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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산·괴산 수옥폭포를 행한 버스 안에서.
🙏🎋幸福한 삶🎋🎎🎋梁南石印🎋🙏
오늘 17일, 괴산 소재 수옥폭포 계곡을 찾아 집을 나섰다. 밤새 잠을 설치고 피곤이 가시지 않았지만, 버스 창밖 풍경에 마음이 설레며 이 글을 쓴다.
벗과 선배님, 작은어머님께. 안뇨옹, 잘 계신 거 맞죠? 휴가 정점, 연휴 마지막 날 어떻게 보내고 계신가요?
지난 15일 광복절, 통한의 식민지에서 해방된 역사적 날을 경건히 보내지 못해, 목숨으로 저항하신 애국지사 선열들 노하게 했을까요. 광복절 나들이 나선 우리를 향해 내년부터는 그래선 안 되느니라는 뜻의 경각심을 주신 것일까요.
이른 새벽 기침, 점잖은 척, 얌전한 모습으로 조반을 챙겨 먹고 사당역까지 도착했지만, 일행 중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내가 날짜를 잘못 기억한 걸까, 폰으로 달력을 확인하니 맞았다. 담당자에게 통화했다. 오늘이 맞다고 한다. 하지만 약속 시간이 지나도 아무도 도착하지 않는다. 07시 50분쯤 일행이 모여 승차, 착석과 동시에 출발했다. 엎드리면 코 닿을 듯한 거리였지만, 차들이 줄지어 4시간 이상 이동했다.
이동 내내 지루하고 답답해 하차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으나, 순간마다 즐거움도 있었다.
물은 극명한 양면성을 지닌 존재다. 태초에 생명을 주었으나, 수마로 목숨을 빼앗는 것도 물이다. 선과 악을 동시에 품은 역동적 유기체가 아닐까, 생각한다.
생명과 죽음의 그림자를 품은 비는 인간 세상에 화가 났을 법하다. 자연을 훼손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피해를 당하는 대부분은 평범한 생업에 충실한 서민층이라는 데 아이러니가 있다.
폭우로 용추 계곡은 접근조차 불가했고, 연인산 일대 목적지를 잃어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부족한 시간마저 빼앗겼다. 연인산 외곽 지방도 곁에 있는 정자를 발견하고 배낭을 풀었다.
점심때가 훌쩍 지나 뒤늦게 허기를 채우고, 몇몇은 맑은 계곡물에 뛰어 더위와 함께 아쉬움을 달랬다. 그렇게 광복절 산행은 의미를 잃고 귀가했다.
그로부터 이틀 후, 오늘 18일은 괴산 수옥폭포 계곡을 찾았다. 밤새 뒤척이며 잠을 설쳤지만, 버스 창밖 풍경에 설렌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사전 검색에서 알아본바 수옥폭포, 정확히는 충북 괴산의 숨결이 담긴 폭포로, 높이 약 20m 절벽 위에서 세 갈래로 떨어지는 시원한 물줄기와 그 아래 소를 가득 채우는 물보라, 숲속에 피어오르는 은빛 물안개가 절경을 이룬다.
울창한 숲과 기암괴석이 폭포와 어우러져 한 폭의 산수화처럼 펼쳐진다. 거친 물살을 마주하며, 지난 광복절 산행에서 느낀 아쉬움이 오늘은 폭포수에 씻겨 내려가길 바랐다.
제발, 폭포의 굉음 속에서 천사의 얼굴을 보고 싶다. 삶을 빼앗는 악마가 아니라, 절망이 아닌 생명을 주는 천사로서 물이 다가오길 바랐다.
수옥폭포는 조령산 서쪽 능선에서 흘러내린 계류가 약 20m 절벽을 세 번에 걸쳐 떨어지는 3단 구조다. 상류 두 구간에는 깊은 소가 형성되어 마치 인공 연못 같은 고요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폭포 아래 마지막 물줄기는 장관을 이루며 ‘자연이 만든 거대한 자연 에어컨’ 같은 청량함을 선사한다.
울창한 숲과 기암절벽, 계곡 길이 동양 산수화 속에 들어온 듯한 풍경을 만든다. 자연이 만든 입체적 절경 덕분에 영화나 사극 촬영지로도 자주 등장한다.
역사적 숨결도 살아 있다. 고려 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피신하며 초가를 지어 행궁으로 삼았고, 폭포 아래 정자에서 위안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선 숙종 37년 연풍 현감 조유수가 삼촌 조상우를 기리기 위해 ‘수옥정’ 정자를 세웠으며, 흔적은 절벽 암벽 글귀로 남아 있다. 시간이 지나 정자가 사라졌지만, 1960년 팔각정으로 복원되어 여전히 자리를 지킨다.
편리한 접근성과 자연 속 힐링 공간 덕에, 주차장에서 도보 5~10분이면 폭포 감상이 가능하다. 입장료와 주차비 모두 무료이며, 산책로, 쉼터, 물놀이장, 캠핑장까지 갖춰 하루 일정이나 1박 2일 힐링 코스로 적합하다.
연휴 피로와 예기치 않은 촌극, 긴 이동으로 마음이 산산이 부서질 때, 수옥폭포는 자연의 풍경으로 위로가 되었다. 숲길을 따라 5분만 걸어도 도심 일상은 사라지고, 세 겹 폭포 아래 맑은 소와 마지막 20m 낙하는 자연이 빚어낸 최고의 청량함이었다.
폭포 아래 수옥정에서 역사와 자연의 숨결을 느끼며, 고려 왕도와 조선 유림도 이 물빛과 물소리에 위안을 받았으리라. 현재 팔각정이 그 정서의 자리를 이어준다는 사실에 마음은 평안해졌다.
숲이 우거진 고개, 하늘재와 이우리재 사이에 있는 고개라는 뜻에서 새재라 했다는 설과, 새로 생긴 고개라는 뜻에서 새재라 했다는 설도 전해진다. 1966년 문경관문이 사적 147호로 지정된 뒤, 1974년에는 주흘산과 조령 관문 일원이 경상북도 지방 기념물 18호로 지정되었다.
하늘재·이우릿재·주흘산·조령산·부봉, 여궁폭포·용추폭포·조곡 폭포, 기름틀 바위·마당바위, 조령 약수·조곡 약수 등 산봉과 폭포, 계곡과 기암, 약수가 곳곳에 흩어져 있다.
조령산에 도착해 나 홀로 동떨어져 걸었다. 오랜 옛날부터 영남 지방에서 한양을 향한 숲길 문경새재 계곡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제3 관문부터는 괴산과 문경을 나누는 지점으로 문경 제 1관문까지 맨발 걷기 최고 최적의 장소라 하겠다.
괴산과 문경을 나누는 제3 관문을 지나 2관문과 1관문 언저리까지 걷는 길은 내 생전 가장 아름답고 걷기 편한 길로 여겨져 많은 분께 추천하고 싶다.
숲은 인공림이 아니다. 아마도 내 고조부님보다 훨씬 더 오래 산 듯한 천연림이 빽빽하다. 그것도 휘어지지 않은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울창한 산림에 햇빛도 거의 들지 못한다.
걷는 양편으로 투명한 물이 흐른다. 물소리, 새소리, 벌레 소리가 정겹다. 이곳에는 낙동강 발원지가 있다.
2관문을 지나 수( )량도 적당하며 낙차 큰 4단 폭포는 과히 천하 절경 중 절경이라 단언할 수 있겠다. 다만 아쉬움은 한동안 비가 내리지 않으면 폭포에 떨어지는 물이 없을 듯하다.
문경 방향은 곳곳에 마련된 정자와 화장실이 잘 갖춰져 있으며, 흙길 또한 고운 흑에 가는 마사토가 섞여 맨발로 걸어도 전혀 불편 없도록 아주 잘 관리된 흙길이다. 조선시대부터 한양을 향하던 옛길을 따라 걸으며 당시 나그네의 고단함을 느낄 수 있었다.
영남 선비가 부모께 큰절한 뒤 아내와 이별하며 과거급제 후 돌아오겠다는 궂은 신념으로 먼 천 리 길을 떠난 서방님 뒷모습만 바라봐야 했던 당시 조선 여인의 애틋한 한이 설인 길을 따라, 실제 과거 급제한 어사가 지나던 길목도 표기돼 있다.
문경새재 계곡 길은, 영남지방에서 한양으로 향하던 선비들의 과거시험 길이었다. 그 옛날에는 인적조차 없는 원시림뿐이었을 이 길은 '새재'라는 이름처럼 높고 험준하여, 새조차 쉬어가기 힘든 고개로 알려져 있다. 선비들은 이 길을 넘어 한양으로 향하며, 입신양명의 꿈을 품고 과거시험에 도전했다.
그러나 이 길은 단순한 여정이 아니었다. 부모님은 아들의 과거시험을 떠나보내며, 그리움과 걱정으로 가슴이 무거웠다. 아내는 남편을 배웅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그 시절, 그리움과 설움이 가득했다.
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그들의 발자취와 함께 애환과 설움이 묻어나는 듯하다. 문경새재는 단순한 과거 길이 아니라, 선비들의 꿈과 희망, 그리고 그리움이 담긴 역사적인 장소이다.
기회가 된다면, 아니 기회를 만들어서 반듯이 다시 방문하고 싶은 숲길이다. 단 물길이 그립다면 비 온 뒤 방문이 금상첨화일성싶다.
등용의 꿈을 꾸고 과거 급제를 준비했던 곳에 걸어두었던
〈약리도〉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푸른 봄날에 문과는 동쪽, 무과는 서쪽에 도열하니
고운 꽃과 어린 버들가지가 아름답게 어우러지네.
인정전 해치 머리에 빽빽이 묶여 있는 어사화와
큰 글자로 휘황하게 쓴 붉은 홍패를
한 사람씩 내려주면 절하고 받으니
머리 위에는 어사화,
품속에는 홍패의 영광이 가득 넘치네.
《무명자집(無名子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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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재를 노래한 시. 원문.
조령산 길은 험한데
그대는 어디도 가고자 하는가?
추운 날씨에 나그네가 되니
달이 차면 고향을 바라보내.
위 시에 답을 한 수 읊어 보노라,
🙏🎋幸福한 삶🎋🎎🎋梁南石印🎋🙏
그 옛날 원시림 울창한 이 계곡 길
☛그대는 어디로 가고자 하느냐 물었는가.?
입신양명을, 위한 한양도성을 향한 천 리 길 나설 적에
조상과 부모님의 기대 짊어지고 처자의 애처로운 눈빛
마음에 새기고선 걸음마다 뜻을 다지며 걷는 이 길은,
모름지기 군자는 세상에 나가 제 뜻을 펼치려 하느니라,
☛ 달이 차면 고향 바라본다고 하였느냐.
과거 시험 낙방의 설움 앞에선
차마 고향 산천 어찌 바라보겠는가.
부모님, 처자 뵐 면목 없어 눈물로 걷는 통한의 이 길
내 어찌 꿈엔들 그런 마음으로 이 길을 걷고 있겠느냐.
과거급제 이름 석 자 불리면 임금께서 하사한 영광의 꽃,
어사화 머리에 꽂고 말 등에 올라 고향 땅을 다시 밟으리니,
지금 걷는 발자취마다 설렘과 기쁨의 눈물로 걷고 있노라.
문경새재, 천 리 길,
선비들의 한을 품은 희망과 설움을 오롯이 간직한,
부모님의 염려와 아내의 애틋한 눈물이 점철된,
그 모든 것을 숲과 바위, 물소리에 녹아 잠들었노라. 끝.
이 시는 조령산 문경새재 계곡 길을 따라 영남지방에 살던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가던 길에 얽힌 애환과 설움을 담고자 했습니다. 과거시험을 준비하며 부모님의 기대와 아내의 애틋한 마음, 그리고 낙제 후의 자책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였습니다. 과거급제 후에는 영광의 꽃을 꽂고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소망을 담았습니다.
참고: 어사화는 어떤 꽃일까?
출처//한국문화원연합회
글 최순권 국립민속박물관 어린이박물관 과장,
http://urimunhwa.or.kr/data/vol310/sub/sub01_03.php
어사화는 임금이 하사한 종이꽃이라 하여 어사화(御賜花), 어화(御花), 사화(賜花) 또는 어사화(御史花)라고 한다. 그리고 머리 위의 꽃이라 하여 대화(戴花), 비녀처럼 꽂는다고 하여 잠화(簪花), 모자에 꽂는 꽃이라 하여 모화(帽)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어사화가 어떤 종류의 꽃으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명확하지는 않다. 그래서 어사화를 생김새에 따라 접시꽃(蜀葵花), 영춘화(迎春花)라고도 하며, 양반집에서만 볼 수 있는 꽃이라고 하여 능소화(凌 花, 金藤花)라고도 하고, 상징성으로 인해 무궁화(無窮花) 또는 복숭아꽃 등 다양한 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한편, 문헌에는 어사화를 ‘계화(桂花)’라고도 하며, 대과 급제자 명단을 ‘계방(桂榜)’이라고 한다. 이것은 중국 진(晉)나라 때 극선( 詵)이라는 사람이 어린 나이에 과거에 합격하고서도 한갓 계수나무 한 가지에 비유한 데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후로 계수나무 가지와 꽃은 곧 과거에 급제한 것을 뜻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계수나무에 대해 “장원(壯元)은 붉은 꽃인데, 노란 꽃은 방안(榜眼) 흰 꽃은 탐화랑(探花 ) 이네.”3라고 노래한 글도 있는데, 여기에서의 장원은 과거 급제에서 1등, 방안은 2등, 탐화랑은 3등을 가리킨다. 그리고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토정비결(土亭秘訣)》에도 출세에 대한 운수 풀이로 “머리에 계수나무꽃을 꽂으니 사람 모두 우러러보네.” 또는 “머리에 계수나무꽃을 꽂으니, 관청으로 출입하겠네.”라는 내용도 나온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계화도 실제 이름의 계수나무의 꽃인지, 아니면 상상 속 달나라의 계수나무라고 알려진 목서(木犀) 나무의 꽃인지 이에 대하여 문헌에조차 언급이 없다. 하여튼 현재 남아 있는 어사화 유물을 보면, 대개 종이를 바른 두 개의 대오리에 청색, 홍색, 황색, 백색 등의 종이꽃이 장식되어 있다. 후대에 와서 과거에 급제한 지 60주년이 되는 회방(回榜)이나, 세자익위사(桂坊)의 관원 가운데 과거에 급제한 자에게는 특별히 비단으로 만든 어사화를 하사하였다고 하나, 그것은 대부분 종이꽃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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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옥 폭포 의미 있는 아름다운 곳이지요
오래전에 읽은 "잃어버린 너" 의 소설 속 주인공 고 김윤희 씨
수옥정 주변에서 여교사 생활을 하며 부모님 몰래 유학중에 사고가 난
첫사랑 약혼남을 숨겨 놓고 살아왔던 참 이야기를
가슴 아픈 사연이 담긴 그곳이라 참 잊혀지지 않아
우연히 카페에서 글을 읽다 발견하고 댓글 몇자 적습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좋은 하루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