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산군에 속한 위량면(나가, 금보, 구야, 고도, 상여, 송문, 성북, 상군, 하군, 적하, 부곡, 본리, 남곡) 및
개령현에 속한 북면(삼봉, 오성, 가척, 성촌, 광동, 명천, 상보, 하보, 대양) 등 3개면이 있었는데,
1914년 북면을 곡송면에 합하고,
1934년 4월 위량면과 곡송면을 통합하여 감문면이라 하였다.
1983년 2월 15일 봉남동과 소재동이 선산군(선산읍)에 편입되었으며, 1988년 동을 리로 바꾸었다.
또한 위량면 행정복지센터는 금라동에 있었으며, 곡송면 행정복지센터는 북면과 합치기 전에는 광덕동(탄동)에 있었다. 1919∼1930년까지는 면 행정복지센터가 덕남동에 있었다.
1931년 태촌동으로 옮겼다가,
1934년 위량. 곡송면이 합면된 후 감문면으로 변경되어 면 행정복지센터는
두 면의 중간지점인 보광리 351번지에 세워 써오다가 1992년 3월 6일 북동쪽 500m 지점에
오늘날의 청사를 새로 짓고 옮기었다.
김천시 북부에 위치하며 동쪽으로 구미시 선산읍과 무을면,
북쪽으로 상주시 공성면과 경계를 이루고 서쪽은 어모면, 남쪽은 개령면과 감천을 경계로 아포읍과 접경하고 있다.
북쪽에 있는 백운산(일명 속문산 618.8m)은 남쪽으로 뻗고 있으며, 남쪽의 대양산(312.6m)은 개령면 남전과 경계를 이루며, 백운산에서 발원한 감문천은 면 서쪽으로 흘러 개령면 서부리에서 감천과 합류하고, 외현천은 면 중앙부의 북남으로 관류하여 태촌(배시내)에서 감천과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흐르고 있으며, 대체로 북부는 산간지대, 남부는 평야지로서 1980년부터 미곡을 탈피한 특수작물로 참외, 토마토, 포도등을 재배하여 주민소득이 높은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개령현에 속한 상보동. 하보동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두 마을을 합하여 보광동이라 하여,
곡송면에 속하고, 1934년 4월 1일 곡송면과 위량면의 합면으로 신설된 감문면의 소관이 되고 면소재지가 되었으며,
1988년 동을 리로 바꾸었다. 임진왜간 때 청주에서 한건이란 선비가 피란와서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으며,
그 후 1608년 길 가던 해주 오씨 명건이라는 선비가 한건의 딸과 혼인하여 이곳에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었다.
913번 지방도가 마을 중심을 지나고, 면 행정복지센터가 있는 감문면 행정중심 지역으로 1993년 31,803평의 농공단지가 조성된 지역이다. 동쪽 1km쯤 떨어져 하보가 있으며, 남쪽으로 대양산(312.6m)을 경계로 개령면 남전과 접경을 이루고, 북쪽으로 보광산(238.9m)을 경계로 금곡리와 인접하고, 서쪽은 금라리, 동쪽은 삼성리가 있으며, 마을 앞에 못이 있다.
금라리
조선시대에는 김산군 위량면에 속한 나가동. 금보동이었는데, 1914년 두 마을을 통합하여 금라동이라 하였으며, 1934년 4월 1일 신설된 감문면에 속했고, 1988년 동을 리로 바꾸었다. 나가. 금보. 양지뜸. 웃뜸. 음달뜸 등 5개 부락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913번 지방도로가 마을 앞을 서동으로 지나고 있고, 마을 앞에 못이 있다.
동쪽으로 보광리, 북쪽으로 남곡리와 접하며, 서쪽으로 은림리, 남쪽으로 구야리와 개령면 남전과 접경하고, 1910년 위량면의 면소재지이기도 하였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① 나골. 나가동(羅伽洞)
임진왜란 때 김이환. 김이방 두 형제 선비가 피난차 왔다 이곳에 정착하였으며 개척 당시 숲이 울창하고 수려하여 계곡과 산록에는 갖가지 꽃이 만발하여 금수강산을 이루어 신라와 가야의 명승지로 신라의 라와 가야의 가를 따서 나가동이라 불렀다 한다.
구야리
조선시대에는 김산군 위량면에 속한 구야동으로, 마을 남쪽 끝에 오래되지 않은 새터를 합하여 1914년 구야동이라 하고,
1934년 신설된 감문면 소관이 되었으며, 1988년 동을 리로 바꾸었다.
조선 선조 (1590년) 때 남양홍씨가 이곳에 이주하여 개척하였으나, 후대는 없어지고 지금은 경주이씨가 많이 살고 있다.
감문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2.4km쯤 떨어져 있는 지역으로 동쪽은 취적봉 지맥이 서쪽으로 뻗어 개령면 남전리와 경계하고, 서쪽은 은림리, 남쪽은 자방마을이 이웃하고, 북쪽은 금라리로 이어지고 마을 서쪽에 913번 지방도로가 지나간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① 구래실. 구야곡(九野谷)
조선 선조 때 남양홍씨가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마을 뒤 구봉산 밑에 아홉가지의 큰 과실 나무가 있었는데 이 마을에 흉년이 들 때마다 과실이 많이 열려 주민들에게 배고품을 잊게 해 주었다고 하여 구래실이라 불리게 되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은림리
조선시대에는 김산군 위량면에 속한 상군동. 하군동. 본동이었는데, 1941년 이들을 통합하여 은림동이라 하고, 193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신설된 감문면의 소관이었으며, 1988년 동을 리로 바꾸었다.
마을 형성은, 상군의 경우 조선 광해군 때 수원백씨가 처음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하군은 현풍곽씨가 정착하고, 본리는 여흥민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었다.
감문 면소재지에서 서쪽으로 3km 지점, 어모 경계에 있는 3개 마을(상군,하군, 본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감문천변에 발달한 평야지로 동쪽은 구야리. 서쪽은 어모면 군자리, 남쪽은 다남리, 북쪽은 도명리로 이루어진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① 굴미. 군명. 상군(上君)
감문면의 가장 서쪽 끝에 자리한 이 마을은 북쪽에 있는 백운산으로부터 남북으로 뻗은 두 갈래의 산줄기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조선 선조 때인 1590년경 수원백씨가 처음 마을을 개척하여 군자와 같은 훌륭한 인물이 많이 나오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군명이라 칭했다 하며 또 군명은 은림리의 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하여 상군이라 칭했다 한다. 앞서 수원백씨가 정착한 이 마을에 김해김씨의 삼현파 후손이 가선대부 중추부사 동지 김제복이 어모면 남산리으로부터 그의 실제 김제군을 대동 이주하여 200여년을 내려오는 동안 벌족을 이루고 있으며 다른 성씨도 속속 이주하여 오늘날 10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② 하군(下君). 하군명
은림리에서 가운데 위치한 마을로 군명의 아래 편에 있다 하여 하군이라 부르고 있으며 이 곳에 여흥민씨가 많이 살고 있으며 1970년대에는 특산물로 왕골이 많이 생산되었다.
③ 사래. 본리
하군의 남쪽에 있는 마을로 처음 마을을 개척한 것은 조선 인조 때 여흥민씨로는 덕망과 학식을 갖춘 선비가 한양에서 내려와 이곳에 은거하면서 마을을 조성하였다 하며 지금도 민씨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도명리
조선시대에는 김산군 위량면에 속한 고도(古道)가 난 마을이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도명으로 고치고, 1934년 신설된 감문면 소관이 되었으며, 1988년 동을 리로 바꾸었다. 조선 선조때 경주김씨와 여양진씨가 처음으로 이 마을을 개척하면서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었다.
감문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5km쯤 떨어진 산간지대로 동쪽에 감문천이 흐르는 연변에 농경지가 동남에서 서북으로 펼쳐 있고, 남쪽은 앞산(259m), 서쪽은 뒷골산(230m). 샛골 (320m). 선박골산(340m)이 병풍처럼 솔숲으로 싸여 있으며, 북쪽은 문무리로 앞은 노송과 수양버들로 에워싸여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다. 1990년 도부터 참외 재배로 소득이 점차 높아져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① 돌곰이. 고도리. 고도(古道)
신라 선덕왕 때 이 부락의 이웃인 문무국의 세력이 강하여 이에 대비하기 위한 순찰로가 이 마을에 있었으며, 또 마을 입구에 정자나무 40여 그루가 늘어서 있어 조선 때 과거 보러 가던 많은 사람들이 이 정자나무 그늘에서 쉬어 갔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으며, 순찰로. 과거길 등 옛길과 관련이 많아 조선 선조 이후 마을 이름을 고도리라 청했다 하며, 돌곰이라 부르는 들판이 고도리 앞에 있고 인가가 몇 집 있었다 하나 지금은 다 떠나고 마을은 없어졌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문무리
삼한시대에는 문무국이 이곳에 있었다고 전해 오고 있으나 고증할 문헌은 없으며, 고려와 조선시대는 김산국 위량면에 속한 상여동. 하여동이었는데, 1914년에 장전과 합하여 문무동이라 하고 193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신설된 감문국의 소속이 되었고 1988년 동을 리로 바꾸었다.
감문면 소재지에서 서쪽 7.4km쯤 떨어진 산간 마을로 상여. 하여. 장전의 3개 마을이고, 면적이 가장 넓으며, 마을 앞뒤에 옛 백운산 성터가 있으며, 서쪽은 어모면 구례, 북쪽은 상주시 공성면과 이웃하고 있으며, 옛날에는 재 너머 공성장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참외. 채소. 화훼 등의 특수작물 재배를 하고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① 여모. 여무. 여산골. 여산(余山)
이곳은 사방이 험한 산으로 둘러 싸여 있고 수풀이 우거진 곳으로 삼한시대 문무국(文武國)이 있었다고 전해 진다. 문무국의 중심 도읍지가 여산(余山)인데 여모. 여무. 여산골 등으로 불러져 왔고 지금은 두 마을(상여. 하여)로 되어 있다. 일단은 문무의 무와 상여의 여를 합하여 여무가 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기원적으로 보아 어모의 소리가 바뀌어 여무가 된 것으로 상정할 수 있다.
마을 주변에서 지석묘. 석곽묘 등 고분이 산재한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남곡
조선시대에는 김산군 위량면에 속한 남곡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신설된 감문면 소관이 되었으며, 1988년 동을 리로 바꾸었다. 조선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때 경주정씨 금오라는 사람이 상주 남실에서 피란와서 정착하면서 집성촌을 이루었다. 감문면 소재지에서 5.8km쯤 서북쪽에 있는 산간지대에 자리하고, 백운산(618.3m)이 동. 북. 서 3면을 둘러싸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골짜기를 따라서 도명리와 통한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① 남실. 남곡(南谷)
조선 선조 25년 임진왜란 당시 경주정씨 금오라는 사람이 상주 남실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난을 피해와 이 마을에 정착해 살면서 상주 남실의 이름을 따서 남실이라 불리어 오고 있다는 설도 있고, 백운산 남쪽 골짜기가 되므로 남실 또는 남곡이라 불리어졌다고도 한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송북리
조선 중기까지는 내송문. 중기리. 외송문 마을로 이루어지는 속문리(俗門里)였는데, 말기에 송문으로 바뀌고, 1914년 성북동에 통합하여 송북동이 되었다가 신설된 감문면에 예속되고, 1971년 송문(송북)을 송북 1동으로 나누었고, 1988년 동을 리로 바꾸었다. 조선 선조 25년 (1592년) 임진왜란 때 성산배씨 경원이라는 시인이 피란 와서 이곳에 정착하여 그 후손이 집성촌을 이루었으나, 지금은 김해김씨와 남양홍씨가 많이 살고 있다.
감문면 소재지에서 북으로 7.7km 떨어진 최북단의 산간오지 두 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북쪽은 삼두봉(343m), 서쪽은 백운산(618.3m) 줄기로 병풍같이 둘러싸여 있는 한편, 감문면의 최고봉에서 흘러 내리는 하천이 마을 중심을 지나므로 가뭄에 대비할 수 있고, 언제든지 맑은 물을 가까이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으며, 김천. 상주. 구미 3개시의 경계지역으로서 중요한 자리를 잡고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① 송 문(松門)
옛날에는 속문(俗門)이었는데 마을 북쪽 백운산은 신라에 속한 속문산성(俗門山城)이 있는 속문산에서 유래되고 속문이 변하여 송문이 되었다 한다.
② 성북골. 성북
조선 선조 때 이종성이라는 사람이 경북 안동에서 살다가 생활이 곤란하여 이 곳에 이주해 마을을 개척하였다 하며, 성터가 백운산에 있는데 이로써 불려지는 이름이라 한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금곡리
조선시대에는 김산군 위량면에 속한 적하리였으나, 1914년에 부곡, 비실(배실), 비곡 등을 합쳐 금곡동이라 하고, 193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신설된 감문면 소관이 되었고 1971년 적하를 금곡 1동으로 나누었으며, 1988년 동을 리로 바꾸었다.
면소재지에서 북으로 5.1km 떨어진 산간지대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동쪽은 삼성리, 서쪽은 산너머에 금곡리, 남쪽은 봉화산과 보광산이 가로막아 금라와 접하고, 북은 백운산 지맥이 가로막아 마을 뒤에는 다락논이 많고, 전형적인 산골 마을로 부락을 형성하고 있으며, 마을 앞은 논이 많은데, 물이 짧은 관계로 저수지가 많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① 노래. 적하(赤下)
임진왜란 때 파평인 윤완이라는 선비가 서울로 가는 길에 이 고을을 지나다가 혼자 사는 경주김씨의 낭자와 결혼하여 이 마을을 개척하였는데 마을의 남쪽. 서쪽. 북쪽에 산이 높아 해가 일찍 지고 노을이 빨리 오기 때문에 노래라 불리어 온다고 한다.
② 가매실. 부곡(釜谷)
조선 선조 때 노씨 한 가구가 마을을 처음 개척하였는데 마을 모양과 지형이 가마솥처럼 생겼다 하여 가매실이라 불렀다 하며, 그 후 박씨. 김씨. 육씨 순으로 이주해 왔으며 현재는 달성서씨. 옥천육씨 등이 살고 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삼성리
조선시대에는 개령현 북면에 속한 삼봉, 외삼봉. 신기. 던돌마였는데, 1914년에 오성동을 합하여 삼성동이라 하고 곡송면에 편입되었으며, 1971년 삼봉 등 4개 마을을 삼성 1동이라 하였다가 1988년 동을 리로 바꾸었다. 조선 선조(1589년)때 구례장씨 예복이라는 사람이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영월엄씨와 더불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감문면 소재지에서 3km 떨어진 평야지대의 삼봉. 외삼봉. 신기. 던돌마 등 4개 자연부락으로 던돌마에는 감문중학교. 감문농협. 감문우체국 등이 있으며 농업과 상업을 병행하고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① 삼봉(三峰)
삼성동에서 중심이 되는 마을로 봉우리가 셋인 삼봉산 아래 있어 삼봉이라 부르게 되었다 하며 처음 장씨가 마을을 개척하였고 그 후 엄씨가 들어와서 주로 장씨. 엄씨가 살았다 하나 지금은 여러 성씨가 모여 살고 있으며, 감문중학교. 감문단위농협. 감문우체국이 이곳에 있다.
② 오성(午盛)
삼봉에서 서쪽으로 외현천을 따라 약 2km 올라가면 감문초등학교에서 세 갈래 길이 있어 오른쪽 골짜기로 더 들어가면 이 마을인데 뒷산의 모양이 말 같다 하여 오성이라 칭했다 하며, 임진왜란 때 김씨. 박씨. 신씨 등이 피란와서 살게 되었다 하나 지금은 각성이 모여 살며 1914년 행정구역통합에 따라 삼봉과 오성의 삼과 성을 따서 삼성동이 되었다 한다.
이곳에 감문국시대의 금효왕릉이 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광덕리
조선시대에는 개령현 북면에 속한 가척동(개자)이었는데, 1914년 광동동. 탄동을 합하여 광덕동이라 하고, 북면은 곡송면을 편입되었으며, 1934년 신설된 감문면에 예속되고, 1971년 가척을 광덕 1동으로 나누었고, 1988년 동을 리로 바꾸었다. 조선 단종(1454년) 때 강릉류씨 2집이 이 마을에 정착하여 개척했다. 면소재지에서 7.1km 떨어진 산간 오지 마을로 구미시의 무을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으며, 서쪽은 오태산(451.6m)이 서북을 막고, 동쪽은 광덕산(393.5m)이 막아 분지를 이루고 있는 마을이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① 개자. 가척(加尺)
조선 단종 때 강릉류씨 두 가구가 가척 고개에 정착하여 살면서 가척이라 불렀다 하며, 일설에는 이 고개에 산적이 자주 출몰하여 부녀자를 희롱하고 곡식과 금품을 수탈해가므로 고개를 넘어 현재의 마을로 이주하여 살면서 한치의 땅이라도 더 개척하자는 뜻에서 가척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② 숯골. 탄동(炭洞)
고려말 정희언이란 사람이 이곳에 살면서 정씨의 화성이므로 화자를 따고 숯은 땅속에 묻혀 도 부패되지 않으므로, 충절과 효를 마을의 계명으로 삼는다는 뜻에서 탄동이라 불렀다 한다.
숯을 생산한다고 붙일 수도 있고, 숯 - 숫 - 슷 -사이란 뜻으로 풀이할 수도 있다.
③ 담안. 장내(墻內)
조선 숙종 때 평해황씨 세 가구가 이곳에 정착하여 삼형제가 같이 살면 담을 세가구가 같이 쌓고 대문을 하나로 함께 사용하였다 하여 담안 또는 장내라 한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덕남리
조선시대에는 개령현 곡송면에 속한 신풍리였는데, 1914년 곡촌리(시술)와 통합하여 덕남동이라 하고, 193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김천군 감문면에 예속되었고, 1971년 신풍을 덕남 1동으로 나누었으며, 1988년 동을 리로 변경하였다.
조선 중엽(1507년) 동래정씨가 이곳을 지나다가 양지바르고 사람이 살기에 좋을 것 같아 이 마을에 정착하였는데, 지금은 김해김씨와 전주이씨가 모여 살고 있다.
면소재지에서 동쪽으로 6.2km 떨어진 평야지대로 동쪽은 감천변 태촌들로 이어지고 서쪽은 광덕리 앞들로 이어진다. 남쪽은 들을 건너 낮은 산이 들어 앉았고, 북쪽은 광덕산 지맥이 뻗어 덕남 2리와 인접하고 있으며, 마을 뒤 동북쪽으로 약 1.5km 지점에 광덕 저수지가 있어 마을 앞 들의 물문제를 해결하므로 농업이 발달되어 미곡을 중심으로 농업이 발달하였다.
현재는 고소득 작물인 참외와 토마토 외에 특히 선인장을 재배하여 다른 마을보다 주민의 소득이 월등히 높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① 신풍(新豊)
약 200년 전에 근처에 있는 선영을 수호하기 위해 몇 집이 살기 시작했는데 당시에는 리동의 명칭도 없었기 때문에 지나가던 세 사람의 풍수가 삼풍동이라 하자 하여 삼풍동이라 불리다가, 어느 해 마을에 대풍이 들어 새로이 풍요로운 마을을 이루었다하여 그 때부터 신풍이라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② 시술. 실술. 곡송(谷松)
마을 뒤에 광덕산이 있는데 산세가 험하지 않으나 여러갈래의 긴 계곡이 뻗어 있고 산에는 소나무가 무성하다 하여 곡송이라 불러오고 있다 한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태촌리
조선시대에는 개령현 곡송면에 속한 태성리였는데, 1914년 완동. 장기(梨川)와 통합하여 태촌동이라 하였고,
1920년 곡송면 행정복지센터를 이 마을로 옮겼으며,
193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김천군 감문면에 예속되고 면 행정복지센터는 폐쇄되었다.
1971년 태성을 태촌 1동으로 나누었고, 1988년 동을 리로 변경하였다.
조선 중종(1529년) 때 김해김씨 정준이라는 사람이 이 마을에 정착하여 지금의 안동권씨. 함안조씨. 김해김씨가 모여 살고 있다. 면 소재지에서 6.1km 떨어진 면의 동쪽 끝에 있으며, 감천변 넓은 평야지에 들어 앉은 탑산과 뒷산이 구릉을 이룬 곳에 위치한다. 동으로는 장시가 있는 배시내(梨川)와 접하고, 서쪽은 성촌리와 이웃하며, 남쪽에는 포장된 910번 지방도가 지나고, 북쪽은 뒷산을 경계로 덕남리와 접하고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① 안마. 태촌(台村)
마을 동쪽에 갈미샘이라는 샘이 있는데 약 200년 전에 이 샘을 중심으로 권씨네 몇 집이 삶의 터전을 마련했는데 당시의 동명은 태성무라 했으나 어느 해 큰 홍수 때문에 세 갈래로 흩어져 살게 되었는데 그 중 가장 안쪽 마을로 들어왔다 하여 안마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② 왁사골. 완동(完洞)
옛날 탑산 밑으로 난 통로가 있어서 영남 지방의 상인들이 서울로 왕래하면서 이 길을 통과 하였는데 상인들은 굴레고개에 있는 주막에서 하룻밤 묵으면서 술을 마시고 서로 자기 의견을 주장하면서 이 주막을 떠들썩하게 했다.
이렇게 밤낮으로 왁자지껄하다 하여 왁사골이라 불렀다 한다
③ 배시내. 이천(梨川)
낙동강 지류인 감천이 김천에서 이 마을 앞을 지나 선산 쪽으로 흐르고 있는데 이 감천을 따라 배가 이 곳을 출입했다 하여 배시내라 부르게 되었다 하나 지금은 냇물도 줄고 육로가 발달하여 배는 찾아볼 길이 없다.
이곳에는 근래까지 장이 섰었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성촌리
조선시대에는 개령현 북면에 속한 북성. 명천. 명창 3개 마을이었으나, 1914년 이들을 통합하여 성촌이라 하고 곡송면에 편입되었다가, 193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감문면에 속하였고, 1988년 동을 리로 변경하였다. 고려시대부터 세 마을에 개령홍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으며, 또한 약 200년 전에는 보은이씨가 북성에 터전을 마련했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김해김씨가 모여 살고 있다.
면 소재지에서 5.9km 동쪽 평야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성. 명천. 명창 세 마을이 길가에 나란히 있으며, 남쪽은 외현천을 낀 광천들이 펼쳐지고, 동쪽은 곡송들이고, 북쪽은 태촌 1리와 접하고 있는 넓고 수원이 풍부하여 벼 생산량이 많으며, 참외와 같은 특수 작물을 많이 재배하고 고소득을 올리는 마을이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① 안태성. 북성(北星)
약 200년 전에 보은이씨가 터전을 마련했으며 마을 뒤에 산제당을 모시고 마을의 번영을 기원하면서 오랫동안 살아왔는데 이 산제당이 북극성과 직결된다 하여 마을이름을 북성이라 칭했다 한다.
② 새터. 바깥태성. 명천(明泉)
약 150년 전에 태촌동의 권씨가 처음 이 곳에 와서 살게 되었는데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터라 하며 또 마을의 동쪽에 맑은 샘이 있는데 어떤 가뭄에도 샘물이 마르지 않고 전 동민의 식수로 사용했으며 수정같이 맑은 물이 솟는다 하여 명천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③ 돌모리. 명창(命唱)
이 마을의 서쪽에 내가 굽이쳐 흐르고 있는데 큰 비가 내리면 이 곳에 많은 돌이 쌓여 마을이름을 돌모리라 칭했다 하며 또 마을 사람들이 장수한다 하여 명창이라고도 부른다 한다.
(전문 김천시사(1999년 12월, 김천시)발췌)
대양리
조선시대에는 개령현 북면에 속한 대양동이었는데, 1914년 천동을 합하여 대양동이라 하고, 북면은 곡송면에 통합되었으며, 1934년 신설된 감문면에 속하였고, 1971년 대리를 대양 1동으로 나누었으며, 1988년 동을 리로 바꾸었다.
감문면 소재지에서 2.6km 떨어진 동쪽 야산지대로 마을 앞에 큰 못이 있고, 못 밑에 동북으로 들이 있으며, 동쪽은 성촌리에 인접하고, 남쪽은 개령면 광천과 접해 있으며, 벼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있으나, 과수 재배를 많이 하는 마을로 근래에 와서는 참외를 많이 재배하여 고소득을 올리고 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① 대이. 대양(大陽)
조선 중종 때 보은군수로 봉직하던 김희직이란 분이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는데 뒷산의 모습이 마치 학이 알을 품은 듯하여 10년내에 큰 인물이 태어나 마을이 크게 번성할 것이라 하여 대이라 불렀다고도 하고 옛날 이곳에 대양사(大陽寺)란 절이 있어 이로 연유된 마을이름이기도 하다.
② 샘골. 새암골. 천동(泉洞)
조선 숙종 때 김옥경이란 선비가 이곳에 개울물이 끊임없이 흘러 마을 앞 뒤 여러곳에 샘을 파보니 수량도 많고 수질이 좋아서 샘골. 새암골이라 불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