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보 / 김혜진 (해림)
금요일 이른 아침 딸내미 등교시킨 후,
한인상점에서 주간신문들 챙기고 간단한 장도 보고 돌아온 남편이 뭔가를 내 앞에 내민다. 밥
대신 떡을 즐겨 먹을 정도로 떡보인 나를 위해 “ 당신 떡 먹은 지 좀 됐지? ” 하며 모듬 떡과 백설기, 찰떡을 내미는 거였다. 남편의 작은 배려를 고마운 마음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련한 추억이 가을비를 타고 가슴에 스며든다.
내가 여중생이었을 때 엄마 손을 잡고 외할머니를 뵈러 외삼촌 댁으로
가는 길은 늘 신이 났었다. 엄마는 언제나 떡집에 들러 외할머니가 좋아하시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갓
쪄낸 찹쌀떡을 구수한 콩고물에 굴린 인절미와 동글동글한 오색 경단, 녹두 소나 팥 소를 넣은 반달 모양의
바람떡 등을 사곤 함께 반가운 마음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의 어린 시절 외할머니는
‘호랭이 할머니’로 유명하셨다. 어릴적 철없이 엄마 말 잘 안 듣는 맏딸인 내게는 말할 수 없이 따끔하고 무서우시지만 지혜로우시고 마음은 한없이
따뜻하고 인정이 많으신 여장부이셨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무렵 직업 군인이셨던 아버지가 부산에 연대장으로 가시게 되었고, 얼마후
엄마는 아버지 따라 저학년이었던 두 남동생을 데리고 부산 동래구로 내려가셨다. 나는 전학을 가면 다시
서울로 중학교 진학이 어렵다기에 외할머니와 서울집에서 한동안 같이 살았다. 외할머니는 캐나다의 오타와, 토론토 두 딸네 집에서 오랜 타국 생활을 하시다가 연로하셔서 얼마 전 그리운 고국 땅으로 돌아오셨다. 그리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외아들네에서 지내셨는데 나의 거취 문제로 한동안 우리 집에서 나를 돌봐주신 것이다.
그때는 어린 마음에 호랭이처럼
무섭게 생기신 외할머니가 그리 살갑지도 반갑지도 않았다. 오랜 외국 생활로 외할머니는 영어도 꽤 잘하셨고, 모든 일에 빈틈없이 야무지시고 현명한 분이셨지만 어릴 적 외할머니와의 추억이 없었던 탓인지 나는 쉽게 곁을
내주지도 다가가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상태로 지냈다.
눈이 어두워지시고 손이
떨려 외할머니는 내게 편지 대필을 종종 부탁하셨는데 그 서두는 언제나 “사랑하는 딸, 수야 모 보아라” 혹은 ”사랑하는
막내딸, 쏘니아 모 보아라”로 시작했다. 외할머니가 쓰시고픈 내용을 말씀하시면 나는 고대로 받아적기보다는 문맥에 맞게 적당한 어휘를 선택하여 좀 더
정감 가는 내용을 파란색 항공 편지지에 써서 부쳐드렸다. 외할머니는 캐나다에 두고 온 두 딸과 사위들, 손주들을 많이도 보고 싶어 하셨다. 애타게 기다리시던 캐나다 큰이모와
작은이모의 답장이 도착하면 예외 없이 외할머니 용돈이 캐나다 달러로 두둑이 들어있었다. 편지를 읽어드리는
것도 내 몫이었다. 낭랑한 목소리로 감정을 실어 편지를 읽어드리면 빙그르르 할머니 두 눈에 그렁그렁
맺히던 눈물…… 캐나다 달러 돈을 환전하는 날이면 외할머니는 내게도 넉넉한 용돈을 주셨다. 그래서였는지 아니면 그때부터 글쓰기를 좋아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외할머니의
대필 편지는 언제나 신바람 나게 써나간 기억이 난다. 나는 어릴 때부터 목소리와 글씨체가 예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고, 쓰기 상은 언제나 도맡아 타는 상이었다.
경상남도 진주가 고향인
호랭이 외할머니가 좋아하시는 음식은 토속적인 한식, 그중에 기억나는 것은 방아 나물 넣은 된장찌개랑
간장 양념에 볶은 가지나물. 그때만 해도 어린 여자아이라 나물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할머니의
밥상엔 언제나 가지나물이 빠지지 않고 올라왔다. 처음엔 떨떠름하던 맛이 차츰 나물 본연의 깊은 맛을
알아가며 가지나물을 진짜로 좋아하고 잘 먹는 어린 소녀가 되어갔다. 또한, 방아 나물 넣은 독특한 향의 된장찌개도 마치 우리 사이처럼 특별했다.
그렇게 서로를 알아가며, 무서운 호랭이 할머니 얼굴에 가린 속 깊은 살가운 정을 느끼게 되고 차츰 가까워질 무렵 외할머니는 다시 외삼촌
댁으로 옮겨 가셨다.
외할머니는 지병인 고혈압과
당뇨병으로 오래 걷지를 못하셨고 가파른 오르막이라도 오르시려면 금세 숨이 턱 밑까지 차서 쌕쌕거리시는데 마치 삐삐 주전자가 끓을 때 나는 쇳소리를
내셨다. 그런 몸이 불편하신 외할머니를 뵈러 엄마와 같이 외삼촌 댁에 갈 때면 난 언제나 외할머니에
대해 고마움과 그리움에 발걸음을 재촉했었다. 떡보인 외할머니 덕분에 나도 떡을 여러 종류대로 맛볼 수
있었기에 훗날 아니 이렇게 중년인 지금에도 떡을 그리워하며 사는지도 모른다. 이곳 캐나다에서 들은 외할머니의
비보 그러나 외할머니는 아직도 내 맘 깊은 방 한켠에 살고 계신다......
떡은 솜씨와 정성으로 빚는 잔치 음식이라 한다. 다양한 종류의 떡은 대체로 찌는 떡인 증병과 치는 떡인 도병, 지지는 떡인 전병, 삶는 떡인 경단으로 크게 네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이병학 여행전문기자의 서울 떡 박물관 기행글 중에서 발췌한 내용을 보면 아래와 같다.
[우리나라는 떡의 나라이다. 떡의 종류도 지역마다 천차만별이며 대략 200여 가지가 넘는다. 아기 백일 상, 돌상에 올라오는 백설기는 순수함과
장수를 뜻하고, 오색 송편은 아이가 품어갈 꿈을 상징한다. 붉은
수수 팥떡은 사악한 귀신을 물리쳐, 건강하게 자라라는 기원을 담고 있다.
명절 설날 아침, 한 그릇씩 비워야 나이를 한 살씩 더 먹는다는 떡국은 지금까지 자셔온 가래떡의 길이 만큼 오래오래 살기를 염원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우리 민족은 계절마다 절기마다
또한 생일날, 제삿날, 혼례식 등에도 수시로 떡을 빚고 쪄
먹으며 기쁨과 감사의 마음을 떡으로 나눴다. 가히 떡의 나라라 할 만하다.]
어릴 적 호랭이 할머니와의 추억으로 버무려진 떡에 얽힌 행복한 기억 때문인지 나는 자다가도 떡이라면 벌떡 일어나는
떡보이다. 지금도 모닝커피 한잔에 곁들이는 떡 한 조각의 간단한 아침이 참 좋다. 수많은 떡 중에서도 요사이는 두텁떡, 제주 오메기 떡, 영양 찰떡, 약식, 떡볶이가
특히 좋다. 한동안 안 먹으면 먹고 싶어 찾아서 챙겨 먹을 정도이니 이쯤 되면 나도 떡보가 아닌가 한다.
가을비 소리에 생전의 호랭이
외할머니가 더욱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녹차와 더불어 먹는 떡
한 조각의 행복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다.
첫댓글 목소리도 예쁘고, 글솜씨가 그때 부터인 게 맞네요.
할머니가 살갑진 않으셨어도 새록 새록 정이 든 거고 ...
그렇다면 우리는 떡보 동지네요. ㅎㅎ
나의 친정 아버지도 떡을 좋아하셔서 어머니가 떡을 자주 만드셨어요.
음 그때 그 떡 ... 먹고 싶어라.
소교님도 떡보?! 이시네요. ㅎㅎ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눴던 떡이나 음식이
추억으로 버무려지면 어디에서도 그맛을 낼 수 없지요. 대체불가랄까......
늘 관심과 애정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