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죽음...양귀비죽음...배정자죽음...공통점
황진이의 죽음
양귀비의 죽음
북방의 말과 무소 갑옷으로 무장한 반란군이 지축 흔들며 쳐들어오자,
황제는 양귀비를 죽음으로 내몰았고 자신 또한 결국엔 재가 되었지.
군왕으로서 진작 그녀가 나라 망칠 줄 알았더라면,
황제의 가마 굳이 마외(馬嵬) 언덕을 지나 피란 갈 일 있었겠는가.
(冀馬燕犀動地來, 自埋紅粉自成灰. 君王若道能傾國, 玉輦何由過馬嵬.)
―‘마외(馬嵬)’ 제1수·이상은(李商隱·812∼858)
당 현종이 총애한 양귀비가 죽음을 맞은 건 안녹산의 난 직후 피란길에서였다. 그녀의 죽음에 얽힌 역사의 기록. 피란 이틀째, 황제 일행이 마외 언덕길에 다다르자 호위하던 금군(禁軍)이 ‘반란의 화근’인 귀비를 죽이지 않으면 발길을 떼지 않겠노라고 했다. 이에 황제도 어쩌지 못하고 귀비와 결별을 고했고 환관 고력사(高力士)가 귀비를 불당으로 데리고 가 목을 졸랐다. 나이 서른여덟이었다. 시인은 마외 언덕에서의 변고를 떠올리며 미색에 취해 국사를 망친 현종을 호되게 질타한다. 군주로서 경국지색(傾國之色)을 경계했다면 난리를 초래하지도, 또 피란길에 나설 필요도 없지 않았냐는 것이다. 연작시로 된 제2수의 풍자는 더 신랄해서 ‘왜 사십여 년이나 황제 노릇을 했으면서, 아내 막수(莫愁)를 챙겨준 평민 노씨보다도 못한가’라고 했다.
한편 양귀비에 대한 시인 묵객들의 찬사, 황제와의 비극적 사랑을 안타까워한 노래도 넘쳐나는데, 그중의 백미(白眉)는 백거이의 ‘장한가(長恨歌)’. 시인이 장장 840자를 할애하여 저들의 사랑을 동정하고 찬양한 장편 서사시다. 양귀비를 ‘후궁 미녀 삼천 명이나 되지만, 삼천 명 받을 총애를 한 몸에 다 받았다’라 묘사했고, ‘하늘과 땅 장구해도 다할 때가 있겠지만, 이들의 한(恨) 면면히 이어져 끊일 날 없으리라’며 그 애틋한 사랑을 못내 아쉬워했다.
배정자의 죽음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를 자처한 배정자는 1894년 귀국하여 국정을 농간했는데 엄비와 고종에게 접근하여 능란한 화술과 뛰어난 미모로 스파이노릇을 했고 이토가 죽은 후에는 호화사치생활과 엽기적인 결혼과 남성편력 행각으로 세인들을 놀라게했다.
배정자는 일본에서 유학생 전재식과 결혼해 아들까지 있었지만 사별하고 현영훈과 재혼했는데 다시 이혼한 후 자신과 결혼하기 위해서 본부인과 이혼한 9살 연하의 박영철과 호텔에서 호화스러운 결혼식을 올렸는가 하면 5년후 이혼하고 일본인 오하시와 결혼했다가 또 이혼했다. 배정자는 그후 최덕, 조병헌, 20세 연하의 청년부호 정봉진을 거쳐 나중에는 25세 연하의 일본순사 가와지리와 동거하고 대부호인 조희경과 살다가 헤어지는 등 화려한 남성편력은 지금도 이해하기 힘든 면이 있다.
구한말과 일제시대는 우리전통의 관습이 아직 남아있어 배정자 같은 남성편력의 여자가 탄생하기에는 이른 시기였지만 배정자가 일본에서 교육받고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를 자처하여 일본식 관습에 따랐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배정자의 밥먹듯한 결혼과 이혼, 동거와 헤어짐을 이해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관습은 동학운동에서 여성의 재혼을 허가하라고 주장한 것을 보더라도 남편이 죽으면 부인은 당연히 집안의 어른이 되어 가족의 생계를 꾸려야 했지만 쉽게 개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남편이 죽으면 부인이 개가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잘되면 자식들도 모두 새남편의 소유가 되어 신분상승의 계기가 되기도했다.
따라서 조선여성들에게 남편이란 세상에서 둘도 없는 것이므로 생사를 같이 해야하는 하늘같은 존재였지만 일본에서는 설사 남편이 전쟁에 져서 죽더라도 여자들은 자연적으로 승자들의 전리품이 되어 첩이 되었으므로 결코 남편과 같이 죽어야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가 아버지인 노부히데에게 반발한 것은 전쟁터에서 빼앗아온 "이와무로 댁"이라는 어린 과부에게 빠져 정사를 소홀히 했기 때문인데 이와무로댁을 본 오다 노부나가가 한탄하며 "아버지가 죽었으니 이렇게 아름다운 너는 또 누구의 소유가 되느냐?"고 했는데 실제로 이와무로댁은 노부히데가 데리고 살던 여자라는 명성으로 이후 여러 남자 품을 전전하다가 미모가 사라지자 출가하여 70세까지 천수를 다했다고 한다.
강력한 권력자인 오다 노부나가의 동생인 오이찌는 일본역사에 이름난 미인으로 유명했는데 남편인 아사이 나가마사가 자신에게 대항하자 오다 노부나가는 아사이 나가마사를 죽이고 동생을 살려서 침흘리는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제치고 자신의 부하인 시바다 가쓰이에 에게 재가시킨다.
이 오이찌 부인이 유명해진 것은 재혼한 시바다 가쓰이에가 히데요시와의 싸움에 패하고 죽자 남편을 따라서 자결했기 때문인데 오다가문의 공주로 살아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신분임에도 굳이 죽음을 택해서 더 유명해 졌다고 볼 수 있다.
공식적으로 380명의 처첩을 거느려 세계기록을 세운 히데요시에게 유일한 아들인 히데요리를 낳은 것이 오이찌 부인의 딸인 요도기미인 것을 보면 히데요시는 모녀 2대에 걸쳐 침을 흘린 사람인데 히데요시가 후계자로 삼았다가 아들이 태어나자 죽여버린 자신의 조카인 히데쓰꾸는 이미 모녀를 첩으로 데리고 있었으니 이들에게 윤리도덕이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가하면 우리에게 유명한 히데요시의 여동생인 아사히메는 이미 이혼경력이 있었지만 당시에 재혼하여 잘살고 있었는데 히데요시가 강제로 이혼시켜 이에야스에게 시집보냈다. 당시 일본풍습이 여자나이 30세면 남편에게 측실을 권하는 것이 당연했거늘 40세의 나이에 이혼당하고 재혼하게된 아사히메는 절망하며 이에야스에게 정략적으로 결혼당해야했다.
에도막부를 세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정력제를 손수 만들어 먹으며 유부녀 사냥꾼으로 유명했는데 그가 눈독들인 여자를 부하인 이시가와 가즈마사가 먼저 가로채자 입맛을 다셨다는 얘기는 너무도 유명하고 히데요시의 본처인 네네는 이에야스와 정을 통했기 때문에 세끼가하라 싸움에서 히데요시의 아들인 히데요리 편에 서지 않았다는 설도 있을 정도다.
2대쇼군 히데타타의 딸이자 히데요리의 부인이었던 센희메(千姬)는 남편인 히데요리가 전쟁에서 패하고 죽자 이름처럼 천명의 남자와 놀아났다는 말이 있고 도기 요리아끼의 첩인 미요시가 자신의 남편을 죽인 사이또 도산의 아이를 낳고 잘살았듯이 전국시대의 여자들이 정략결혼이나 남자의 성적노리개로 전락했지만 점차 자신의 절묘한 위치를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일본에선 "남편이 죽어도 화장실에서 거울본다"는 풍습이 생겨났으며 남편에게 첩이 많을 경우나 설사 재혼을 안하더라도 애인을 두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겼고 특히 신분이 높고 미인인 여자들일수록 남자들에게 더 인기가 있었다.
연하남편의 원조여서 지금 생각해도 엽기적인 배정자의 남성편력은 메이지유신 4인방들이 첩을 거느리고 거들먹거렸듯이 간통이란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을 정도로 여성들이 자유분방한 성생활을 즐기는 일본사회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볼 수 있고 이토 히로부미의 첩이나 혹은 양녀였다는 그녀의 신분은 당시 남자들에게 더 인기가 있었던 것이다.
본명이 배분남인 배정자는 스파이 노릇을 하며 일제에 협력하고 수많은 독립군들을 죽게 만들었으며 70세가 넘어서도 조선처녀들을 일본군 위안부로 만든 친일죄로 해방후 반민특위에 회부되어 마포형무소에 수감됐다.
취조할 때 "따끈한 장국밥을 한 그릇 먹는 것이 평생 소원이라고 애걸하여 한 시대를 풍비했던 배정자의 모습은 흔적도 없고 한낱 늙은 죄수의 모습으로 전락해 있었다" 는 당시의 신문보도가 미모가 사라진 초라한 여성 스파이의 비참한 말로를 보는 듯하다.
배정자는" 제가 어찌 변명하겠습니까?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다만 제 아들 무덤 앞에서 죽는 것이 소원입니다." 그녀는 법정
최후진술을 통해서도 뒤늦게 자신의 죄과를 후회했다고 한다.
요즘 세상은 대한민국땅에서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너무 일어나고 있습니다.
위와같은 인물이 판을 치고 있어서 말입니다.
그러니 이들의 만로도 한번쯤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의사가 엄마라는 것과 같이 환자를 몰고 다니면서
약지어서 먹여놓으면 같은 질환을 앓고 있는 동물을 가져와서
켁켁거리게 하는듯 보이게
그러한 환자들을 몰고 다닙니다.
이것들이 미쳤나 싶습니다.
이짓을 잘했던 인간시대가 문재인 시대인데 말입니다.
종합선물세트처럼 몰고 다니니 문제라 ....
이것도 이시대에 미친짓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