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흔을 훌쩍 넘겼던 해의 어느 날, 부모님이 우리집에 왔다. 구석방에서 남편을 앉혀 놓고 내 이야기를 했다. 나는 관심도 없었다. 부모님이 가고 난 후 남편이 내게 말했다.
"자기는 무서운 년이래."
내가 대학을 졸업하자 아버지는 내게 한 푼의 돈도 더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대학원을 가야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더없이 완강했다. 아무리 그런다고 내가 포기하겠나. 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았다. 동생들을 다 모아놓고 연설을 했다.
"너희들은 오늘부터 다 학교를 자퇴해라. 너희들의 월사금은 다 내가 쓰겠다. 너희들중 한 놈도 밤새워 공부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우수한 놈도 없고 학문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놈도 없다. 미래에 대한 야망도 없는 너희들은 어정쩡한 놈들이다. 그러니 너희가 돈을 쓰는 것은 국가와 민족의 낭비다. 너희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교통표지판과 날아오는 고지서만 읽을 줄 알면 충분하다. 너희들은 이미 한글을 깨쳤으니 그만 공부해라. 그렇지만 나는 너무나 우수하다. 지금 공부를 중단한다는 것은 민족 자원의 훼손이다. 내 민족의 장래에 먹구름이 끼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이 더 이상 돈을 안 쓰는 것은 애국 애족하는 길이다."
동생들은 입을 쩍 벌리고 멍하니 나를 쳐다봤다. 그 광경을 부모님이 보고 말았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않고 내게 등록금을 줬다. 그날 남편은 부모님으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나는 그때까지도 부모님이 그렇게 선선히 등록금을 준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내가 동생들에게 한 일장 연설을 들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부모님은 남편에게 "쟤는 무서운 년이니까 너도 조심해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부모님은 남편이 나처럼 무서운 년과 10년이 넘도록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존경과 연민을 표했다. 백수였음에도 남편은 평생 내 부모님으로부터 무한한 동정과 연민을 받았다. 오로지 나와 살아준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김점선
1946년 개성 출생. 2009년 사망. 이화여대 교육공학과를 거쳐 1972년 홍익대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그해 여름 제 1회 앙데팡당 전에서 백남준·이우환의 심사로 파리 비엔날레 출품 후보로 선정되며 화려하게 등단. 그 후에도 기존 관념을 초월한 파격적인 그림으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혹독한 비판과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 87·88년 2년 연속 미술평론가협회가 선정한 미술부문 올해의 최우수 예술가로 선정.
대학다닐때 강의에서 이 글을 처음 읽고 정말 화통하고 배포가 남다른 분이라고 생각했었어. 근데 오늘 김점선 선생님의 과거 인터뷰를 읽다가 충격받은 부분이 있어서 아래 들고왔어...
"서른한살 때 남편을 만났어요. 카페에서 통기타를 연주하면서 노래하는 모습을 처음 봤는데 그 모습에 반해서 만난 첫날 ‘야! 너 나랑 결혼하자’고 제가 먼저 청혼했죠.” 그가 이화여대 교육공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한 후 다시 그림을 그리기 위해 홍익대 미술대학원에 다닌 엘리트인데 비해 세살 연하인 남편은 이혼까지 한 사람이었고 돈도 직업도 학벌도 아무런 배경도 없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세속적인 조건을 무시한 채 배우자를 선택하기엔 서른한살이라는 그의 나이테가 결코 적지 않았는데도 그는 망설임이나 갈등조차 없었다.
(중략)
그는 망설임 없이 곧장 동거에 들어갔고 친정부모님께 인사하러 갔다. 분명히 결혼을 반대할 것이라 생각하고 어렵게 부모님을 찾았는데 의외로 부모님이 쌍수 들고 환영을 했다. “제가 성질이 더러워서 결혼도 못할 줄 알았나봐요. 아버지랑 동생들이 이구동성으로 ‘쟤가 분명히 사기를 쳐서 남자를 꼬셨을 거야’ 하더군요. 나중에 알았는데 이날 아버지가 남편을 살짝 불러내 ‘매질’을 해서라도 제 성질을 꺾고 살라고 당부하셨나봐요. 친정에 다녀온 이후부터 호된 매질이 시작되었죠.” 그는 방탕이 아닌 진지한 예술 세계에 입문하기 위해 동거라는 선택을 했지만 남편은 달랐다. ‘네가 싫으면 날 떠날 테지’ 하는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했고 직업도 갖지 않았다. 사소한 말다툼에도 남편의 주먹과 발길질이 날아왔고, 급기야 어느날은 늦게 귀가한 남편에게 그가 심상한 말투로 ‘왜 이렇게 늦었어?’하고 말을 건네자 상상을 초월하는 주먹질이 날아왔다.
“그날 얼굴이 찢어져서 50바늘도 넘게 꿰맸어요. 어찌나 아프던지 10분 정도만 지나면 곧 죽을 것 같은 기분이었죠.”
(중략)
"아버지가 남편한테 ‘내가 때려도 된다고 그랬지만 어떻게 이렇게 심하게 때릴 수가 있는가?’라고 소리치시는 것을 보고 그때 처음 남편이 폭군으로 변한 이유를 알게 되었죠. 제가 남편을 나무라는 부모님께 ‘남의 부부문제에 간섭하지 말아!’하고 소리를 지르니까 부모님이 뒤도 안 돌아보고 그 길로 나가셨어요. 이 일이 있은 후부터 남편이 제 진심을 알아줬고 매질도 사라졌어요.”
19개월간 폐암 투병을 하던 남편은 죽음의 문턱이 점점 가까워 오자 그에게 “정말 고마워!” “정말 미안해!” 하는 말을 자주 건넸다고 한다. 세속적인 조건을 무시한 그의 사랑이 고맙고 그의 깊은 진정을 몰랐던 자신의 아둔함이 미안했던 것이리라.
^내 표정
생전 김점선 부부는 슬하에 아들을 하나 두었고 금슬도 나쁘지 않았다고 하네....^^사후에는 먼저 죽은 남편과 묘를 합장했대 저 글을 처음 읽은 후로 무서운 년이란 말을 당차고 강단있다란 뜻으로 생각해왔는데 지금은 완전 다르게 들리는것...
첫댓글 이게 뭐야...............................................................................................너무 답답하다
야이 한남충새끼야 니도 맞아라
때리라고는 했지만 이렇게 심하게 때리다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조까쇼 애비도 미쳤고 남편한남충새끼는 더더욱 좆같음 ㅠ
성님,,먹버만 하실것을,,
아씨....방금 밥먹었는데 체할 것 같다
으 앱충
몇줄 읽다가 댓글보고 내렸다 안봐도 뻔한 한남 재기시킬 썰
미친 이게뭐야
애비도 미쳤고 냄편충도 미쳤네..;
한남은 사회악
남편이나 애비충이나 좃팔;;
애비남편쌍으로돌았내
역겹다
..?
ㅠㅠㅠㅠㅠㅠㅠㅠ
나 지금뭐읽은거야 아 진짜남자들 노답
으
이런씨이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