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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좋은 주말입니다. 연휴가 기다리니까요. 직장생활 할 때가 떠오릅니다. 이미 30년도 넘은 시간의 격차가 있으니 지금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연휴라는 것이 있어도 사흘을 넘은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만큼 쉬려면 1년 한번 휴가 때나 가능할까? 우리 세대는 대부분 그렇게 살았습니다. 토요일도 일하던 때이니 어쩌다 명절일 사이에 평일이 하나 껴있으면 그 하루를 봐주는 경우가 드물게 연휴가 되는 것이지요. 요즘같이 5일 연휴란 휴가 때도 얻기 힘들었습니다. 그야말로 일벌레처럼 살던 때를 지나왔습니다. 지금 세대가 그 덕을 누리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걱정했던 태풍도 지나갔고 남은 건 2년 다 되도록 버티고 있는 코로나19 뿐입니다. 민족 대이동 기간에 어떤 사태를 만들어낼지 걱정되기도 합니다. 가능하면 움직이지 말라 해도 벌써 2년째인데 또 묶이자니 힘들지요. 백신도 맞았겠다, 별일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 희망대로 별일 없기를 바랍니다. 이후의 방역 대책에 영향을 미칠 테니 말입니다. 일상으로 돌아와 다시 묶이면 정말 주저앉을 판입니다. 특히 소상공업자나 자영업자들이 걱정입니다. 여력이 없습니다. 원격판매라는 것이 불가능하지요. 무슨 길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까짓 코로나쯤이야! 정도로 무력화시키면 될 텐데 말이지요.
그래도 명절입니다. 힘들기에 더욱 서로 협력하며 격려하며 위로하며 새롭게 일어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건강하고 복된 주말과 명절을 빕니다. ^&^
2021년 9월 18일 김종우 목사
쉽게 읽는 요한계시록 7
김종우 목사
<요한이 본 하늘, 계 4장>
우리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문 첫마디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 밝혀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듯이 ‘하늘’에 계십니다. 그런데 그 하늘은 우리 육안으로 볼 수 있는 하늘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보다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하늘은 어디에 있는 하늘인가요? 해가 떠있고 밤에는 별들이 총총한 하늘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하늘입니까? 이 ‘하늘’은 이 땅의 용어입니다. 영이신 우리 하나님이 계신 곳을 땅의 언어로 ‘하늘’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표현은 ‘하늘’이라고 하였지만 뜻은 ‘영계’(영의 세계)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찾겠다고 저 하늘 우주로 나갈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구 대기권 밖 우주로 나간다 한들 하나님을 만나볼 수는 없습니다. 육안으로 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성경을 단어대로 즉 문자대로 보아서는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땅의 언어를 하늘의 언어로 바꾸어야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듭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사마리아 땅을 지나가다 수가라는 성을 들렀습니다. 제자들은 먹을 것 구하려 성안으로 가고 예수님 홀로 우물가에 쉬고 계십니다. 그 때 수가성에서 한 여인이 물을 길으려 우물에 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을 겁니다. 여인이 깜짝 놀랍니다. 당시 문화를 즉 관습을 깨는 일이었으니까요. 예수님은 남자요 유대인입니다. 그런데 상대는 여자이고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그 때 관습으로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을 하지 않았고 그 지방 문화가 지금도 엄격하지만 여자가 외간남자와 함부로 대화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두 가지 모두 깬 것이지요. 아무튼 이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오가는데 유머 책에나 나올 수 있는 ‘사오정’ 스타일의 대화입니다. 보겠습니다.
요 4 : 9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어떻게 알지도 못하는 유대인 남자가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을 겁니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10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그렇다면 예수님에게 물이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왜 또 물을 달라 하십니까? 여자가 빈정댑니다. 11절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이 우물이 얼마나 깊은데 아무 것도 가진 것도 없이 어떻게 물을 긷는다는 말입니까?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또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13 - 1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대화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무튼 한번 먹으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라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런 물이 있다면 이렇게 햇볕 쪼이며 힘들게 물 길러 다니지 않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여자가 반색을 합니다. 15절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솔직한 바람입니다. 한낮에 더위 속에 물 길러 다니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니 그 물을 달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또 이상한 주문을 하십니다. 16절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아니 물을 주는 것과 남편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남편 없으면 물 못 줍니까? 아무튼 지금 그 내용을 따지자는 것이 아닙니다. 자, 여기 예수님과 여자의 대화의 주제는 ‘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물과 여자가 말하는 물이 같은 물입니까, 다른 물입니까? 이해되지요? 용어는 똑같이 ‘물’입니다. 그런데 하나는 땅의 언어이고 또 하나는 하늘의 언어입니다. 이런 것을 분간해내지 못하면 성경을 제대로 읽을 수 없게 됩니다.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계 4 : 1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사도 요한이 보았습니다. 어디를 보았습니까? 하늘입니다. 그러나 해가 떠있는 하늘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영계’입니다. 거기에 무엇이 있다고요? ‘열린 문’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또 음성을 듣습니다.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소리 같은 그 음성’입니다. 어디서 들었습니까? 계 1 : 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그 음성이 누구의 음성이었습니까? 예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 예수님이 요한에게 지시하십니다. ‘이리로 올라오라’ 그러시지요? 왜 올라오라 하십니까? 무엇인가 보여주겠다 하십니다.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자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이 무엇인지는 조금 후에 알아보도록 합니다. 우선 이것부터 알고 가야 하겠습니다. 지금 이 4장의 사건이 언제 일어나는 일인가 하는 것이지요. 그것을 알려주는 말씀이 바로 첫 구절 ‘이 일 후에’입니다. 앞으로도 몇 번 볼 것입니다. 이 구절이 매우 중요한데 왜 그런가 하면 사건의 앞뒤를 연결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계 4장의 사건은 ‘이 일 후에’ 일어나는 사건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일’이 무엇입니까? 4장 앞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계 2, 3장에 편지 보내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요한이 교회 사자들에게 편지를 보낸 후에 요한이 예수님의 음성을 다시 듣습니다. 하늘(영계)로 올라오라 하십니다.
계 4 : 2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요한이 예수님이 부르셔서 올라갔는데 몸이 올라간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그러니 요한의 영이 올라간 것이지요. 우리 육체가 어떻게 영계에 가겠습니까? 영계는 영이 가는 것입니다. 여태 해온 말로 표현한다면 요한의 영이 하늘에 올라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하늘의 광경을 봅니다. 계 4장은 요한이 본 하늘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정리해봅니다.
2절에서 우선 보좌가 있고 그 보좌에 앉으신 이가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의 모습을 자기가 본대로 설명합니다. 3절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그 빛나고 아름다움을 어떻게 표현할까, 세상에서 귀하다는 보석으로 비유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나름대로의 뜻이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지개가 있답니다. 하늘에 무지개가 있다니! 영계에도 비가 오고 태양이 있는가? 무슨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성경에서 ‘무지개’ 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창 9 : 12 - 13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무지개라고 하면 언약이 생각납니다.
이어서 봅니다. 4절 “또 보좌에 둘려 이십 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 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하나님 보좌에 24 장로가 둘러 있습니다.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아 있답니다. 5 - 6절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하나님 보좌로부터 나오는 소리를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라고 표현합니다. 옛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시내 산 앞에 모으고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그 광경이 너무 두렵고 놀라워 백성이 사양하고 모세에게 대신 듣고 와서 전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출 20 : 18 - 19 “뭇 백성이 우뢰와 번개와 나팔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지금 요한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영으로 올라가 보고 듣고 있습니다. 정말 두렵고 떨리는 일 아닙니까?
그런데 보좌 앞에 일곱 등불이 있다고 하면서 그것을 설명해줍니다.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옛날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성막을 짓습니다. 자기 생각대로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보여주신 대로 만든 것입니다. 출 25 : 8 - 9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찌니라” 당시 모세는 시내 산에 올라 하나님과 만납니다. 그리고 두 가지를 받아 내려옵니다. 하나는 잘 아는 대로 율법(십계명)이고 또 하나는 성막제도입니다. 모세는 산에서 하나님 계신 하늘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본 대로 땅에 하나님의 처소인 성막을 짓습니다. 하나님 앞에 특별한 일곱 영을 무엇으로 표현하여 성막에 두었을까 생각해봅니다. 31절 “너는 정금으로 등대를 쳐서 만들되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받침과 꽃을 한 덩이로 연하게 하고” 그렇습니다. 일곱 금촛대가 있는 등대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말씀합니다. 계 4 : 6절 다시 봅니다.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하나님 보좌와 유리 바다, 네 생물과 많은 눈, 도대체 무엇일까요?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 무엇을 보고 이렇게 표현하였을까요? 그리고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답니다. 네 생물의 모습은 뒤에 설명이 나옵니다. 7절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세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네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정리하면 사자, 송아지, 사람 그리고 독수리를 빗대어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의미를 담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옛날 선지자 에스겔도 하늘을 보았습니다. 역시 네 생물을 보았지요. 겔 1 : 10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우편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좌편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그런데 네 생물 앞뒤에 눈이 가득하답니다. 이렇게도 말씀합니다. 계 4 : 8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여기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하는데 도대체 ‘눈’이 무엇일까요? 그냥 눈만 초롱초롱 주변에 가득하다면 참으로 괴이하지 않습니까? 귀신도 아니고. 계 5 :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눈이 무엇입니까? ‘영’을 ‘눈’이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많은 눈 곧 영들을 거느린 네 생물은 다른 영들과는 좀 다른 특별한 영, 천사입니다. 달리 이야기한다면 천사(영)들을 거느리는 천사장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네 생물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밤낮 쉬지 않고 찬송을 드립니다. 뭐라고요?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합니다.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우리가 ‘재림’을 이야기하면 예수님만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이 오십니다. 죄 때문에 떠나셨던 하나님이 모든 죄를 도말하고 사단 마귀를 잡아가두고 이 땅에 다시 오십니다. 그래서 네 생물이 찬송합니다.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예, ‘장차 오실 자’이십니다. 이것을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재림 때 예수님만 오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도 오십니다. 그리고 또 오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알아볼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거든요. 요 14 :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예수님 오실 때 혼자 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옵니다.
그런데 네 생물만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아닙니다. 계 4 : 10 - 11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그렇습니다. 하나님 보좌 주변에 있던 24장로가 창조주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자기네가 가지고 있던 면류관을 하나님 보좌 앞에 던지며 찬송과 영광을 돌립니다. 하물며 이 땅에 사는 우리 인생들이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림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떠났고 하나님이 없다고까지 떠듭니다. 시 14 : 1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그야말로 무례의 극치입니다. 그런 경거망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계 4장을 통해서 우리는 요한이 보았던 하늘(영계)을 잠시 보았습니다. 성경에는 하늘을 보았던 선지자들의 이야기가 군데군데 나옵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성경 등장인물 가운데서는 아마도 모세가 처음이지 않는가 싶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당신 거할 처소를 마련하라고 지시하십니다. 하나님 거하실 처소는 하늘에 있는 것을 보고 만든 것입니다. 히 8 : 5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하셨느니라” 모세는 시내 산에 올라 두 가지를 받아 내려왔다고 했습니다. 율법과 성막입니다. 산에서 하나님 계신 하늘을 본 것입니다. 그 본 것을 성막으로 지은 것입니다. 그것을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뿐만 아니라 선지자 이사야를 비롯해서 에스겔 다니엘 스가랴 등등 그리고 잘 알고 있듯이 사도 바울도 보았습니다. 본인이 고백하기를 놀라운 경험이라고 했습니다. 고후 12 : 1 - 4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본인이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그럽니다. 분명 영으로 다녀온 것이지요. 어디에? 셋째 하늘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낙원’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또 생각할 것은 ‘셋째 하늘’입니다. 왜 셋째 하늘입니까? 그렇다면 첫째 하늘은 무엇이고 둘째 하늘은 무엇일까요? 이것을 지구 대기권 안, 태양계 그리고 우주, 이런 식으로 설명한다면 그야말로 코미디입니다. 하늘의 언어를 모르는 것이지요. 그러니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언어를 배울 때 순서가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말을 배울 때 입에서 문장부터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아빠’ ‘엄마’ ‘맘마’ 하듯이 간단한 단어부터 배우지요. 하늘의 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에서 ‘물’을 이야기했는데 ‘물’이 하늘의 언어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런 것부터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차차 배울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많은 선지자들이 하늘을 보았습니다. 그 본 것을 나름대로 성경에 기록해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을 가장 잘 아는 분이 누구입니까? 본래 거기 계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어디서 오셨습니까? 하늘에서. 본래 거기 계셨던 분입니다. 누구보다 하늘을 잘 아시지요. 그래서 하늘을 이야기해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 백성이라 자부하던 이스라엘, 유대인들이 알아듣습니까? 뭐라고 하죠? 요 6 :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그래서 결과는 66절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제자들 가운데서도 그러할진대 가르친다는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오죽하겠습니까? 권위와 전통만 앞세우고 으스대며 다니는 사람들이 웬 허술한 젊은 녀석이 나타나서 천국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요 3 : 31 - 32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우리 예수님이 하늘에서 오셔서 그 하늘에서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받는 이가 없다고 하지요. 34절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무엇을 전했습니까? 앞에서 보았듯이 ‘장로들의 유전’ 곧 ‘사람의 계명’을 전했습니다. 양측이 가지고 있는 성경은 똑같은데 전하는 말이 다릅니다. 왜요? 한 쪽은 하늘의 언어로 다른 한 쪽은 땅의 언어로 전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가지고 있던 성경은 구약성경입니다. 오늘 우리는 신약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새 언약입니다. 나아졌습니까? 전하는 말씀이 하늘의 언어일까요, 땅의 언어일까요?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네 아버지가 하나님이라고 굳게 믿고 신앙했습니다. 그야 당연하지요. 수천 년 그렇게 살아왔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 생각은 달랐습니다. 요 8 : 41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자기네 아버지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그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대꾸하십니다. 44절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한 마디로 ‘너희 아버지는 하나님이 아니고 마귀다,’ 그 말입니다. 믿어집니까? 왜 이런 결과가 되었는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이라고 찰떡같이 믿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 하나님이 이렇게 질문하신다면 어떻게 할까요? ‘내가 왜 네 아버지냐?’ 나는 너 같은 자식 두어본 적이 없다 하시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우리는 그 답을 찾아야 하고 자신 있게 대답해드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기적>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름의 상처를 한두 개는 지니고 살아갑니다. 평소에는 잊고 있다가도 어떤 계기가 생기면 도드라져 나타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냥 그것이 성격으로 굳어져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때로는 유난히 아프게 가슴을 후벼 파는 경우도 생깁니다. 본인은 왜 그런지 모르게 당할 수도 있습니다. 사건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니까요. 그러나 그것이 시간이 흐르며 갈고 닦여 성격이 되어 있는 줄 모르는 것입니다. 우연한 기회에 사건을 회상하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숨어있던 이야기가 입 밖으로 흘러나오면서 희미하던 것이 또렷해지고 어둔 그늘에서 가시처럼 찌르던 것이 정체가 드러나 제거되는 것입니다. 비로소 자유롭게 됩니다.
아비는 아들에게, 아들은 아비에게 오해를 품고 살았습니다. 아들의 눈을 마주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안함에 묻혀 말도 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무관심(?)을 이기려 그래도 관심과 칭찬을 듣고 싶어 나름의 노력을 하며 살았습니다. 서로 엇갈린 마음으로 오랜 시간을 견뎌온 것입니다. 모녀를 잃은 가정 두 부자만 남아서 살고 있는데 적막만 흐르고 있습니다. 아마도 함께 식탁에서 만나는 기회도 매우 드물었을 것입니다. 그나마 그런 기회가 있어도 주고받는 대화는 지극히 제한적입니다. 그냥 먹고 나서 제각각의 일로 돌아섭니다. 그렇게 ‘준경’은 초등학교를 나와 중학교를 지나 어느새 고등학생이 되어 있습니다.
외딴 산골짜기에 놓여있는 마을, 길이 없습니다. 유일한 길이 철로입니다. 그 길을 따라 외부로 통합니다. 시내 장에도 가고 아이들은 학교를 다닙니다. 기차가 마을을 지나가는데 기차역은 없습니다. 주민들은 기차를 타려고 해도 그 철로를 걸어 다른 기차역으로 가야 합니다. 철로가 바로 그 마을 주민들의 생명길입니다. 그러나 종종 죽음의 길이 되기도 합니다. 가는 길에 터널이 4개, 다리가 3개입니다. 행여 그 중간에서 기차를 맞닥뜨리면 오도 가도 못합니다. 그러니 생명을 걸고 다녀야 합니다. 기차 시간을 아는 준경이 아이디어를 내 터널 입구에 기차 지나가는 경고음이 들리게 해주는 장치를 만들어 달았습니다. 큰 도움이 되었지요. 그러나 시간표에 나타나지 않는 화물차의 통행을 예측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마을에 기차역을 만들어 주십사 청원 글을 보냈습니다. 고등학교 들어와서도 계속됩니다. 벌써 편지를 보낸 것도 50 통이 넘습니다. 물론 수 년 동안 답은 없습니다. 도대체 청와대에서 보기나 하는가? 어느 날 동급생 ‘라희’가 뭘 그렇게 열심히 쓰는가, 몰래 편지를 훔쳐서 봅니다. 고등학생의 편지 맞아?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남다른 행동으로 눈에 띄었기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던 중입니다. 이런 편지를 누가 읽어나 주겠어? 하는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맞춤법을 가르쳐주면서 편지를 새로 쓰게 합니다. 그렇게 둘은 가까워집니다.
다른 건 몰라도 수학과 과학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담당 선생님이 간파합니다. 특별한 관심과 배려를 해줍니다. 더구나 마을에 기차역을 세우려 청와대 청원 글까지 올리고 있습니다. 대통령을 만난다면 보다 쉬워지리라 생각하고 장학퀴즈를 지나 대통령상이 부상으로 걸린 전국 수학경시대회에 출전하도록 장려합니다. 준경의 목적은 부상이 아니라 대통령을 만나 직접 기차역 부설을 청원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태윤’에게는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오로지 주어진 일에만 충직한 일꾼입니다. 짐작컨대 가지고 있는 상처로 인해 더욱 일에만 집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준경의 하는 짓이 도무지 마뜩잖습니다.
준경은 자기가 하는 일마다 되는 것이 없고 그나마 사고로 이어지기도 하는 것에 마음이 늘 위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의 전진을 스스로 막습니다. 그 때 라희의 적극적인 공략(연애 공략이기도 한 듯)과 과학 선생님의 적극적인 지원이 힘이 됩니다. 생각 외로 일들이 풀려나가지요. 간이역의 건설이 허락은 되었지만 재정 지원은 없습니다. 결국 준경이 나서 마을 사람들의 힘으로 건설이 됩니다. 준경은 선생님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까지 길이 열립니다. 굼뜬 아버지도 되어가는 상황에 비로소 적응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숨겨두었던 아픔을 풀어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화해가 이루어집니다. 그 때까지 준경의 마음에는 늘 누나가 곁에 있었습니다. 가족의 사랑은 그 누나의 마음으로 지켜졌습니다. 부자는 화해의 눈물을 주고받습니다.
하나의 사고, 받은 상처, 가지게 된 생각 등등 우리는 함께 사는 가족이라도 서로가 매우 다르게 받아들이고 느끼며 생각하고 결정하며 살아갑니다. 그것을 한 자리에 풀어놓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프고 두렵습니다. 아마 평생 그렇게 안고 살다 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가족이 모두 편안하게 행복하게 살려면 늘 열린 마음과 자세가 필요합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자식이 어려서부터 가족들 사이에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유익합니다. 아무리 가까워도 대화라는 것이 쉽게 금방 나오는 것이 아니니 말입니다. 영화 ‘기적’을 보았습니다. 이 제목도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합니다. 기적(汽笛)일 수도 있고 기적(奇蹟)일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ET>
낯선 것에 대한 반응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경계심과 호기심입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어른들은 주로 경계심을 갖습니다. 인생의 경험으로 인생이 쉽지 않다는 것을 경험해온 결과일 것입니다. 반면 어린이들은 호기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직 아픈 경험이 많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한창 배움에 대한 열망이 크기에 그럴 수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에게는 이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합니다. 문제는 어느 때 어느 것이 필요한지 선택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일단은 경계하고 보는 것입니다.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이 먼저이니까요. 무턱대고 달려들기보다는 먼저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 살아온 경험에서 터득한 지혜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여러 가지 위험으로 가득하니까 말입니다.
대기권 밖 우주에서 무엇인가 지구로 들어왔다고 상상해봅니다. 우리들의 태도는 어떻게 나타날까요? 호기심? 경계심? 이것을 주제로 여러 가지 영화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호기심보다는 경계심으로 만든 이야기들이 더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영화는 모두 어른들이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기야 아이들이 어떻게 영화를 제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냥 상상하고 이야기나 할 정도이지요. 아무튼 이 두 가지는 우리 인간의 문화와 문명을 만들고 발전시키는데 공헌을 해왔습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여러 가지 혜택이 바로 그 산물 아니겠습니까? 한편으로는 지켜야 하고 또 한편으로는 개발하며 개척해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역사는 진행되었고 앞으로도 발전해나갈 것입니다.
아마도 신비한 행성에 대한 탐사를 하려고 왔을 것입니다. 진행 중에 그만 자기네 우주선이 노출되어 부랴부랴 떠납니다. 서두르다가 한 녀석(?)을 남겨두고 떠납니다. 조심조심 사람들을 피해 마을로 내려와 어느 집 창고로 숨어듭니다. 그것을 그 집 소년, ‘엘리엇’이 발견합니다. 외계인의 해괴한 모습에 깜짝 놀라지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숨겨줍니다. 그리고 형인 ‘마이클’에게 비밀이라고 말해줍니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도깨비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받아주지 않습니다. 실물을 보고 나서 함께 동조해줍니다. 어린 동생 ‘거티’가 까무러치듯 놀라 소리 지르려는 것을 간신히 막습니다. 그렇게 형제들은 한 마음으로 동조하여 보호해줍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의사소통입니다. 상대방을 알아야 도울 수도 있습니다. 왜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 무엇이 필요한지 모르는 상태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단지 경계의 대상일 뿐이지요. 서로 이름부터 알려줍니다. 상대방에게는 ‘이티’라고 이름까지 지어줍니다. 이티에게는 남다른 능력이 있음도 발견합니다. 시간이 흐름에 특히 엘리엇과 이티는 매우 친밀한 사이가 됩니다. 이티가 잡동사니 속에서 전화기를 보더니 의사표시를 합니다. 집에 연락을 하고 싶다는 뜻이지요. 알아차린 엘리엇이 통신장비를 구성할 수 있는 재료들을 가지고 형제와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집을 탈출(?)합니다. 그리고 이티를 자전거에 태워 우주선이 도착했던 숲으로 달려갑니다. 커다란 둥근 달을 가로질러 하늘을 날아서 도착합니다.
한편 밖에서는 야단이 났습니다. 국가 항공우주국 직원들이 많은 장비를 동원하여 엘리엇의 집으로 들이닥칩니다. 비로소 외계인의 위치를 추적하여 찾은 것입니다. 숲속에서 지쳐 쓰러져버린 엘리엇과 이티를 발견합니다. 집으로 데리고 와서 치료를 합니다. 엘리엇은 금방 좋아졌는데 이티는 점점 악화됩니다. 엘리엇이 걱정합니다. 죽으면 저 사람들이 해부해서 연구 자료로 사용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을 해도 되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결국은 사망 판정을 내리고 모두 장비 철수를 진행합니다. 곁을 지키던 엘리엇이 슬픔에 젖어 낙심 중에 있다가 병실에 있던 조그만 화분을 봅니다. 이티가 전에 죽었던 꽃을 살렸던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 시들어 있는데 그 꽃에 다시 생기가 도는 것이 보입니다.
사람들이 방심한 틈을 타서 마이클 형에게 차를 집 뒤로 해서 붙이라고 부탁하고 이티를 빼냅니다. 마이클은 친구들에게 연락하여 어디로 자전거를 대기시키라고 합니다. 쫓고 쫓기는 행진이 진행됩니다. 집 주위에 모여 구경하던 사람들도 따라서 달립니다. 경찰차들도 뒤쫓습니다. 조그만 마을이 요란해집니다. 아이들의 사정을 알게 된 엄마도 막내 거티를 데리고 차로 뒤쫓아 갑니다. 그 사이 이티는 본래의 생명을 회복합니다. 사람들이 바짝 다가온 찰라 아이들의 자전거가 하나 둘 하늘로 떠오릅니다. 그렇게 자전거들이 석양의 태양을 가로지릅니다. 그리고 땅거미 진 숲속으로 달려갑니다. 이미 우주선이 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티와의 석별의 시간입니다. 거티와 마이클 그리고 엘리엇. 생명이 있으면 마음도 있는가요? 이별은 아픔이고 새로운 만남의 기대를 가집니다. 이티도 마찬가지겠지요. ‘항상 네 곁에 있을게.’ 말을 남기고 이티는 우주선에 오릅니다. 우리의 꿈을 담은 멋진 장면을 기억합니다. 보름달을 가로지르고 석양의 태양을 가로지르던 자전거 행렬,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습니다. 하늘로 향하는 우리의 꿈이 아닐까 싶습니다. 얼마나 멋진 표현입니까? 영화 ‘E.T.'( E.T. - The Extra Terrestrial)를 보았습니다. 1982년 작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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