兪致崇(1804년~?)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시현(時顯).
부친은 유서환(兪瑞煥)이며, 생부는 유일환(兪日煥)이다.
1825년(순조 25) 을유식년사마시(乙酉式年司馬試)에 진사 2등으로 합격하고, 1829년(순조 29) 기축정시문과(己丑庭試文科)에 병과(丙科) 37등으로 급제하였다.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 이조참의(吏曹參議), 이조참판(吏曹參判), 형조판서(刑曹判書),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1862년(철종 13)에는 진하겸사은부사(進賀兼謝恩副使)로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학문에 조예가 깊고 경서에 밝았는데, 특히 『상서(尙書)』를 깊이 연구하였다.
유치숭의 비는 2좌가 남아 있으며, 군산 임피향교와 김제에 남아 있다.
김제에 있는 비는 조금 독특 한 것으로 전면은 4인의 직책과 이름이 있고 , 뒷면에는 대제사적비 라는 碑銘이 있고, 비를 세운 내력을 새겨 두었다.
유치숭의 별단의 기록이 있어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三政의 弊 국역비변사등록에서 발췌 하였다.
端 등을 조목조목 열거한 全羅右道暗行御史 兪致崇의 別單과 그에 대한 대책을 보고하는 備邊司의 啓
헌종 14년 1848년 01월 07일 (음)
◯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전라우도 암행어사 유치숭(兪致崇)의 별단을 보니 그 하나는 군(軍)·전(田)·적(糴) 삼정(三政)을 바로잡는 방도를 도신이 특별히 열읍 수령에게 신칙하여 성의를 다하여 수행하게 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삼정의 폐단을 통합하여 논한 것입니다.
폐단은 실로 그러하지만 바로잡는 방도를 단적으로 말한 것이 없으므로 또한 하나로 지적하여 재처할 수 없습니다.
하여간 도신에게 관문으로 신칙하여 좋은 방도로 조처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그 하나는 영광(靈光)의 세곡(稅穀)을 법성포(法聖浦)로 이속한 후에 간사한 폐단이 거듭 생겨나고 낭비는 몇 배가 되었으니 이전대로 직접 납부하게 하고, 금구(金溝)·태인(泰仁)에서 군산창(群山倉)과의 거리는 다른 경계를 겹겹으로 거치고 각종 비용도 매우 많이 들며 금구에서 김제(金堤)의 해창(海倉)과 태인에서 부안(扶安)의 줄포창(茁浦倉)과는 매우 가깝고 모두 세창(稅倉)이므로 두 곳 다 우항(右項)의 두 창으로 이봉(移捧)하게 하는 일입니다.”...생략
유치숭 어사 비
임피향교 입구 비석군에 있는 유치숭의 비는 비제와 세운 시기만 새겨져 있다.
비제는 “어사유공치숭선정비(御史俞公致崇善政碑)‘라 되어 있고, 세운 시기는 ”戊申 九月“ 이라 되어 있어, 1848년에 세운 것으로 생각된다.
그 다음으로는 김제에 있는 비석이다.
이 비석은 다른 비와 다르게 전면에 4인의 직책과 이름이 새겨져 있어 독특함이 묻어 난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總衛士 서희순(1793년~1857년)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치회(穉晦), 호는 우란(友蘭). 아버지는 군수 서응보(徐應輔)이며, 어머니는 김현주(金顯柱)의 딸이다.1849년에 총위대장에 임명되었다.
徐公憙淳 총위사 서공희순
觀察使 洪公羲錫 홍희석(洪羲錫. 1787년~?) 조선 후기 문신. 자는 구서(龜瑞)‧낙서(洛瑞)이다. 본관은 풍산(豊山)이며,부친은 홍순호(洪純浩)이다. 1847년에 전라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관찰사 홍공희석 永世不忘碑
御史 俞公致崇 어사 유공치숭
郡守 鄭公世昌 정세창(1793년~?) 자 수이 본관 동래 1846년에 김제군수의 기록이 보인다.
군수 정공세창
왜 비석에 4명의 이름이 있는지 대한 내력은 다음과 같다.
大堤復舊事蹟
大堤卽邑基都水只而蒙利沓爲數百石落民賴以生故于令■■百敢有其邑
堤也丁未春金相俊者謂以■陳德惠總衛營屯監毁■作沓■■新洑于福
三農失利邑■憤怍■繡衣俞公之出道酌處何辛■■巡相洪公先以此弊
總衛營總衛士徐公關問便否以知郡鄭公■■■報■巡營者入鑑
--일부생략
所謂新洑一倂毁撤舊堤所缺隨處完築俾耕作諸民母■■業之地事傳敎
日卽修築此大堤復舊一前後未歷也嗚呼使令日堤■■■安業亶出於戎
聖上爲民德意而諸公承宣之澤亦不可泯沒堅碑于堤上■口面不忘盖此堤毁
下三月承■敎完築在同年 六月 偁
道光二十八年 戊申 七月 立
그림 어사 유치숭 명문이 있는 김제 대제복구 사적비
”조선 헌종 김제문화원에서 펴낸 “조상의숨결”에서 발췌 하였다.
14년 1848년에 세워진 대제복구비는 김제시에서 죽산으로 가는 23번 국도를 따라 2km 즈음 가면, 김제시 연정동 후신마을 도로 변에 있다.
이 비 앞면에는 대제를 목구 할 때 총위사, 전라도 관찰사, 김제군수의 대제복구에 대한 기린 공이 새겨져 있고, 비석 뒷면에는 대제를 복구 한 경위가 새져져 있다.
대제는 당시 김제동헌에서 서쪽으로 2리쯤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둘레가 8384 척으로 김제에서 제일 큰 저수지 였다.
따라서 대제는 인근 농민들이 농사를 짓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것이었다.
그런데 1847년 봄 김상준 이라는 사람이 총위영 둔감을 꼬여 대제를 없애고, 다른 곳에 저수지를 만들게 하였다. 그리고 대제는 그 들의 논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 농민들이 피해를 입어, 원망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이러한 사실을 보고 받은 임금이 그 잘못을 바로 잡으라는 전교를 내렸다.
이리하여 대제가 복구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완주 화엄사에는 유치숭의 편액이 남아 있다.
”어사유공치숭영세불망명(御史俞公致崇永世不忘銘)’ 이라 되어 있으며, 주된 내용은
화암사에 들린 어사 유치숭이 수행하는 스님의 부역을 줄여 주었다고 하여, “어사영세불망명”을 남긴 것으로 알려 졌다.
御史俞公致崇永世不忘銘 (어사유공치숭영세불망명)
始時玆寺 처음 이절을 방문 하니
僧殘役苦 쇠잔 한 중은 부역에 괴롭고
屛輿燭席 여러 가마와 화려한 자리
使行供億 사행과 공억에 힘들었네
爲山之瘼 산 같이 병이 들었는데
除之蠲之 제거하고 분명하게 밝히니
遺恩流澤 남기신 은혜 윤택을 두루 미치게 하시었네.
於乎難忘 어찌 잊을 수 있으랴
崇禎紀後 丁未 九月日 1847년 9월
花巖山人 春潭 謹識 화암산인 춘담 근식
첫댓글 위 내용은 앞으로 출간 될 책-조선의 암ㅎ애어사선정불비의 내용이다......55명의 안행어사와 155좌의 어사비 관련 글을 쓴 책이다.
수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