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김기택
텔레비전을 끄자
풀벌레 소리
어둠과 함께 방 안 가득 들어온다
어둠 속에서 들으니 벌레 소리들 환하다
별빛이 묻어 더 낭랑하다
귀뚜라미 여치 같은 큰 물음 사이에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다
그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한다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드나드는
까맣고 좁은 통로들을 생각한다
그 통로의 끝에 두근거리며 매달린
여린 마음들을 생각한다
그 통로의 끝에 두근거리며 매달린
여린 마음들을 생각한다
브라운관이 뿜어낸 현란한 빛이
내 눈과 귀를 두껍게 채우는 동안
그 울음소리들은 수없이 나에게 왔다가
너무 단단한 벽에 놀라 되돌아갔을 것이다
하루살이들처럼 전등에 부딪쳤다가
바닥에 새카맣게 떨어졌을 것이다
크게 밤공기 들이쉬니
허파 속으로 그 소리들이 들어온다
허파도 별빛이 묻어 조금은 환해진다
<시 읽기>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김기택
김기택 시인의 시집 『소』에는 시집의 제목과 같은 자굼 <소>가 수록돼 있습니다. 그는 여기서 소의 큰 눈망울에 자신의 모든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실제로 몸이 고운 암소는 말할 것도 없고 뿔이 억센 황소까지도, 이제 막 일어선 어린 송아지에서부터 나이 지긋한 늙은 소까지도 그들의 눈은 너무나 크고, 너무나 순하고, 도 때론 너무나 무심해 보여서 우리들은 그 앞에서 서서 다른 마음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순함의 힘, 무심함의 힘이 이들 속에 있습니다.
이런 내용의 시가 들어 있는 김기택 시인의 시집 『소』를 읽다가 마음이 강하게 끌리는 한 편의 작품을 만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위의 <풀벌레들이 작은 귀를 생각함>입니다.
위 시를 읽으면 어린 시절부터 잘 알던 풀벌레들의 이름이 떠오릅니다. 귀뚜라미, 베짱이, 여치, 사마귀, 방아깨비, 때까치, 풀무치, 메뚜기 등과 같은 이름들 말입니다. 그러나 풀벌레들이 이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너무나도 빈약하여 금세 말문이 막히고 맙니다. 그러나 풀벌레들의 이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너무나도 빈약하여 금세 말문이 막히고 맙니다. 그렇다고 하여 풀벌레들에 대한 애정과 상상력도 가난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그들을 총칭하여 ‘이름 모를 풀벌레’라고 부르고, 풀섶 가득한 풀벌레의 세상을 상상합니다.
김기택 시인은 그 이름 모를 풀벌레들에게 귀와 마음을 열었습니다. 귀를 열면 귓속에 풀벌레들이 세상이 들어오고, 마음을 열면 마음속에 그들이 세상이 살아나며 펼쳐집니다. 이렇듯 우리들의 몸을 진정 다른 존재에게 열어놓을 때 그 열어놓은 공간에는 대단한 신비가 깃듭니다.
늦은 여름부터 가을이 깊어갈 때까지, 밤의 주인공은 어둠과 별 그리고 달과 풀벌레입니다. 낮의 시간이 사람과 문명의 소리로 가득 찬 시간이라면, 밤의 시간은 배경으로 없는 듯 물러났던 이 자연들이 그들의 존재를 전면으로 드러내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밤이 되면 사람들은, 낮의 시간에 어둠과 별 그리고 달과 풀벌레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이 뒤로 조용한 배경이 되어 물러나야 합니다. 이것이 그들에 대한 예의이고 그들과 공생과 상생의 삶을 사는 일이라고 말하면 너무 윤리적인 냄새가 나는가요?
위 시에선 밤의 시간에까지도 텔레비전이라는 인간과 문명의 소리에 매달렸던 시인이 불현 듯 그 소리를 꺼버립니다. 그러자 방 안 가득히 어둠과 풀벌레들의 소리가 밀물처럼 밀려옵니다. 인간이 소리와 욕망을 거둬내자, 그의 빈방 속으로, 더 정확히 말하면 그의 마음의 빈방 속으로 밤의 주인공들인 어둠과 풀벌레와 달과 별들이 찾아온 것입니다. 시인은 이런 밤의 주인공들이 찾아든 방 안에서 환한 기운을 느낍니다. 텔레비전에 눈멀었던 그의 눈에 어둠이 보이고, 별빛이 보이고, 달이 보이고, 풀벌레들이 보인 것입니다. 이들을 볼 수 있는 그이 눈은 밝아진 것이고 밝아진 그의 눈은 이들이 존재에서 환한 기운을 느낀 것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귀뚜라미, 여치 등과 같은 풀벌레들이 큰 울음 사이에서 나무 작아 들리지 않는 풀벌레들이 소리와 그들의 작은 귀에 대해 특별히 마음을 쏟습니다. 풀이파리를 간신히 끌어안거나 그 가장자리에 몸을 기대고 우는, 너무 작아 보이지 않고, 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풀벌레들을 그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작은 풀벌레들도 목소리가 큰 귀뚜라미나 여치처럼 모두 밤새워 짝을 찾고 우는 진지한 생명들입니다. 그들도 화려한 날개를 양쪽에 달고 양 날개를 악기의 현과 활처럼 조화롭게 부비면서 그들만의 노래를 불러대는 숲속의 가수들입니다. 그들도 풀섶 어딘가에 아늑한 집을 짓고 그들의 작은 목소리와 귀로 주변을 살펴가며 그들을 닮은 새끼들을 낳고 돌아보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시인이 말했듯이 “발뒤꿈치처럼 두꺼운” 우리의 귀는 그들의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우리를 항하여 그들의 작은 소리가 수도 없이 다가왔을 터이나 우리가 지닌 몸과 마음의 벽은 너무도 단단하여 그들의 소리를 밀어버리고 맙니다. 스물네 시간 동안 우리와 함께 동침하는 텔레비전과 문명의 유혹 앞에서 우리의 오감과 영혼은 변질되어 작은 풀벌레들이 소리를 들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김기택 시인은 이런 우리들 앞에서 번번이 외면당한 작은 풀벌레들이 소리와 그 작은 귀를 생각하며 살생을 한 자처럼 죄의식까지 느낍니다. 그 풀벌레들이 소리는 매일 밤 우리를 찾아들다 “하루살이들처럼 전등에 부딪쳤다가/바닥에 새까맣게 떨어졌을” 것이라고 그는 상상하며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늦었지만, 그는 위 시에서 텔레비전과 문명이 위험한 빛을 경계하며 밤의 시간만은 그들에게 통째로 내어주기로 합니다. 그렇게 내어준 밤의 무대에서 어둠과 달과 풀벌레 그리고 별들이 제자리를 찾고 시인은 그 밤의 풍경을 심호흡하듯 들이쉽니다. 시인은 허파 속까지 들어온 밤의 풍경을 몸에 담으며 캄캄 했던 자신의 몸에도 그 별빛이 묻어 조금은 내부가 환해졌다고 말합니다.
밤의 시간엔 우리 인간들이 보다 겸허해져야 합니다. 조용히 없는 듯 배경으로 물러나 밤의 주인공들에게 자리를 내어주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마음껏 노래하며 춤추도록 해야 합니다. 이러한 노래와 춤의 가장 훌륭한 감상자는 자신을
‘무無’ 혹은 ‘허虛’로 만들고 그 위에서 가수와 춤꾼이 자신들의 멋을 마음껏 드러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음악을 감상할 때도 자신을 무의 세계로 내려놓으면 음악은 그 위에서 작은 울림까지도 생생히 살아납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럼으로써 우리들의 온 존재는 환하게 밝아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교만한 자아가 개입하고, 그 개인이 심할수록 음악은 왜곡되고 빈약하게 울리며, 우리의 마음도 그와 닮아버립니다.
저는 위 시에 기대어, 인간으로서 자아우월감에 사로잡혀 우리의 마음이 비만해지면 저 작은 풀벌레들과 그들이 작은 귀를 생각하라고 권유하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또다시 인간으로서 한없는 절망감에 빠져 생을 포기할 것 같을 때도 포기할 것 같은 때도 저 밤의 풀섶에서 우는 작은 풀벌레들의 소리와 그들의 작은 귀를 생각하라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자아우월감에 빠져서 다른 소리를 듣지 못할 때, 저들의 존재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몸과 마음은 부드럽게 열릴 것이고, 우리가 절망감에 빠져 생을 지고 가기 어려울 것 같을 때도, 저 소리를 떠올리면 생명이 산다는 일의 간절함을 느끼며 힘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밤이 되면, 사람의 소리와 기척에 풀벌레들이 놀라지 않게 조용히 우리의 존재를 아래쪽으로 내려놓고, 그들이 향연을 마음껏 즐겨봅시다. 그들이 풀섶에서 벌이는 잔치는 우리들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정효구, 『시 읽는 기쁨』, 작가정신,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