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김왕규는 나를 심판할 자격이 없는 친일파이며 민족반역자요, 나는 적어도 우리 조선민족을 외세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으나 김왕규는 일제시대에 일본정부의 관료로 출세한 친일파요. 그런 친일파가 해방된 세상에서도 여전히 애국자 행세를 하며 설치고 있소. 나는 그런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싸웠던 사람이오. 김왕규는 자기 입으로 자기를 애국자라 하며 나를 비애국민으로 매도하지만 과연 누가 애국자고 누가 비애국민이오? 내가 취조를 받기 위해 검사 방에 갈 때마다 김왕규는 양담배를 수북이 쌓아놓고 피워댔소. 전쟁이 끝나고 우리 민족의 경제를 부흥, 발전시켜야 할 이 마당에 양담배를 피워대다니! 그가 과연 애국자요?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기 마련이오. 누가 애국자였고 누가 이 민족을 위해 살았으며, 누가 사형을 언도받아야 할지는 역사가 반드시 증명할 것이오. 당신들이 나에게 사형이 아니라 능지처참형을 선고한다 할지라도 나는 지금까지 내가 했던 모든 애국적 행위를 후회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미제의 앞잡이들이 선고하는 무엇도 인정하지 않소!”
(173)
아이를 낳던 날 방구들을 파내던 경찰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태어난 날부터 내쫓겼던 아이, 죽는 날까지 울음 한번 시원하게 터뜨려보지 못하고 쫓겨만 다니던 아이, 네 앞에서 결코 부끄러운 어미는 되지 않겠다. 무엇이 우리에게 이토록 질긴 운명과 슬픈 이별을 강요하는가. 어미는 그것을 부숴버리고야 말겠다. 이 땅의 모든 어미가 밥을 달라고 우는 아이 때문에 눈물 흘리지 않는, 그런 세상을 만들고야 말 테다.
언젠가 너를 다시 만나는 날 어미는 네게 당당한 모습을 보여줄 테다. 네가 큰 소리로 맑은 웃음을 터뜨려도 입을 막지 않고, 같이 웃으며 힘차고 뜨겁게 너를 안아줄 테다. 여기서 쓰러지는 건 아이를 두 전 죽이는 것과 다름없다고 그녀는 이를 악다물었다. 그러나 그녀가 아무리 내색하지 않아도 아이를 잃은 충격은 역시 컸던 모양인지 뱀사골에서 좀 좋아지던 건강이 다시 나빠졌다. 당사업을 제대로 하려면 건강이 최우선이었다. 예전처럼 다른 동지들의 짐만 될 수는 없었다. 한 사람의 일꾼으로, 아니 아이까지 두 몫의 일꾼으로 이제는 제 할 일을 다하는 투사가 되어야 했다.
(305-306)
지리산의 가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다. 산꼭대기에서부터 화려하게 타오르는 단풍이 아름답다고 생각한 순간 낙엽이 지고 거센 북풍과 함께 겨울이 닥쳐오는 것이다. 남부군의 마지막 낙원도 순식간에 지나갔다. 11월 초 서남지구 경찰병력이 총동원되어 비행기까지 합동으로 달궁을 공격해 들어왔다. 대형폭탄과 기총사격에 밀려 남부군은 결국 한 달여의 천국을 버리고 그 달 말까지 지리산 곳곳의 골짜기를 전전하면서 월동준비에 바빴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깊어가는 겨울과 함께 남한 빨치산을 거의 전멸시키다시피 한 그 유명한 수도사단의 공세가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후평에서 9백여 명에 가까운 대부대로 승승장구하던 남부군은 이 수도사단의 공세가 끝나고 난 후 150여 명 정도만이 간신히 살아남는다. 그 수많은 인민군 정규부대도 넘지 못한 낙동강을 넘어 종횡무진 적의 심장을 들쑤시고 다니던 남부군, 후평에서부터 지리산까지 몇 천 리 장정 동안 유격부대답게 후방의 적을 마음껏 섬멸하고 다니던 남부군의 사실상의 유격투쟁은 이제 막을 내리고 있었다.
(388-389)
남편의 얼굴이, 이현상, 박종하, 이진범, 양봉순, 다 기억할 수도 없는 수많은 얼굴들이 떠올랐다. 동지들의 피가 스미고 살이 썩은 이 산은 봄이면 더 눈부신 녹음을 피워낼 것이다. 이 산으로 언제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역사는 소용돌이치며 저 거대한 지리산의 산맥처럼 수많은 봉우리를 만들며 흘러갔다. 우리는 어떤 봉우리를 만든 것일까. 우리는 정상에 오르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우리의 또 다른 동지들이 정상으로 오를 것이다. ‘평등’이라는 말만큼 자신의 생명을 걸고 불꽃같은 열정으로 또다시 꿈꾸는 자들이 생겨날 것이다. 그리고 그 혁명의 물결 속에서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이현상도, 박종하도, 마실 동무도, 김 영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