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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은 열렸다. 6월 4일 밤, 총소리 세 방이 밤하늘에 울렸다."
2008.6.4 대학 잇단 동맹휴업…깃발 들고 촛불 대오
★*…연일 내린 빗속에서도 촛불은 꺼지지 않았다. 촛불은 대학들의 잇단 ‘동맹휴업’ 결정 등에 힘입어 5일 시작되는 ‘72시간 연속 국민행동’과 10일로 예정된 ‘100만 촛불항쟁’으로 확산되고 있다. 경찰은 4일부터 계속되는 비 소식에 조그만 희망을 거는 분위기다. 경찰 관계자는 “아무래도 비가 내리면 집회 참가자 수가 줄어들지 않겠느냐”며 “지금 같은 상황에선 기상청의 예보 말고는 기댈 곳이 없다”고 푸념했다...길윤형 하어영 송경화 기자 charisma@hani.co.kr
정말 눈물나네요... 피흘리는 사람들 쓰러지고 다치는 사람들... 왜 우리나라 시민들에겐, 무기도 안들고 있는 시민들에겐... 피까지 흘리게 만들고... 여자분들 머리를 짓밟고... 체포 연행해서 두들겨 패라고 시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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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창의토적소> 발표
1906. 6. 4
최익현 |
1906년 6월 4일 최익현이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각지의 유생 및 의병들을 집결시킨 가운데 <창의토적소 倡義討賊疏>를 올려 의거의 심정을 피력하고, 격문을 각 고을에 보내 호응을 촉구했다. 최익현은 1873년 승정원 동부승지로 임명된 뒤 사직소를 올려 흥선대원군의 정치를 정면으로 공격했다. 또한 1876년 1월 일본과의 통상조약 체결이 추진되자 도끼를 지니고 궁궐 앞에 엎드려 화의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그는 <창의토적소>와 함께 작성한 일본정부에 대한 문죄서 <기일본정부 奇日本政府>에서 강화도조약 이래 일본이 저지른 배신행위를 16조목에 걸쳐 열거하면서 조선과 일본, 나아가 동양 전체의 평화를 위해 하루 속히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최익현이 이끄는 의병대는 태인읍을 무혈점령하고 6월 5일 정읍에 도착했다. 그러나 전주관찰사 한진창이 이끄는 전라북도지방진위대의 포위공격을 받아 임병찬·고석진 등 12명과 함께 붙잡혔다. 최익현은 일본군사령부로 넘겨져 쓰시마 섬[對馬島]에 유배되어 1906년 12월 30일 순국했다. |
톈안먼 사건 발발
1989. 6. 4
후야오방 |
1989년 6월 4일 중국 정부가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를 무력진압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중국의 민주화 시위는 1989년 4월 15일 급진개혁주의자로 학생들의 추앙을 받던 후야호방[胡耀邦] 전 당총서기가 심장마비로 죽으면서 시작되었다. 베이징대학교[北京大學校] 학생 수천 명은 톈안먼 광장에 집결해 후야오방의 재평가를 요구하며 연좌시위에 들어갔다. 4월 22일 후야오방의 장례식에 수십만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참석하면서 민주화 시위가 본격화되었다. 5월 13일부터 2,000여 명의 학생이 톈안먼 광장에서 단식농성에 들어갔고, 5월 18일 시민·학생 100만여 명이 단식농성 지지시위를 벌였다. 이에 당국은 5월 19일 밤에 베이징에 군을 투입하기 시작했고, 5월 20일 베이징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또한 세계여론의 빗발치는 비난과 경제제재 조치에도 불구하고 반대자들에 대한 체포와 숙청을 단행했다. 톈안먼 사건 이후 중국공산당은 6월 23일부터 2일간 제13기 4중전회를 열고 자오쯔양[趙紫陽] 지지세력을 제거하는 권력개편을 단행했다. 장쩌민[江澤民]이 신임 당총서기에 선출됨으로써 리펑[李鵬]·장쩌민 체제가 정식으로 출범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