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최근 김낙중 교수님의 논문을 읽어보았습니다.
천안 목지국 세력인 '진'이 익산 건마국 세력인 '한'을
무력으로 쳐부수어서 마한 맹주국 자리를 가져왔다는 결론이었는데요.
몇 가지 문헌 사료에 대한 분석과 이전 연구들을 잘 맞추신 것은
넷상 흔한 엉터리들과는 차원이 다른 좋은 분석이었으나,
한 가지 크나큰 맹점이 있었습니다.
성주탁교수 추모위원회 발간 백제와 주변세계에 의하면, 천안 청당동 목지국의 고고학적 건국 연대는 기원후 1세기 후반 이상으로 올라갈 수 없다는 겁니다.
반면 익산 건마국의 쇠락 시기는 아무리 하한해도 기원전 1세기 초반입니다.
연대가 무려 150년 정도 차이 나니 적어도 고고학적으로는 성립될 수가 없는 주장입니다.
천안 청당동 목지국이 기원후 1세기 후반~2세기 초반에 고조선계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기 전에
송국리 유형 문화인만 있었을 시기는 물론 있었습니다만, 그 시기의 천안 일대 세력은
청동기 문화나 인력이 크게 발전하기도 전이기 때문에 과연 만만찮은 익산 건마국을 제압할 실력이나
있었을지 그건 큰 의문입니다.
하지만 중국 산동성 일대로부터 경기-충청-전라 서해안 일대로 유입되던 '중국 해적 세력'들과
기존 한반도 세력들이 마찰이 있었다는 언급은 크게 취신할만 하였습니다.
오월 토돈분구묘계 세력이 월나라의 멸망 이후 시기부터 슬슬 수백 년 동안 북상하여 기원전 3세기에는
산동성으로 유입되었고, 이들이 다시 기원전 3세기부터 경기도부터 시작하여 한반도 서해안으로
서서히 유입되는 것이 고고학적으로도 입증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느 시대에나 이주민 세력이 토착민과 맨날 싸움박질만 하는 건 아니며,
화합, 포용, 정복, 무력적 제압 등이 복합적으로 이뤄지고 이런 양상은 스펙트럼이란 게 역사적으로
입증된 사항입니다. 그리고 늘 이주민 세력은 토착민과 혈통적으로 교류를 하게 됩니다.
물론 안하는 집단도 있지만 극소수입니다. ;;
그렇지만, 그럼에도, 이주민과 토착민 사이에 불화와 대결, 싸움이 있는 경우가 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전북 서부 건마국 세력은 아무래도, '중국 해적 집단' 즉 토돈분구묘 세력과 상당한 갈등을 겪었던 것 같습니다. 즉 저는 고고학적 결과로 볼 때,
익산 건마국 세력에 상당한 타격을 준 장본인들은 천안 목지국 세력이 아닌 토돈분구묘 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추측은 김낙중 교수님께서 분석하신 문헌 사료 일부에도 근거를 둡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토돈분구묘계 세력이 전북 서부 준왕 집단=건마국에게 타격을 주긴 하였으나
그 일대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는고 하면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기원전 1세기 ~ 기원후 1세기 동안 전북 서부 일대에서 나오는 고고학 자료가 너나 할 것 없이 급감하는데,
이는 준왕 집단과 마찬가지로 토돈분구묘계 세력도 그 지역에서 그렇게 크게 발전하진 못했다는 암시를 줍니다.
제가 보기엔 아무래도 좀 두 세력이 서로 싸우다가 양패구상하여 마지못해 공존하게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그 공백을
천안 목지국이 채웠고, 기원후 2세기 들어오면 전북 서부는 다시 번영합니다만 이미 놓친 주도권을 가져오진 못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아무래도 토돈분구묘계 세력이 준왕 집단 후계들보다 더욱 회복 속도가 빨라서 건마국 내부 주도권마저 가져오게 된 것 같고요.
예시 사례들 1. 비슷한 양패구상이 나중에 등장하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삼국시대 위나라의 낙랑-대방군과 목지국-신분활국
마한 세력이 기리영 전투에서 싸운 상황입니다. 낙랑-대방군과 기존 마한 세력이 약화되자 한성백제가 빈 틈을 타서 급성장하게 됩니다.
예시 사례들 2. 송국리 문화 유형이 한반도 남부 전체에 본디 퍼져 있었으나 적어도 기원후 2세기 후반 사로국 건국 당시
이들은 서라벌과 그 주변에선 자취조차도 보이지 않는데 (;;;) FACT에 근거하는 말만 해야 하는
역사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은 이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으나, 저는 아무래도 적어도 서라벌 일대에서는
고조선계 집단이 송국리 문화 유형 집단을 수적 및 기술적 우위로 완전히 찍어눌러 노예 집단화하거나
쫓아냈다고 생각합니다. 사로국이 주민 구성이 시초부터 다원적이었던 한성백제나 초기 고구려와는 달리,
적어도 건국 시점에서는 전원 고조선계였다는 통일성이 아주 특이한 경우기도 하고요.
이는 다른 한반도 지역에선 송국리 문화 유형인들이 심지어는 삼한 거수국 지배 집단이었거나 아니면 적어도 중류층으로 잘만 살았던 양상과는 꽤 다른 것입니다.
예시 사례들 3. 훗날 소위 '침미다례'로 일컬어지게 되는 전남 서남부에서는 비슷한 시기에 위만조선계가 주도권을 잡았을망정
송국리 문화 유형계하고 잘 어우러져 공존했는데, 이들은 토돈분구묘계하고 큰 마찰 없이 순조롭게 큰 단절 없이
발전을 지속했습니다. 다만 저는 이 대목에서 "거봐라! 포용하니까 더 좋잖아!" 따위 결론을 내고 싶지 않습니다.
전북 서부 건마국은 아주 일찍부터 한성백제와 결탁하여 적어도 마한 내부 헤게모니에선, 한성백제에게 은근슬쩍 게김을
시전했고 웅진백제에겐 대놓고 뒤통수쳐대던 침미다례를 압도했기 때문입니다.
포용이고 뭐시깽이고 여하튼 사람은 줄을 잘 서야 하는 법입니다.
주의1: 만약 전북 서부에서 고고학적 자료가 더 발굴되어 익산 건마국의 쇠락 하한 연도가 내려가거나,
천안 일대에서 고고학적 자료가 더 발굴되어 목지국의 건국 상한 연도가 올라간다면
그때는 저의 이 글은 뇌피셜로 끝나게 되며, 김낙중 교수님의 주장은 완전히 입증되게 됩니다.
강종훈 교수님이 충주 일대 김씨 족단이 백제와 다투다가 사로국으로 망명했다고 추측하셨는데,
이와 같은 추측이 2010년대 중후반 충주 고고학 발굴 자료로 입증된 선례도 있습니다.
첫댓글 어떤거든 줄 제때 잘서야 살아남는게 세상...
다만, 백제가 침미다례한테 내놓으라고 하는 게 너무 많았던 탓도 있었습니다. ㅋㅋ 전북 서부야 별로 가진 게 없어서 백제가 뺏어갈 게 없었으나 침미다례는 얘기가 달랐죠.
@마법의활 아 그럼 좀 얘기가 달라지긴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