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릉 이야기 ]
요즈음 물가뭄을 겪고 있는 강릉이 북극항로 때문에 다시 바빠지고 있단다.한 친구는 오는 가을 방한 때 강릉에 가서 블라디보스톡에서 오는 러시아산 킹크랩 을 미국의 반값에 싫컷 먹어 보자고 한다.
정철은 관동별곡에서 경포대를 관동팔경 중 으뜸이라고 했으며, 경포대에 저녁이 되어 달빛이 쏟아지면 하늘에 달, 바다위에 달,
호수속의 달, 그리고 술잔과 임의 눈동자에도 달..... 다섯 개의 달을 볼수 있는 동해안 제일의 달맞이 명소 라고 했다.
조선시대 여류 문필가라면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공교롭게도 걸출한 두 여성은 고향이 같다. 강원도 강릉으로 모두 토호 집안으로 두 집이 멀리 떨어진 것도 아니다. 그러나 신사임당(1504~1551)이 60년 먼저 태어나고 허난설헌 (1563~1589)은 사임당 사후에 태어났다.
두 여걸의 닮은 점은 많지만, 한평생 살아온 인생은 하늘과 땅으로 갈라졌다. 경포호 뒤쪽에 자리 잡은 큰 기와집은 당대의 문필가요, 경상도 관찰사였던 초당 허엽의 보금자리 였다.
초당두부도 허엽의 호에서 유래했다. 신사임당도 허난설헌도 어릴때부터 천재성을 드러내, 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혼기가 찼을 때, 두 천재의 아버지 판단이 그들의 일생을 극과 극으로 갈라놓았다.
신사임당의 아버지는 아예 가문도 학식도 한참 모자라는 데릴사위를 데려와, 딸이 마음껏 자신의 재능을 친정집에서 눈치 보지 않고 펼치게 했지만, 허난설헌의 아버지는 문필에 능한 자기 딸을 5대(代)가 문과에 급제한 안동 김씨네 명문 가문에 시집 보내기로 했다.
문필가 집안에 문필가 며느리가 들어오면 귀여움을 받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그것은 완전히 오판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허난설헌의 비극은 여기서 시작됐다.
시대의 조류도 한몫했다. 고려시대부터 조선 전반기까지 내려오던 혼례풍습인, '남귀여가 (男歸女家)’는 남자가 여자 집에 의탁한다는 뜻으로, 데릴사위로 신랑이 신부집에 들어가 사는 것이다. 신사임당이 그랬다.
그랬던 풍습이, 조선 후반기로 넘어오며 ‘친영례(親迎禮·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신부를 데리고 와 본가에서 혼례를 올리는 방식)’로 바뀌었으니.....
혼례를 치른 신부는 당장 시집으로 들어가 살아야 했다. 혼례풍습이 달라진 조선 전반기와 후반기 바로 그 시점이 60년 앞서 태어난 신사임당과 후에 태어난 허난설헌의 인생을 갈라놓은 것이다.
허난설헌은 운이 나쁘게도 친영례의 첫 세대가 됐다. 열다섯 어린 새신부 허난설헌이 김성립에게 시집가 남자도 하기 어려운 한시(漢詩)를 지어 일필휘지로 써 내려 가니 문필가 집안에서 예뻐 하리라는 것은 친정아버지 허엽만의 생각이었다.
시집 식구들의 눈초리는 서릿발처럼 싸늘했다. 계속 과거에 떨어지는 못난 신랑 김성립은 주눅이 들어 집을 겉돌기 시작했고, 과거 준비하는 선비들의 합숙소인 접(接)에서 눈을 붙인다 해놓고 사실은 기방 출입이 잦았다.
시어머니는 제 아들이 마누라 기에 눌려 과거에 낙방한다고 입을 놀렸다. 허난설헌의 고난과 슬픔을 달래줄 수 있는 것은 시작 (詩作) 밖에 없었다. 시댁 식구들이 잠든 깊은 밤, 피를 토하는 소쩍새 울음을 삼키며 호롱불 아래서 붓을 휘둘렀다.
허엽은 본처와 사별하고 재취(再娶)를 맞아 2남1녀를 뒀다. 오빠가 명나라 사신이었던 허봉, 가운데가 허난설헌, 남동생이 <홍길동전>을 한글로 쓴 허균이다.
삼남매는 후처의 자식으로 과거에도 합격하고 등용돼 나라의 녹도 먹었지만, 서자에 대한 유교사회의 차별에 분노했다.
허균은 양반을 능멸하는 소설 <홍길동전>을 써서 양반들의 횡포에 짓눌려 살던 무지렁이들의 가슴을 뻥 뚫어줬다.
비록 훗날 그는 능지처참을 당했지만 말이다. 1580년, 경상관찰사를 마치고 귀경하던 아버지 허엽이, 상주에서 쓰러져 객사했다.
얼마 후 허난설헌의 어린 딸이 죽고, 이듬해 아들도 죽었다. 경기 광릉 땅에 두 남매를 묻었다.
아버지를 여의고 자식까지 모두 잃고 구곡간장(九曲肝腸)이 끊어지는 슬픔을 느끼다가, 배 속에 잉태한 자식도 떠나 보냈다.
몇 해 후, 허난설헌이 부모처럼 기대던 오빠 허봉이 관직에서 물러나 방황하며 술로 세월을 보내다 강원도에서 객사했다.
"아름다운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 붉게 떨어지니 서릿달이 차갑구나!"
허난설헌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을까. 이 시를 짓고 이듬해 천재는 요절했다.
그때 그의 나이 스물일곱! 그는 죽기 전에 한평생 세가지 한(恨)을 피력했다.
- 조선에서 태어난 것.
- 여자로 태어난 것.
- 남편을 잘못 만난 것.
그녀는 자기가 지은 시작(詩作)을 모두 불태우라고 유언했다. 동생 허균은 친정집에 숨겨져 있던 유작(遺作)과 불태워진 시를 기억으로 더듬어 살려내 허난설헌 시집을 발간했다.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왔다가, 허균으로부터 누이의 시집을 보고 북경으로 돌아가 <조선시 선집>을 발간하자, 허난설헌의 시는 폭발적 인기를 얻었다.<출처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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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기 청나라 황제가 사신을 파견하면서 가져오라고 명했다는 조선의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은 바로 조선조 최고의 여류시인 허난설헌의 시집이었습니다.
중국 황제까지 매혹시켰다는 허난설헌의 시는 마치 지금의 한류처럼 대단한 인기를 누렸습니다.
열조시집엔 당시 허난설헌의 시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꽃처럼 중국인들에게 회자됐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난설헌집'이 발간되고 150년이 흐른 뒤 청나라를 방문한 실학자 홍대용 그는 청의 학자로부터 그녀의 시에 대한 칭송을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황제와 대학자들도 칭송했다는 허난설헌의 시가 세상 빛을 본 건 남동생 허균에 의해서 였습니다.
누이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던 허균이 난설헌의 시 213편을 책으로 엮었는데 명나라에서 사신으로 왔던 대학자 주지번이시에 탄복해 중국으로 가져가 발간했던 것입니다.
난설헌의 시는 중국을 매혹시켰고 시집은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됐습니다.
시집을 내느라 종이값이 올라갔다는 애기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청의 황제도 존경했다는 천재 여류 시인 그러나 불운했던 조선의 여인 허난설헌.
그녀가 남긴 시 한수가 못다한 사랑을 읊고 있습니다.<YTN사이언스>
** 허난설헌(1563~1589)
조선의 시인, 화가, 문장가로 본명은 허초희(許楚姬)이며, 허옥혜(許玉惠)로도 전한다. 호는 난설헌(蘭雪軒), 자는 경번(景樊), 본관은 양천(陽川). 허엽의 딸, 허성의 이복 여동생이자 허봉의 동복 여동생, 허균의 동복 누나.
한국사에서 최초로 문집을 간행한 여성 시인인데 허난설헌의 친필 글씨가 있는 '유선사(遊仙詞)'가 양천 허씨 문중이 소장한 <양천허씨 5문장가의 묵적>에서 나오고, 무려 8살의 나이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란 작품을 써 문인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을 정도의 천재적 시인이었으며, 허엽의 12대 종손이 소장한 앙간비금도를 보면 화가로서도 자질이 뛰어났으나 조선에서 여자로 태어난 까닭에 재능을 펼치지 못하고 죽은 비운의 천재.<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