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물 선생님 이야기
아호를 ‘맹물’로 지어 사용하였던 어른이 계셨다. 동요<구슬비> 노랫말을 지은 권오순 선생님이시다.
당신 스스로는 개성도 재능도 없고, 맵거나 쓴 맛을 낼 성깔조차 타고나지 못해
‘맹물’로 호를 삼았다고 하셨지만,
맹물은 자연 그대로의 맛을 일컫는다. 따라서 맹물이란 명사는
순전히 한글로 된 우리말이다. 첨가물이 들어가지 않은 본래의 물맛과,
순전히 한글로 된 우리말과의 배합이 융숭깊다.
책꽂이에서 권오순 선생님의 자서전 『꽃숲 속의 오두막집』을 꺼내든다.
책갈피를 열어보니 갈색으로 변한 벚나무 잎 두 장과 사진이 나온다.
‘숲속의 오두막집’을 두고 멀리 수원시 장안구 조원동에 있는 ‘평화의 모후원’으로 떠나시기 전날,
마당에 떨어진 벚나무 잎 두 장을 주어 봉투에 담아주었던 것이다.
사진은 선생님이 제천지역에서 아주 떠나가신단 소식을 듣고
제천예총회장을 맡고 있던 박지견 시인과
그분 제자가 인사차 들려 함께 찍었다.
사진 속 풍경은 결빙이 시작되는 11월 중순이다. 맨드라미도 백일홍도 모두 목을 꺾었다.
두 평 남짓한 꽃밭에 가지가지 꽃을 심어 가꾸던 생명들도
한해살이를 마치고 떠나가는 것들의 잔해가 어수선했다.
그 어수선하고 성글은 풍경 속에서 그날 밤 우린 짐을 쌌다. 평소 당신이 아끼던 책은 거반
성당의 아이들을 위해 남겨 두기로 하고, 반닫이에 들어 있던 옷가지와 필수품만
박스에 차곡차곡 넣어
위목으로 밀어 놓았다. 그리곤 이브자리를 깔고 누웠지만 잠을 이루지 못했다.
1989년 충청일보에 칼럼을 쓸 때 인연을 맺어 6년 간 정을 나누어 온 우린
그날 밤 동침이 마지막이란 사실이
지레 중치를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죽음의 자리를 찾아 떠나는 이와, 보내는 자의 간극에 놓인 침묵의
중압은 결국 비음을 토해 놓고 말았다.
몸 무계 40kg에도 못 미치는 여인은 일찍이 ‘프란치스꼬’ 수도회에 입회하여 재속 수녀로
청빈과 겸손과 순명을 사명으로 알고 실천했다.
겨울이면 연탄을 아끼느라 윗목에 떠 놓은 자리끼에
살얼음이 얼곤 했다. 과일 한 박스라도 선물이 들어오면 그것 당신 몫이 아니었다.
동네아이들을 불러 몽땅 나누어줘야 배부른 어른이었다.
권오순 선생님은 191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으나 세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았다.
고열로 며칠 동안 사경을 헤매다 살아난 아이는 오른 쪽 다리를 심하게 절었다.
문밖으로 나가면 아이들이
‘다리병신’ ‘절름발이’이라고 놀렸다. 기가 죽은 소녀는 집안에 틀어박혀
아버지께서 어렵사리 구해다준
『한글말모이사전』을 끼고 살았다고 했다.
당시 아버지는 해주에서 처음으로 여학교를 설립한 재단 이사장이었다.
남달리 영특한 소녀는 부친이 사준 한글사전을 1년 반 만에 다 외웠을 뿐만 아니라
철자법까지 꿰차고 글짓기에 재미를 들였다. 시 짓는 형식이나 시법을 들어본 적도
없었으나 소녀는 눈으로 들어오는 사물의 모양새를 글말로 만들었다.
‘하늘에 달이 뜨면, 바다에도 달이 떴다’고 본대로 옮겼다.
그렇게 쓴 글이 1933년에 <하늘과 바다>라는 동시로
소파 방정환 선생님이 만드는 『어린이』 잡지에 입선되었다.
이로서 글쓰기에 자신감을 얻어 1937년에 쓴 <구슬비>는
아쉽게도 일본정부에서 한글 철폐를 내려 애초에 내고 싶어 했던 『소년』지 싣지 못했다.
대신 용정에서 발행하는 「가톨릭 소년」지에 실렸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구슬비>는 안병원선생이 곡을 붙여 초등학교 3학년 음악책에 실렸다.
서울에서 살고 있던 동생이 38선을 넘어와 이 소식을 알려주고 돌아갔다.
그날부터 선생은 남한으로 내려가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혔다.
아버지는 김일성 치하에서 토지개혁으로 재산을 몰수당하자 화병을 얻어 돌아가신 뒤였다.
어머니와 동생을 고모님께 맡기고 48년 10월 30일 밤배를 이용해 남한으로 넘어왔다.
그 후 6.25 전쟁을 겪었고,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전쟁고아들만 모인 <성모원>으로 들어가
5년 간 구호물자로 들어온 헌 옷가지를 뜯어 아이들 옷을 만들어 입히는 일에 봉사했다.
눈만 뜨면 재봉틀 돌리는 일은 고되었다.
몸이 허약해져 자립할 것을 결심하고 <성모원>에서 나와
월부로 재봉틀 하나 구입해 삯바느질을 시작했다.
하지만 기성복이 유행하자 몇 푼씩 들어오는 원고료로 방세를 충당하기엔 어림없었다.
성치도 않은 몸으로 열두 번이나 이삿짐을 싸들고 서울 변두리 촌을 전전했다.
이미 나이 60이었다. 더는 도시에서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닫고
성모원에서 함께 봉사하던 친구의 도움으로 충북 제천시 백운면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어느 날 귀인이 찾아왔다. 성당 교우 중 목수를 전업으로 삼았던 분이
부산으로 이사 갈 날짜를 잡아 놓고 인사차 들렸다.
선생님의 아이콘 <구슬비>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달달 외우던 동요였다.
감히 마주대하기 조차 어려운 어르신이 머물고 있는 방이 너무 비좁고 초라했다.
젊은이는 이사 날짜를 일주일간 연기하고 성당청년들을 모아 성당 뒤편에 있는
자투리땅에 터를 닦고 집을 짓기 시작했다.
건축비도 교우들이 십시일반 모아 일주일 만에 집짓는 공사를 끝냈다.
방 한 칸에 부엌과 쪽마루가 놓인 열 평짜리 집이었다.
하지만 남한으로 내려와 처음으로 내 집을 갖게 된 작가에게
그 작은 오두막은 당신만의 우주였고. 작품의 산실이었다.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자유로운 공간에서 나지막하고 소소한 것들에 대한 애정과,
눈으로 보고 감각하는 사물의 모든 형상을 천진하고 순연한 언어로 발현시켰다.
‘송알송알’ ‘조롱조롱’ ‘대롱대롱’ ‘송송송’ ‘보슬보슬’
‘솔솔솔’ ‘포로롬’ ‘풀각시’
이렇듯 권오순 선생님이 사용하는 부사와 형용사, 의성어의
스펙트럼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다양했다.
생전에 100편의 동시와 동화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유산으로 남기고
안성 미리내 성지에 잠드신지 18년이 되었다.
사진을 통해 맹물 선생님 얼굴을 뵈니 반갑다.
별이 총총한 밤이면 오두막집 자리가 궁금해 슬쩍 다녀가실지도 모른다.
아니면 은하수 강가에서 소파 방정환, 윤석중, 세분이 모여
퐁당퐁당 돌을 던지며 옛날 얘기를 나누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첫댓글 송알송알 싸리잎에 은구슬
우리 연배는
이 동요 모르는 이가 없을 걸요
귀한분과 인연이셨군요
그래요
세월이 지나도
오래도록 기억나는 좋은분이
누구나 가슴안엔
늘 자리하고 계시지요
2019년 권오순 탄생 100주년
행사를 문학의 집에서 열렸었습니다.
우리가 노래는 알아도 누가
노랫말을 지었는지는
대부분 모릅니다.
특히 동요은 더 그러했지요.
'장대로 달을 따서 망태에
담자'던 <달따라 가자> 동요도
지금은 사라졌습니다.
우리들 시대가 좋았지요.
스마트 폰이 없어 맘껏 동화책
읽을 수 있었고, 은하수 강가에
정말 견우가 살고, 직녀는
베틀에 앉아 비단을 짠다는
상상만으로도 우리들 영혼은
따뜻했습니다.
귄오순 선생님의
순수한 글과 삶을
새삼 느끼며 잘 읽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