식간에 자극과 충동에 따라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부간에 성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다만 분방에 있어서의 단서를 다는데, 기도 할 틈을 얻기 위해서 얼마 동안은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곧 합하라고 교훈합니다.
또 이르기를
(6)/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권도요 명령은 아니라”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지 꼭 그렇게 해야 한다는 명령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기도 할 틈을 얻기 위하여 잠간 분방할 수 있으나, 이는 그것을 위한 너희의 요청에 대한 허용이지 명령은 아니라고 답합니다. 곧 믿음의 깊이가 다른 부부간에 있어서, 이 문제를 가지고 또 부부간에 다투고 반목 대립, 갈등하는 것보다, 꼭 그렇게 할 필요는 없으니 지혜롭게 서로 합의에 의해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정은 부부 중심입니다. 그 통로는 혼인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가정은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가장 먼저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은 가정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사회 가운데 부부, 곧 가정이 그 중심입니다. 가정들이 모여서 사회가 되는 것 아닙니까?
가정은 자식이나 부모 중심이 아닙니다. (예: 물에 빠진 부모와 자식, 부부/ 누구먼저 구해야 하나?)
당시 이러저러한 부부간의 문제로 바울에게 편지로 조언을 구했던 고린도교회에 대해 바울은 또 이르기를
(7)/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했습니다.
바울은 독신을 대안으로 제시하면서, 다만 이럴 경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특별히 독신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은 그렇게 할 것을 권합니다. 혼인을 하든지 독신으로 살든지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좇아 그 요구하심에 응답하는 합당한 삶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교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8~9)/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했습니다.
이 말씀은 전체를 향한 말이 아니라, 독신자들을 향한 교훈입니다.
독신으로 사는 자들이나 혼인했다가 혼자 된 자들은 독신으로 지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도 단서를 붙입니다.
그러나, 성적인 욕망을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게 뭡니까? 바울의 교훈은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잘 보십시오. 당시 고린도교회에는 독신을 주장하면서 명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외치지만, 책임 질 필요도 없고 욕망은 채울 수 있는, 창기와 음행하며 성적인 욕망을 채우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든지, 절제하겠거든 독신으로 살라고 교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 절부터는 혼인한 자들에게 교훈합니다.
(10~11)/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여기서는 권도가 아닌 명령한다고 말 합니다)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막10장에 바리새인들이 나아와 주를 시험하는 질문을 합니다. 묻기를 사람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합니다. 주님이 되 물으십니다.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저들이 대답하기를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 주어 내어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일러주십니다.
막10:5~1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창조 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묻자온대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마음의 완악함” 이란 “스콜레로 카르디아의 합성어로서 냉담, 완고, 굳은 마음, 잔인, 무자비, 거친, 강퍅” 이라는 뜻입니다.
“인하여” 라는 말은 말미암아 라는 뜻이 아니라 “프로스 타우테의 합성어로서/ ~~에게 유리하게, 그녀” 라는 뜻입니다.
즉 모세의 율법은 아내를 대하는 남편의 무자비함과 잔인하게 거친 그 마음으로부터 아내에게 유리하게 하기 위하여 주신 율법이다 는 것입니다. 약자인 아내를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 둘로 가정을 이루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말고 둘이 화평하라 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일을 도모하는 동반자요 동역자로 서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할 때 이는 “카탈레이포/ 남겨놓다, 버리고 가다, 두고 가다” 라는 뜻입니다.
이는 부부가 가장 중요한 중심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했습니다.
이는 “~~에게서 라는 파라 라는 말에서 파생 된 말로서 파레고리아/ 위로, 위안” 이란 말과 “사르크스/ 인간의 벼를 덮고 있는 물질의 총칭” 이라는 뜻입니다.
즉 둘이 아니라, 한 몸으로 덮인 한 몸뚱아리로서 서로 위로하고 위안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가 부부라는 것입니다.
“될지니라” 라는 말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이는 “에소마이/ 미래 동사로 ~~일 것이다, 존재하다”라는 말입니다.
즉 그날까지 그렇게 함께 가야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1+1=2가 아니라 1, 하나 된 몸이라는 것입니다.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 할지니라 했습니다.
“짝지어”라는 뜻은 “쉬쥬그뉘미/ 같이 멍에를 메게 하다, 결합시키다, 짝을 지어주다” 라는 말입니다.
“주신 것을” 이란 “호스/ ~~한 자, ~~한 것을, ~~한 자를” 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세워주신 하나님의 가정을 이라는 뜻입니다.
“나누지” 라는 말은 “코리조/ 가르다, 분리시키다, 헤어지다, 가버리다, 떠나가다, 끊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을 사람이 그 마음이 완악하여 갈라 분리시키고 떠나감으로써 그 관계를 끊고 헤어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 대하여 간음하는 것과 같다, 곧 서로가 죄를 짓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율법에서 이혼증서를 써주어 이혼을 허용한 것은, 내 맘에 들지 않거나 다른 여자가 생겨, 이러저러한 이유로 이혼증서만 써주면 허용한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약자인 여자를 보호하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과부는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는 사람입니다. 이 증서 제도가 없으면 남자는 완악한 자기 맘대로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를 맞을 것이고, 쫓겨난 여자는 어디를 가도 대접을 받을 수도 없고, 재혼을 할 수도 없기 때문에 그렇게 길을 열어 주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창세기 율법의 본질을 회복하여 이혼을 금지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여자는 남편과 갈라서지 말며, 남자는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 다시 화합하고 합하라고 교훈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사도 바울은 믿지 않는 사람과 혼인한 자들에게 교훈합니다.
(12~13)/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며,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했습니다.
“믿지”라는 말은 “아피스토스/ 믿지 않는, 믿음 없는” 이라는 말입니다. 불신자를 가리킵니다.
그런 사람일지라도 “살기를” 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오이케오/ 거룩하다, 어떤 사람 안에 거하다” 라는 뜻입니다.
즉 거룩한 ,곧 피조물과 구별 된 하나님의 뜻을 좇는 믿음의 남편이나 아내와 함께 거하기를 원하거든 이라는 말입니다.
“좋아하거든”이라는 말이 이를 증거 합니다. 이는 “쉬뉴도케오/ 합의하다, 동의하다, 승인하다, 인정하다”라는 말입니다.
믿음의 사람을 인정하고 대적치 아니하고 함께 살기를 원하거든 거절함으로 이혼하지 말고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버리지” 라는 말은 “아피에미/ 보내다에서 유래 된 말인데, 이혼하다, 버리다, 거절하다, 취소하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남편이나 아내나 다 같은 적용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어서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이르기를
(14)/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했습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이란 “에페이+ 아라의 합성어로 ~~때문에, ~~이므로 + 그래서, 따라서”라는 말입니다.
즉 함께 거함을 좋아함에도 이혼하고 관계를 끊어버리면 이라는 뜻입니다.
“자녀도” 라는 말은 “테크논/ 자식, 자손, 후손”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깨끗지”라 함은 “아카다르토스/ 불순한, 신성과 접할 수 없는, 우상의 악한 영역의”라는 뜻입니다.
“못하리라” 함은 “에스티/ 그는 ~~이다”라는 뜻입니다.
결국 그 후손들도 믿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함께 동거함을 좋아함에도 버리고 끊어져 갈라서서 이혼하면 그 남편이나 아내를 구원 할 길도, 후손을 구원 할 길도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하지 말라 하고 교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접속사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데/ 앞의 대조절 사이의 구분이 필요할 때 사용하는 접속사가 붙어 있습니다. 도리어, 또한, 그러나” 라는 뜻입니다.
“이제” 라고 함은 “뉜/ 지금, 현재”라는 뜻입니다.
“거룩하니라” 함은 “하기오스 + 에스티 = 두려운 것 이란 말에서 유래함인데 하나님께 적합한, 하나님과 가까운 + 그는 ~~이다” 라는 뜻입니다.
즉 함께 거함을 좋아하는 남편과 아내가 서로 화합함으로 다시 합하면,
지금 너희를 살펴보라! 하나님과 가까운, 적합한, 곧 합당히 행하는 사람으로 지금 변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이혼함으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가정을 허물어 구원을 잃어버리지 말고 믿음의 인내와 소망으로써 가정의 구원을 이루어가라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가족이라고 해서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고 이제 사도 바울은 이어서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가 신앙적인 이유로 이혼을 요구할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교훈합니다.
(15)/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했습니다.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재산이나 소유, 수입이나 값을 요구하며 이혼하기를 원하거든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갈리거든” 이란 말은 “크레마/ 재물, 값, 소유, 수입”이란 말입니다.
요구를 들어주고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구속받을 것이” 란 말은 “둘로오/ 노예 삼다, 예속시키다. 종노릇하다, 복종시키다” 라는 말입니다. 그것에 메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다시 앞의 대조를 위해 접속사를 사용하는데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라고 단서를 답니다.
이는“에이레네 + 엔 = 조화, 평화, 평강, 어울림+ ~~안에, 가까이”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화평과 평안을 위해서, 곧 이 땅의 소망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소망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는 그 소망 안에 사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즉 그까짓 세상 재물, 수입, 소유 몇 푼에 가정을 잃어버리는 선택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를” 이란 “헤마스/ 우리를” 이란 뜻이며,
“부르셨느니라” 함은 “칼레오/ ~~라고 부르다, 일컫다, 이름하다, 칭하다, 일컫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아무 공로나 의도, 깨끗함도 없는 불순종한 우리, 지옥 심판 대상이었던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고, 값 주고 사신바 되어 우리로 의롭다, 아들이라, 친 백성이요 그분의 소유요 자녀로 칭해주시지 않았느냐? 천국영광의 소망을 갖게 하신 분이 아니냐?
그러므로 너희가 세상의 잠깐 보이다가 없어질 그것들 때문에,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가정을 버리고 구원의 그 영광의 길을 잃어버려서야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용납하고 사랑함으로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간절히 당부합니다.
(16)/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요, 그분의 손에 있은즉 지금 눈에 보이는 이혼의 문제를 인하여 너희로 가정을 허물지 말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첫째, 혼인을 하든지 독신으로 살든지 다 하나님의 부르심대로 할 일입니다.
무조건 혼인은 해야 한다든지, 독신으로 살아야 한다든지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라면 독신을 선택하는 일은 귀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로써 이를 위한 독신자들을 향한 교회의 논쟁을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셋째, 독신으로 살면서 성적 욕망을 절제하지 못해 음행을 행하는 것은 옳지 못하므로 그렇다면 혼인을 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넷째, 만일 지금 믿지 않는 사람과 살고 있다면, 그 영적인 가치 충돌로 인하여 대립, 갈등, 마찰, 다툼이 있을지라도 그것 때문에 헤어지지 말고 그를 주께로 인도하기 위해 애쓰라는 것입니다.
다섯째, 이혼은 옳지 않은 일이므로 신중하라는 것입니다.
왜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그 부르심으로 구속함을 입어 사랑함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요 의롭다 칭함을 얻은 자들이 되었은즉, 자녀답게 인내하고 용납함으로 상대가 믿음을 버리라고 요구할지라도, 그도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요 그 구원은 내가 이룸이 아닌 하나님의 사역이므로 섣불리 이혼함으로 구원을 잃어버리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혼을 하는 대부분은 나의 욕심, 나의 평안함, 나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이기적이고, 세상 적인 가치를 좇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것에 소망을 두기 때문입니다. 이타적인 십자가의ㅐ 원수로 행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오는 가치 충돌을 감정적으로 대하기 때문에 겪는 아픔입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한 몸이 된 부부를 갈라지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단의 궤계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리적으로 혼인하기까지 각각 다른 가정과 가풍에서 자란 부부가 어찌 한 번에, 속히 각자의 욕심대로 하나가 될 수 있겠습니까?
주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 되기까지, 혼인 전까지 살아 온 시간이나 세월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기다림, 용납함과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새 옷이나 신발도 몇 번 입고 신어야 익숙하고 편안합니다. 하물며 부부이랴!
여러분~~
아담이 뱀에게 속은 하와의 꼬임에 속아 하나님께 범죄 함으로 실낙원 하였으나 하와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급탈하려 했다는 말에도 당시 군대장관인 보디발은 자기체면과 위신을 따지고 이를 명분으로 아내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호세아는 행음한 고멜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 모두가 그 용서는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고멜을 버리시지 않으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알고 이미 입은 자들이 아닙니까?
부부는 서로 위로하고 돌아보고 섬기고 사랑하는 관계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신부들입니다. 그날 그 혼인잔치에서 만날 신랑을 기다리며
그 산랑 예수를 섬기는 믿음으로 가정도 부부관계도 세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성도님들 가정 위에, 늘 풍성하고 늘 새롭고 늘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다음 시간에 우리가 살피게 되는 (17~24)까지는 은사와 부르심의 문제를 다룹니다. 다음 시간에 반가이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