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며 감사하라
시편 30편 1~12절
과일의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요? 크거나 보기에 좋은 거? 물론 보기에 좋은 것이 먹기도 좋겠지요. 그러나 과일의 가치는 역시, 당도(糖度)입니다. 맛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맛은, 그리스도인의 당도는 무엇일까요? 감사입니다. 감사하는 믿음만큼 좋은 게 없고, 감사하는 마음만큼 아름다운 게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감사가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감사가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고전 13:1~2).
오늘의 성경 본문 4절에 보면 “…기억하며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기억하며 감사해야 할까요?
1. 여호와의 이름을 기억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40년의 시련을 통해 가나안에 들어왔습니다. 가나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고생이 끝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생각보다 황폐했습니다. 국토 대부분이 곡식이 자라지 않는 황무지였습니다.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작은 소출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감사의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들에게 해방을 주시고 자유를 주신 그 거룩한 이름 앞에 감사했습니다.
다윗은 지금 죽음의 고비에 직면했습니다.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9절).
다윗이 죽을 고비를 맞게 된 것은 그의 죄 때문입니다. 그가 형통할 때 그는 교만했습니다(6절).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향하여 얼굴을 숨기셨습니다(7절). 하나님은 다윗을 향하여 진노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병을 얻었습니다. 이 병은 그를 죽음 직전의 상태로 몰아갔습니다. 다윗은 결사적으로 부르짖었고(2, 8절), 하나님은 뜻을 돌이켜 고쳐주셨습니다. 이에 대한 감사의 찬송이 본 시편의 내용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자비로운 이름 앞에 감사했습니다.
본 시편은 ‘성전 낙성가’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서기 165년 경, 헬라의 강압에 의해 성전은 이방 신들에 제사를 드리는 곳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이때 마카비우스라는 사람이 일어나 헬라 세력을 몰아낸 후 성전을 청결했는데 이를 기념하는 날을 ‘수전절’이라 합니다. 수전절마다 이 시(詩)로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환경 때문에 감사하는 것으로 감사의 조건을 제한하지 않았고, 그들은 하나님 이름 앞에 감사했습니다. 출애굽을 시켜주시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오게 하신 하나님, 죄악 가운데서도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않으신 하나님, 자기의 거룩하신 이름 때문에 용서하시고 자비로움을 허락하신 하나님, 바로 그 이름 때문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 가지 성격을 놓고 항상 감사했습니다.
① 죽을죄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
② 성전을 회복시켜 주시고 아름다운 성전에서 예배케 해 주신 하나님,
③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주시고 소출을 얻게 하신 하나님, 그 여호와의 이름 앞에 감사한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감사의 의미입니다.
근래 들어서 감사하기 곤란한 시기를 맞았습니다. 그러나 환경을 달라도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들을 의의 길로 인도하시고, 성령님을 보내셔서 우리들을 믿음 안에서 살도록 도와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어찌 한시라도 살 수 있습니까?
저는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항상 소망이었고, 희망이었습니다. 가장 어려운 순간에 제 입술에는 하나님 이름이 먼저였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지경에 처해있었을 때에도, 내 인생에서 가장 곤고한 그때에도 저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 하나로 견디었습니다. 그 이름이 없었다면 어떻게 견디어 왔을까요? 그 이름 앞에 서면 항상 감사입니다.
유대인의 신학자 모테 피헤르는 “생각하고 감사하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환경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감사할 조건들이 쌓여 있습니다.
2. 밤의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태반이 광야인 이 땅에 실망했을 것입니다. 이 땅에는 지하자원도 없었습니다. 이스마엘 족속들인 아랍 민족에게는 석유가 무진장으로 저장되어 있는 땅을 주셨지만 이삭의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황무지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땅은 약속의 땅이었고, 젖과 꿀이 흐르도록 수고해야 할 땅이었습니다. 백성들은 눈물 흘리며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 결과 농사법이 발달하고, 과학적은 영농을 하게 되고…, 그들은 지금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성지 순례를 하다보면 같은 황무지인데, 길 건너 이스라엘 농장은 푸른 숲을 이루고, 아랍 땅들은 지금도 먼지만 푸석거리는 황무지였습니다. 아랍 부자들은 석유로 빈둥거리며 놀다보니 게으름뱅이고, 머리에 석유만 들어 앉아 있는 국제 건달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얼마 안 있어 여름에 놀던 배짱이가 겨울에 양식을 얻으려 이 집 저 집 구걸하러 다니는 꼴이 될 것입니다.
지하자원이 고갈된 이스라엘 백성은 교육에 쏟았습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의 노벨상 수상자는 노벨상의 32%를 차지했습니다. 그들의 두뇌가 세계를 지배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국민들은 자동차 같은 것은 생산하지 않습니다. 생산에 봐야 강과 바다, 국토만 오염됩니다. 그들은 비행기를 만들어 팝니다. 비행기 한 대면 자동차 수 만대를 파는 외화벌이가 됩니다. 그러니 수고는 덜하고 소득은 높은 이상적 노동현장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사방에 강한 원주민들이 있었기에 계속 싸웠고, 땅을 지키기 위해 군사를 훈련시켰고, 세계 최강의 군대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들은 최신예 미사일과 핵을 가지고 있습니다. 1967년에 아랍 20여 개 국이 공격해 왔으나 6일 만에 전멸시켜 버렸습니다. 원주민에게 공격당하고, 탈취 당하는 이들이 결국은 세계 강국으로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사방이 적국으로 둘려 쌓인 땅은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더욱 견고하게 했습니다. 수 없이 망하고 흩어져 보았기에 조국이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 조국이 없으면 가장 불쌍한 민족이 된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했고, 여호와에 대한 신앙으로 온 국민이 단결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두움은 큰 스승이었습니다.
다윗은 20대쯤에 국민적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마음속에 교만이 생겼고, 안일함은 슬슬 범죄에 대한 유혹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다가 죽을병에 걸려 고생했습니다. 그에게 죽음의 밤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이 뿌리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밤에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 밤에 하나님을 만났고, 그의 영혼이 깨끗해졌습니다.
성전이 더렵혀진 것을 보며 유대 백성들은 탄식했습니다. 제사드릴 곳도, 기도할 곳도, 죄를 사함 받을 곳도 없어졌습니다. 그들의 자부심은 철저히 부셔졌습니다. 성전이 무너져 버린 그 세월, 그것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고, 절망이었습니다.
밤은 훌륭한 교육장입니다. 밤은 우리의 신앙심을 정결케 하고 정화시킵니다. 우리는 밤의 하나님께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3. 아침의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들.
이스라엘 민족은 철저히 현실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밤의 훈련을 통해 새벽의 귀함을 알게 했습니다. 새벽은 이스라엘 민족 앞에 꼭 온다는 사실을 알게 했습니다.
새벽은 항상 그들에게 희망이었고, 기쁨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저녁으로 시작하여 아침으로 끝나는 시간관을 갖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항상 인생은 어두운 부분으로부터 시작되어 점점 밝아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적 사고이기도 합니다(창 1:4). 그들은 항상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처할 때마다 이 시간이 지나면 내일은 반드시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이유로 유대인들은 놀랍도록 낙천적입니다.
그들은 어떤 역경에 처하더라도 절대 희망을 포기하는 법이 없습니다. 지구상에서 유대인보다 더 고통과 박해와 모욕을 받으며 살아온 민족이 없을 것입니다. 히틀러에게 6백만 명이나 살육을 당할 때는 그야말로 절망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오고 있다는 진리를 믿었습니다. 이 밤은 이방인들이 것이고 히틀러의 것이지만 새벽은 유대인들의 것이며 새벽은 기쁨과 함께 온다는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조상 다윗이 남긴 이 시(詩)를 애송합니다.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11절). 그들은 어둠 속에서 미래를 생산해 내었고, 새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밤이 도래했습니다. 울음이 기숙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밤중에 깨어 외로이 기도하고 울부짖어도 하나님은 묵묵부답이십니다. 하나님은 지난 2천년 동안 당신의 백성들이 기도에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이방인들은 그들에게 비아냥거렸고, 조롱했습니다.
“너희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그런 상황 속에서도 유대인들은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새 날을 얻게 되었고, 지금이 세상에서 가장 잘 사는 영광스러운 조국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물레방아는 찧을 것을 다 찧어내는 위대한 물레방아였습니다.
밤이 오면 누구나 조급해 하고 서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서둘렀다면 지구상에서 사라졌을 것입니다. 밤이 왔을 때 교육의 시간, 고통의 특별 코스를 걷고 있음을 알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합시다. 그러면 새벽이 올 것입니다. 새벽에 기쁨이 도래할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맙시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웃어야 할 날들이 많습니다.
영국의 성경학자 메튜 핸리가 강도를 당한 그 날 저녁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주님 저로 하여금 다음의 것들에 대해 감사하게 해주십시오.
첫째, 전에 한 번도 강도를 만난 적이 없다는 것에 대해.
둘째, 그가 내 지갑을 빼앗아 갔을 뿐 내 목숨은 빼앗기지 않는 것이 대해.
셋째, 그가 내가 가진 것을 모두 다 빼앗아 갔지만 그것이 별로 많지 않는 것에 대해.
넷째, 강도를 한 것이 아니고 강도를 당한 것이 나인 것에 대해”
기억하며 감사하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소출이 예년 같지는 않지만 오히려 더 감사합시다. 감사할 게 없으면 ‘가불’ 감사라도 합시다. 하나님은 참으로 감사의 이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