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3384]王勃왕발詩 送杜少府之任蜀州
출전= 《全唐詩 卷56 王勃》
送杜少府之任蜀州
촉주에 부임 가는 두소부를 전송하며
왕발(王勃)
城闕輔三秦(성궐보삼진)
三秦에 둘러싸인 장안성에서
風煙望五津(풍연망오진)
바람과 안개 속 五津을 멀리 바라본다
與君離別意(여군이별의)
그대와 이별하는 마음이야 괴롭지만
同是宦遊人(동시환유인)
우리는 모두 외지로 떠도는 관리인 것을
海內存知己(해내존지기)
海內에 나를 알아주는 知己가 있으니
天涯若比鄰(천애약비린)
天涯에서도 이웃과 같으리니
無爲在歧路(무위재기로)
갈림길에서 헤어질 때
兒女共霑巾(여아공점건)
아녀자처럼 수건을 적시지는 마세나
送杜少府之任蜀州
송두소부지임촉주
- 王勃 (650년 ~ 675년) -
城闕輔三秦 성궐보삼진
風煙望五津 풍연망오진
與君離別意 여군이별의
同是宦遊人 동시환유인
海內存知己 해내존지기
天涯若比鄰 천애약비린
無爲在歧路 무위재기로
兒女共霑巾 아녀공점건
친구를 蜀(촉)나라로 떠나 보내며.
성궐은 삼진에 둘러싸여 있는데,
바람과 안개 속에서 오진을 바라보고 있네.
그대와 더불어 이별할 생각을 하니 안타깝지만,
우리는 모두 지방의 벼슬아치 신세 아닌가.
세상에 나를 알아주는 친구가 있으니,
하늘 저 끝에 있어도 가까운 이웃과 같다네.
이별의 갈림길에서
아녀자처럼 수건에 눈물을 적시지는 마세.
이 시는 벼슬살이를 위해 떠나는 친구를 전송하며 지은 것으로,
첫째 연에서는 경치를 묘사하며 왕발이 장안에서 촉으로
떠나려는 두소부를 전송하고 있음을 설명해주고 있다.
이후는 떠나는 친구를 안위하고 위로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남조(南朝)의 유명한 문학가 강엄(江淹)은 「별부(別賦)」에서
여러 종류의 이별을 묘사했는데, 모두 사람이 정신을 잃은 정도로
슬픈 이별만을 언급했다. 고대의 대부분의 송별시는 모두 이처럼
슬프고 비통한 감정을 노래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왕발의 이 작품은 슬픔 감정을 씻어버리고,
의경(意境)을 넓혔으며 음조가 밝아 독특하고 뛰어난 격조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작품은 대략 시인이 20세 전 패왕부(沛王府)에서
수찬(修撰)을 지낼 때 만든 것으로 추정되나 확실하지는 않다.
[ 단어 설명 ]
杜少府(두소부) : 두씨 성을 가진 현위(縣尉)라고만 알려져 있다.
자세한 생애는 모른다.
三秦(삼진) : 장안(長安) 부근의 관중(關中) 땅을 가리키는 것으로
항우(項羽)가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이 땅을 옹(雍)·새(塞)·적(翟) 세 나라로
나누어 각각 왕을 세웠기 때문에 삼진이라 칭한 것이다.
五津(오진) : 사천성 민강(岷江)의 다섯 개 나루터로
백화진(白華津)·만리진(萬里津)·강수진(江首津)·
섭두진(涉頭津)·강남진(江南津)인데, 여기서는 촉주를 지칭하는 것이다.
宦遊(환유) : 지방에 가서 벼슬살이 하는 것을 말한다.
海內(해내) : 중국 전체를 일컫는 말이다.
比鄰(비린) : 이웃을 의미한다.
[ 작품내용 설명 ]
첫째 연은 경치를 드러내고 있는데,
첫 구는 장안 주위를 삼진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고,
둘째 구는 두소부의 임지인 촉주를 묘사하는 것으로
왕발이 장안에서 사천으로 떠나는 두소부를 전송하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바람과 먼지[風煙]’ 속에서 ‘바라본다[望]’는 것은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 진과 촉 지역을 한데 묶는 역할을 하고 있다.
장안에서 촉을 먼지바람이 이는 희미한 속에서 바라본다는 것은
이별을 슬퍼하는 시인의 감정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다.
둘째 연의 첫 구는 첫째 연을 이어 석별의 감정을 드러내며
토로하려 하지만 할 수 없는 답답한 심정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다 다음 구에 갑자기 느긋해지면서 이번 이별은
단지 벼슬살이를 하기 위함이니 무엇을 슬퍼하겠느냐고
위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연에서는 이러한 위로의 심정이 한층 더 나아가고 있는데,
조식(曹植)의 「증백마왕표(贈白馬王彪)」의 ‘장부가 천하에 뜻을 두면,
온 세상이 오히려 이웃이 되리라. 은혜와 사랑이 온전하면,
멀리 나뉘어 있어도 나날이 친해지리
[丈夫志四海, 萬里猶比隣。恩愛苟不虧, 在遠分日親。].’에서
것으로 보이지만, 스스로를 위로하는 내용을 압축적으로 개괄하였고
표현도 뛰어나 만고의 절창으로 인구에 회자하고 있다.
마지막 연은 셋째 연을 이어 두소부를 권면하고 위로하는 것으로
작품을 끝맺고 있다.
‘재기로(在岐路)’는 시제상의 ‘송(送)’ 자를 드러내고 있다.
고대인들의 큰 길의 갈림길에서 주로 전송하고
이별을 했기 때문에 시에서도 자주 ‘기로(岐路)’를 써
이별할 때의 대칭으로 사용해왔다.
[ 시인에 대해서 ]
왕발의 자는 자안(子安)으로, 강주 용문(絳州 龍門,
지금의 샨시성[山西省] 허진[河津]) 사람이다.
6세 때에 이미 문장을 지을 수 있었고,
9세 때에 안사고(顔師古)가 주를 단 『한서(漢書)』를 읽고
그중의 오류를 지적하여 『지하(指瑕)』 10권을 지었다.
용삭(龍朔) 원년 661년 12세 때에 신동으로 조정에 추천을 받았고,
인덕(麟德) 원년 664년 15세 때에 대책(對策)을 올려
조산랑(朝散郞)의 벼슬을 제수받았다. 황족 중에 패왕(沛王)이
특히 그의 재주를 흠모하여 왕부로 초청해서 편찬 사업을 맡기자
「평대초략(平臺鈔略)」 10편을 지었다.
당시 황족을 비롯한 상류 사회에는 투계 놀이가 성행하고 있었는데,
왕발은 「격영왕계문(檄英王雞文: 영왕의 투계놀이를 비판한다)」를
장난삼아 지었다. 그런데 후에 이 글을 읽은 고종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관직에서 쫓겨나 강한(江漢)으로 떠나게 되었다.
이후 그의 부친이 교지령(交趾令, 지금의 베트남 북부)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자, 상원(上元) 2년(675)에 그곳으로 부친을 찾아뵙기
위해 길을 떠났다. 11월에 남해(南海, 지금의 광동성[廣東省]
광저우[廣州])에 도착해서 바다를 건너다 물에 빠져 놀라 죽었다.
그때의 나이 26세였다. 초당(初唐) 시기의 걸출한 시인으로
양형(楊炯)·노조린(盧照隣)·낙빈왕(駱賓王)과 함께
초당사걸(初唐四傑)로 불린다.
『왕자안집(王子安集)』16권이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