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로 엄했던 선지식 송호경암(松湖敬庵)| 대구 팔공사 주지 나는 출가위승(出家爲僧)의 경암보다 군법사 조제우(趙濟佑)로 더 잘 알려졌는지도 모르겠다. 군법사 3기로 군포교에 몸을 담아, 그때만 해도 미개척지기도 한 군에 너무 할 일이 많아 온몸을 태우면서 살고 싶었기 때문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나는 경북 영일에서 태어나 그 당시 이종익 박사가 쓴 『사명대사』를 읽고 발심하여 절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고시공부 하러 절에 들어갔다가 아예 출가자가 되었다. 내가 공부하기 위해 몸담고 있던 절의 스님께 수많은 질문을 퍼부어 의문을 해결하다가, 도저히 양이 차지 않아 범어사로 향했다. 어릴 때부터 동네에 탁발승이 오면 뒤를 졸졸 따라다니기를 좋아했고, 그 탁발승이 동네를 다 벗어날 때까지 마냥 바라보고 서 있다가 시야에서 가물가물 해진 뒤에야 발걸음을 돌렸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내가 범어사에 처음 갔을 때, 홍교스님이 나보다 3일 먼저 온 행자로 있었다. 1960년대 초였으니까 어느덧 수십 년의 세월이 속절없이 흘렀다. 내 나이 예순을 넘어선 지금, 다시 지난날을 회고하니 내가 살아왔으면서도 내가 산 것 같지 않은 생경함마저 느껴진다. 참 어이없는 인생이다. 존경해 마지않던 조실스님, 광덕 사형님은 이미 입적하시어 고인이 되셨으니 말이다. 그 당시 광덕 사형님은 범어사 열중으로서 참으로 뛰어나셨다. 특히 교육에 무척 관심이 많아서 행자가 처음 들어오면 그때부터 철저하게 가르치려고 노력하셨고, 사미나 초학자들에게도 세세한 지도를 아끼지 않으셨다. 또 그 당시 분위기로는 상상도 못할 일도 하셨다. 사미들과 초학자들에게 외국어를 익히라고 했던 것이다. 최소한 영어와 일어, 이 둘은 익혀야 한다고 이르셨다. 그저 산중에 들어앉아서 염불을 잘하고 참선 잘하면 되지 무슨 그런 뚱딴지같은 일을 하느냐는 생각으로 가득한 의식구조 속에서 사형님의 이런 주장은 딴 세상 이야기로 들렸다. 마치 우리 어린 시절에 배고팠던 이야기를 지금 젊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그 당시 광덕 사형님이 우리 어린 사미들에게 외국어 공부시켰다고 하면 그저 그러려니 할 뿐이다. 사람은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일은 절실히 알지 못한다. 아무튼 광덕 사형님은 범어사에서나 봉은사에서나, 혹은 종단에서 교육을 위해 불철주야 열중하셨고, 신명을 바쳐 앞장섰다고 생각한다. 그야말로 교육을 통한 한국불교 중흥을 도모하였다. 특히 봉은사 시절, 당시 사회 분위기로 보면 대학생이 무척 귀한 때였다. 대학 들어가기도 어려웠고, 들어가면 학비 대기도 어려웠다. 범어사 같은 사세로도 대학생 한 사람 키우기가 어려웠는데 하물며 일반 민가에서야 더욱 힘든 일이었다. 그런 대학생들을 불러 모아 불교를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절에서 함께 생활했으니, 이 역시 지금 생각으로는 감당이 서지 않을 일이다. 나는 그 당시 출가자의 신분으로 동국대를 다니고 있던 입장이었지만, 그래도 공밥 먹으면 안 된다고 봉은사 원주 소임을 맡기셨다. 그런 대학생들이 정신적인 아버지 역할을 하신 분이 바로 광덕 사형님이시다. 한국의 앞날을 짊어지고 있던 그들이 스승이셨으니, 어쩌면 광덕 사형님은 교육을 위해 오신 화현보살이 아니신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어린 사미들이 외출했다가 자장면을 먹고 들어오면 금방 탄로 난다. 예불시작 전이나 좌선 끝난 방선시간에 스님이 뒤에 가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도 하고, 격려해 줄 때 양파냄새를 맡은 것이다. 그러면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가 다음 외출을 금지시킨다. 아랫사람들에게라도 절대로 인격을 손상시켜 가며 야단치거나 꾸짖지 않았다. 당신 자신은 계율에 엄하셨고 수행정진에 철저하셨지만 남에게는 자비와 예절과 높은 교양으로 대했다. 남에게는 온유하기 그지없이 너그러워도 스님 자신에게는 더더욱 칼이었고, 불이었다. 스님께서 수술 받고 정양하실 때 보면 얼마나 지독했는지 상상도 못할 지경이다. 그래서 사형님의 처소에서는 대중이 일사불란하게 따랐던 것이라고 본다. 아무리 저녁 늦게 자도, 아니면 힘든 일을 했다 해도 그 다음날 새벽예불 빠지면 벼락이 떨어졌다. 광덕 사형님은 한국불교의 개척자이시다. 남들은 스님을 도심포교의 공로자, 선구자라고 말들 하지만 그것은 일부이다. 오늘의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통합 조계종단에 기초를 마련하고 주춧돌을 놓았으며 기둥과 대들보를 올린 분이 나의 사형이신 금하당 광덕 대선사이였음을 다시 선언하고 싶다. 익히 아는 바와 같이 스님께서는 대학생 불교의 산파이셨고, 군승제도의 틀을 형성해 주셨고, 청정한 승가의 일상정신을 다시 실현하도록 옛 수행전통을 되살리셨다. 여기에서 불광의 여러 운동은 말하지 않더라도 이 세 가지는 오늘의 한국불교에 매우 중요한 토대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가 사형님과의 지난날을 다시 돌아보니 사형님은 너무나 큰 산이었고, 바다였다. 도저히 따르지 못해 엎드려 절 올리는 것으로 심정을 대신하려고 한다. 바라오니, “사형님, 어서 사바로 다시 오소서.” 나무마하반야바라밀. 2547(2003)년 8월 19일 경암 합장 경배 |
첫댓글 불광연구원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앞에 큰스님 시봉일기를 공부하며 안타까운 마음이 앞섭니다.
큰스님의 미래를 바라보셨던 지혜가 불광에도 이어지기를 기원합니다.
한분한분 정성을 다해 섬기고 공경하는 일이 우리들이 끊임없이 해야할 일임을 다시 공부합니다.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과연 이런 혜안을 가진 스승님을, 그것도 단순히 밝으신 게 아니라 원만하며 고루 밝으신 스승님을 다시 뵈올 수 있을까...... 저는 글쎄요? 입니다.
우리 큰스님을 보면 일반 수행자 일반 스승님들이 도저히 가지기 힘든 섬세한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모릅니다. 이런 것을 보통 사람들은 간과하기 쉬워요. 그런데 큰스님은 정말 사소한 일 하나하나까지 깊은 혜안을 드리우는 일이 한두 개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지어내서 하는 게 아니에요. 그냥 저절로 나오는 일들입니다. 가히 해인삼매의 경지지요.
온유로 엄했던...
한 사람이 없어지고 그 사람의 정신이 사라지고 ...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 법이 이리 오래 이어져 온 걸 보면 대체 부처님은 어떤 분이셨을까요?
크신 은혜 한량없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그리고 자비가 한없이 깊습니다. 세상을, 그리고 중생을 참으로 따뜻하게 보시지요. 그런데 이게 전부~ 화엄, 보현행원의 소식에요. 가령 화엄 십행품 같은 걸 보면 큰스님의 이런 경계가 그대로 설해져 있습니다.
섬세하다는 것은 혜안으로 보시고 자비심으로 보시니 그러겠구나 싶습니다. 고맙습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