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영(관재 1884-1934) 은 1901년에 대한 자강회 간사로 참여하였다. 1907년에는 강사가 되어서 개화자강론자의 실력 배양에 역할을 하였다 오세창이 주도한 언론인 대한민보에 풍자화를 연재하였다. 1902년에는 고종 등극 40주년을 맞아 안중식, 조석진, 채용신과 함께 고종 어진을 그렸다. 미술사를 공부하다 보면 왕의 어진을 그렸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당대에는 왕의 어진을 그리는 화가는 최고의 화가였기 때문이다. 1904년에 안중식과 조석진의 문하생이 되었고, 1911년에 조선서화미술회원, 1918년에 서화협회의 발기인이 되었다. 1920년에는 고희동과 함께 서화협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1923년에는 조선미술전람회(조선미전)의 심사위원이 되었다. 안중식과 조석진의 회화를 하나로 통합하였다는 평가를 듣는다. 이들의 그림은 오승업을 추종하여 붓 놀리는 솜씨가 장승업의 언덕을 넘어서지 못하였다는 평을 듣는다. 1909년에는 대한민보에 이도영이 최초의 시사 만화를 실었다.(폐간 때까지 1년 2개월) 이도영(1884-1933)의 ‘모필화임본’은 보통학교 도화 교과서에 수록되어 널리 유포되었다. 1920년 대에 이르기까지 동양화단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정학교(1832-1914)의 괴석도도 오원의 영향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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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관재 이도영-1909년6월 서울의 항일단체인 대한협회가 기관지인 '대한신보'를 창간했다.이도영이 시사만화를 연재했다. 한국신문사상
처음이었다.시사만화의 선구자인 셈이다. 만화의 주제와 내용은 친일파 고발 규탄이었다.풍자만화로서 날카로운 사회비평이었다.대한민보는 오세창이 창간했고 이도영은 오세영의 초탁으로 만화를 그렸다.이도영은 자강회 간사로 참여하였다가 1907년에 강사가 되어 개화자강론자의 실력배양역할을 하였다.고종등극 40주년을 맞아 안중신, 조석진,채용신과 함께 고종 어진을 그렸다.1904년에 안중식과 조석진의 문하생이 되고 이어서 조선서회미술회원이 되고 도 얼마되지않아 서화협회의 발기인이 되었다.1923년에는조선미술 전람회의
심사위원이 되었다.안중식과 조석신의 회화를 하나로 통합했다는 평가를 듣는다.이들의 그림은 장승업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도영의 '모필화임본'은 보통학교 도화교과서에 수록되어 널리 유포되었다.1920년대에 이르기까지 동양화단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정학교(1832~1914)의 괴석도도 오원의 영향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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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