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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짐을 지는 교회
갈라디아서 6:1-5
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1절을 좀더 명료하게 번역하면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행여 시험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고 살펴보면서)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무슨 범죄한 일”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어떤 심각한 범죄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 범죄가 공개적으로 드러난 경우를 말합니다. 드러났다는 것은 누군가가 범죄 현장을 목격하고 사람들에게 알렸다는 것입니다. 범죄자의 반복되는 죄악이 어느덧 들통이 났다는 뜻입니다. 그 동안 그 지체는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않고 육체의 소욕을 따라 행함으로 죄를 범하다가 결국 습관적인 죄가 되어 마침내 들통이 난 것입니다.
이런 일이 교회에 발생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즉, 교회 지체 중에 이런 범죄를 저지른 일이 공개적으로 드러나게 되면 교회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1절에 보니 교회의 문제 해결은 신령한 자가 나서야 한다고 알려줍니다. 여기서 신령한 자는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에 따라 살아감으로 성령의 열매가 풍성한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신령한 자들은 참 교회의 영적인 지도자들일 것입니다. 특히 교회의 담임 목사가 온전한 주의 종이라면 마땅히 담임 목사를 중심으로 하는 지도층일 것입니다. 그들이 ‘온유한 마음’ 가운데 범죄한 지체를 다루어야 합니다. ‘온유하다’는 것은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계속 주의 마음을 갖고 행동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열매 중에는 온유가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
즉,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훈련이 잘 된 사람이 성령의 열매로 맺혀진 온유한 품성으로 그러한 범죄자를 바로 잡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온유는 교만과 조급함과 이기심과 자기 영광을 구하는 자세와 반대되는 성품으로써 겸손과 성내지 않음, 그리고 관용하는 마음, 배려하는 마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1절에서 바울은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바로 잡고”는 헬라어로 (카타르키제테)인데 수술용어입니다. 의사가 대단히 조심스런 수술로 부러진 뼈 또는 부위를 수술하여 고치는 그러한 개념입니다. 이는 책망 및 엄중함과 더불어 따스하게 감싸는 그러한 온유함으로 범죄한 지체의 죄질 및 반복 횟수를 참조하여 권징을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 용어로 권징이라는 것은 권면하고 책망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교회 공동체에서 죄를 끊어내야 하는 교회 재판과 맞물릴 때는 교회의 치리가 됩니다.
그런데 이때 범죄한 지체를 다루는 사람은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해야 합니다.” 즉, 범죄를 다루는 것은 마귀가 역사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오해와 미움, 반항과 도전 등 무서운 일들로 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살펴보면서” 범죄한 자를 다루어야 합니다.
이때 “살펴보아”라는 단어는 (스코폰)인데 현재 분사로 쓰여 있습니다. 즉, 계속 내 마음과 생각의 움직임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는지 확인하면서 조심스럽게 범죄한 자를 다루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2절에서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너희’는 (알레론)이라고 되어 있는데 가정이나 교회와 같은 유기체적인 공동체를 뜻합니다. 갈라디아서는 교회로 보내어진 서신이기에 ‘너희’는 교회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즉, 교회는 유기적으로 한 지체가 전체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한 지체가 범죄 상태에 있고 아직 회복되지 못한 가운데 있다면 전체가 죄로 인해 큰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 있습니다. 그 전에 신령한 자들이 신속하게 드러난 범죄를 해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낼 수 있으며, 또한 복음의 능력으로 어둠의 세력을 철저하게 물리칠 수 있는 것입니다.
한편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고 했는데 여기서 ‘짐’은 원어로 (타 바레)입니다. (바레)는 매우 무거운 짐으로서 더럽고 수치스런 냄새 나는 짐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 짐을 담당한다는 것은 대단히 부담스럽고 피곤한 일이기 때문에 많은 지혜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공동체 내의 어떤 지체가 육체의 열매를 맺으면 누군가가 그 짐을 감당해야 하고, 그 짐을 감당하는 자는 대단히 힘들고 피곤하며 부담될 것입니다. 이때 범죄함으로 육체의 열매를 맺은 그 지체를 고쳐주고 그의 범죄가 공동체에 악영향 끼치지 않게 하려면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신령한 지체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롬 15:1-2).
하지만 만일 공동체 내에서 아무도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범죄로 인하여 생겨난 더러운 배설물 같은 결과물은 냄새를 진동하면서 공동체 전체에 악하고 어두운 영향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이 일을 감당해야 하고, 바울은 그 일을 신령한 자, 즉 영적으로 성숙한 자들이 마땅히 관여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범죄가 고린도전서에 명시된 특별한 죄악이고 그 죄악이 노출된 경우, 교회는 주께서 맡기신 교회의 권위로 그 지체를 신속히 권징함이 옳습니다. 물론 교회의 권징은 치리 후에 회개 및 회개의 열매를 보고 그 지체를 회복시켜 주어야 합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고전 5:11-13).
그러면 교회의 치리에 해당하는 범죄는 어떤 범죄가 있습니까?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고전 5:6, 11).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
그러나 바울은 이와 같은 범죄를 저질렀어도 회개한 자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기간을 둔 후 받아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
5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모두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6 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
7 (그러나 이제 충분히 징계를 받았고 회개하였으니)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8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그에게 나타내라
9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10 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11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고후 2:5-11)
지금 이 말씀은 몇 달 전에 권징을 받았던 그 형제가 회개하고 회개의 증거가 분명하게 나타난 경우, 이제 그 형제가 더 이상 근심과 좌절 가운데 있지 않도록 그 형제를 사랑으로 회복시켜 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형제를 회복시키는 문제에 있어서 바울은 독단적으로 행하지 않고 고린도교회의 지도자들이 바울의 권면에 동의함으로 그 형제를 회복 시키는 절차를 발기를 당부합니다.
즉,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그 범죄자의 죄악을 용서할 것을 바라고 권하면서도 그들의 결정을 존중합니다. 만일 그들이 결정하면 바울 역시 용서할 것입니다. 또한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의 동의없이 이미 용서한 일이 있더라도 그 용서는 그리스도 앞에서 고린도 교회를 위해 용서하였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글을 보면서 우리는 바울은 참으로 진실하며 또한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함께 섬기면서도 결코 사도의 권위를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교회가 용서와 사랑을 잃는 것은 사탄에게 속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탄의 계책은 교회를 더럽히거나 또는 한 영혼을 실족시키려는 것임을 밝혀줍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마귀에게 속지 않아야 하는데 이는 교회가 지체의 범죄로 인해 더러혀지는 것도 허락해서는 안 되지만 또한 범죄한 그 지체가 회개하는 경우 결코 그 지체를 잃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교회는 권징, 즉 치리와 용서 및 회복의 열쇠를 주의 뜻대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간교한 마귀의 계략에 속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약한 지체의 죄성이 교회의 영광을 해치고 교회 공동체에 무거운 짐이 되지 않도록 ‘미리’ 도와주고 기도해주면서 그 지체가 쓰러지지 않도록 돌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신령한 신자들은 아직 그 죄가 세상에 노출되지 않았다면 어떻게든 주의 자비와 용서로 그 지체를 싸매어서 그 지체가 회복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해야 합니다. 이처럼 다른 지체의 연약함과 죄성으로 생겨난 짐을 신령한 자들이 감당해 줌으로써 그 영혼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도록 사랑으로 구출해 주어야 할 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 안에 거룩과 사랑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법은 거룩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성취하라는 원어 (아나플레로세테)는 신령한 자들이 공동체의 부족한 면들을 채워서 교회가 사랑과 거룩으로 온전하게 되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엄청난 역사는 오직 사랑과 거룩함을 무한하게 함께 붙들고 있는 십자가의 속량에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속량으로 인해 예수께서 아버지께로부터 받아 보내시는 성령은 어디서나 사랑과 거룩함을 이루어냅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자는 성령으로 충만한 자로서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는 자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이 엄위와 진실함과 지혜와 온유 가운데 범죄한 지체를 다룰 때 교회에 거룩함과 사랑이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범죄한 자는 회개하고 거룩하게 되면서도 주의 사랑에 감격하여 더욱 교회 공동체를 온 맘 다해 섬기는 지체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3절은 범죄에 빠진 자 및 범죄에 빠진 자를 돕지 못하는 자의 특성을 알려줍니다. 이는 영적 교만에 빠져 스스로 기만하는 몇몇 사람들에 대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놀랍게도 그 특성은 신령한 자들이 보여주는 특성과 정반대입니다. 그것은 자기 기만입니다. 바울은 이를 “스스로 속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여기서 “스스로 속임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착각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그릇된 환상에 빠지거나 그릇된 판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아닌 상태인데 스스로가 뭔가 된 상태에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동체 내에서 범죄를 행하는 교만한 사람이 품는 가장 큰 특징입니다. 이러한 자들 때문에 교회 공동체는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들은 공동체 내의 다른 지체들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채워주는 대신에 판단과 업신여김이 앞서며, 행여 비난할 것이 있으면 앞장 서서 비방을 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세운 몇 가지 기준을 가지고 자신을 평가하고 대단히 의로운 줄 착각하지만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 들보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또한 마음이 미지근한 상태에 있는 자들로서 희생과 헌신은 없고 안일함에 빠져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지체들과 유사한 자들입니다.
[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계 3:15-18)
그들은 교만하고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이들에게는 주께서 인정하시는 열매가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
18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19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20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고전 3:18-20)
사랑하는 여러분!
내 자신이 영적인 착각 속에 있는지 확인하는 방법은 성령의 열매가 있는지, 또는 주의 양떼를 보살피고 양육하여 충성스런 주의 종들로 이끌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만일 복음의 열매, 거룩으로 양육한 열매가 없다면 내 자신이 대단히 영적인 사람이라고 착각하지 않기 바랍니다.
또한 2절과 함께 연결해서 보면, 교회의 연합과 건강함과 사랑을 위해 연약한 자들과 부족한 자들의 짐을 짊어지는 그러한 희생과 헌신이 없으면서 스스로 영적 교만에 빠져 있다면 그러한 자는 주 앞에서 문제나 일으킬 뿐 아무런 쓸모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모습은 바리새인적인 지체들에게 나타날 것입니다.
아무튼 바울은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존 칼빈이 말한 것처럼 참된 신앙은 하나님과 자기 자신을 바르게 아는 지식에 서게 되어 있습니다. 즉,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절대로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자신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이나 사람에 대한 올바른 자세를 취할 수 없습니다. 자신에 대해 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은 범죄한 영혼을 긍휼이 여길 수 없고 지은 죄로 인해 고통받는 자들을 동정할 수 없습니다. 또한 공동체의 다른 지체들의 결점과 필요에 대해 대단히 무감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기 자신을 바로 알고 자신의 연약함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허물로 가득한 형제들을 온유함으로 회복”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바르게 아는 자는 다른 사람의 짐을 지는 데 있어서 적극적이며 이에 그리스도의 법인 거룩한 사랑을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갖추는 것은 신앙 생활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거듭나지 않은 사람 또는 신자의 옛사람의 특징은 자기 기만입니다. 즉, 바울의 말에 따르면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의 자기 기만의 정의는 놀랍게도 교만의 특성과 정확하게 같습니다. 즉, 교만한 사람은 사탄처럼 언제나 자기 기만을 합니다. 피조물인 주제에 창조주를 대항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의 깊은 마음 속에 교만의 뿌리가 있기 때문에 어떤 모양이든 자신에 대해 착각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러한 자기 기만 현상이 나타납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율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즉, 절대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자기가 만든 기준 또는 사람들과 함께 만든 기준이 자신들을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이때 그들이 만든 기준은 이미 오류가 있습니다. 마귀의 속임수가 들어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틀린 잣대로 자기를 점검하니 자기 기만의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시대에 하나님의 율법을 모르는 개인과 사회는 전부 자기 기만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어리석음의 궁극적인 현상 중 하나가 동성 연애는 죄가 아니라 인간의 권리라는 주장입니다. 이런 기준에 의해 판단하게 될 때 사회는 모두 자기 기만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풍조를 따르는 것은 마귀에게 속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사상은 넓은 길로서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이라는 것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라”(엡 2:2-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그러므로 바울은 이 세상을 본받는 것은 마귀에게 넘어가는 것임을 로마서에서 암시하며 더욱 성령으로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심지어 율법을 들여다보면서도 자기 기만에 빠질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부자 청년은 바리새인들의 율법관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율법이 말하는 진정한 잣대를 알지 못하고 오직 율법의 겉모양만 취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율법을 잘 지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속이 거듭나지 않는 바리새인 종교인일 뿐이었습니다. 이때 그가 어떻게 율법으로 자신을 속이는지 들어보기 바랍니다.
[
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8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20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마 19:16-20)
그러나 예수께서는 율법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12:29-31).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막 22:37-40).
즉, 율법은 사람이 마음으로부터 지켜야 하는데 그것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의 권능으로 행할 때 율법의 정신인 하나님 제일 사랑, 이웃을 내 자신 같이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기만에 빠지는 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기준, 즉 율법의 기준이 외적인 행동 뿐만 아니라 마음 중심까지 점검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기만에 빠지는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율법 자체를 모를 뿐더러 알더라도 형식적으로만 취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기만 현상에 빠지는 두 번째 이유는 자신을 남들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일단 사회의 예절 및 도덕을 가지고 자신과 남들을 비교합니다. 그러면 “나는 아직 저 사람들에 비하면 매우 의롭고 멋진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자기 기만에 빠집니다.
종교적인 부분에서는 이런 자기 기만이 더욱 심각합니다. 그래서 심지어 바리새인처럼 기도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 18:11-12).
그들 마음 안에는 자신들의 불의와 위선과 악함을 볼 수 있는 빛이 없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 자기기만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 마음의 교만과 부패를 보시고 어리석고 악한 사람으로 여기십니다.
자기 기만에 빠지는 세 번째 이유는 과거보다 현재의 나를 보니 매우 좋아졌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이는 복음의 능력으로 변화 받은 그런 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어떤 외적인 부분에서 변화가 나타난 것을 보고 자기 기만에 빠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술 문제, 담배 문제, 혈기 문제 등을 절제하고 참게 되면서 이제는 나는 대단히 거룩한 사람이나 된 것처럼 착각하는 것입니다. 혹은 교회에 더 많이 참여하거나 신학 서적을 읽거나 신학교를 나오거나 성경을 좀 더 읽게 되면 이제는 나도 영적으로 큰 성장을 이룬 것으로 착각하며 자기 기만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판단이 앞서게 되고 남을 멸시하는 태도를 갖게 되며 사랑은 전혀 없고 메마른 사람이 되면서 오히려 더욱 마귀를 닮게 됩니다. 결국 그는 과거와는 달리 여러 변화가 자신에게 나타났지만 도리어 그 변화 때문에 더 무서운 자기 기만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늘 회개라도 했었는데 이제는 회개할 것이 전혀 없다고 느끼는 대단히 위험한 자기 기만의 위선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자기 기만에 빠지는 네 번째 이유는 이기심과 자기 사랑 때문입니다. 즉, 잣대를 대더라도 내게는 대지 않고 남에게만 대는 그런 심보입니다. 로마서 2장을 보면 유대인들은 잣대를 남에게는 대면서 자신들에게는 대지 않았습니다.
[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롬 2:1-3)
아마 이런 현상은 이 시대의 불신자들에게 가장 전형적인 모습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세가 신자들 사이에도 나타난다는 사실에서 교회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자기 기만에 빠지는 가장 큰 이유는 세상적인 물질, 명예, 인기, 권력, 건강, 미모 등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행여 세상적인 면에서 남들보다 낫다고 여길 때 영적인 면에서 자기 기만에 빠지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이렇게 세상 일에서 형통하는 것을 보니 하나님이 나를 복주는 것이고, 하나님이 나를 복 주시는 것을 보니 믿음이나 모든 면에서 나는 대단한 존재구나”라고 여기는데 이것이 바로 자기 기만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야고보 사도가 외쳤습니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약 4;4-5).
그러므로 자기 기만에 속지 않기 위해 우리는 교회 공동체 내에서 사회의 모든 계급장을 내려놓고, 물질도 없는 것으로 여기고, 인기와 권력 등 모든 것이 안개와 같다는 것을 알고 그런 것 다 떼고 오직 나 홀로 그리스도 앞에 서야 합니다. 그 후 나는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으로 나를 평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자기 기만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기준과 본으로 삼기 바랍니다. 그분의 삶과 성품을 성경을 통해 늘 확인하기 바랍니다. 또한 성경의 율법 및 계명,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훈을 거울로 하여 내 영혼의 마음을 비추어 보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만이 자기 기만에 속지 않을 수 있습니다.
[
22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3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25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약 1:22-25)
야고보 사도에 따르면 말씀의 거울로 나를 비추어 보고 내 마음 속의 더러운 것을 보게 되면 회개함으로 보혈로 씻고 주의 영으로 충만한 가운데 그 말씀에 순종해야 복이 된다고 합니다. 아무튼 일단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으로 우리 자신의 마음을 늘 비추어 보어야 자기 기만에 떨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기 기만에 빠지지 않은 자들이 되어야 정상적으로 연약한 지체들을 섬김으로 돌볼 수 있고 공동체 내의 범죄 발생에 대해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공동체의 짐을 늘 함께 지는 사람이 되어 언제나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복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에 4절을 보니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는 의미는 각각 자신에 대해 시험해 보고 확인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자기의 일”은 (토 에르곤)인데 나를 통해 나타난 행실 또는 열매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뜻은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으로 나의 삶의 행실을 점검하라. 그러면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또는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신앙 양심에 따라 보람과 뿌듯함(긍지)를 누릴 것이다. 이는 물론 하늘의 기쁨과 평안으로 나타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반면, 교만한 자들은 다른 사람의 평가에 예민하고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얻고자 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사람들의 영광을 얻고자 하기에 성령의 열매가 없고 하늘의 기쁨과 평안과 보람을 누릴 수 없습니다. 이는 이미 이 땅에서 상을 다 받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 이는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1, 18).
그리고마지막으로 5절을보면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고 말합니다.
5절에서 말하는 ‘짐’은 2절에서 말하는 ‘짐’과 다릅니다. 2절의 짐은 이미 우리가 확인한 것처럼 (타 바레)로서 매우 무겁고 냄새 나는 더러운 짐을 말합니다. 그러나 5절의 ‘짐’은 (포르티온)으로서 교회 공동체의 평안과 거룩함과 하나됨을 위해 각 개인이 맡은 책임량이라고 하겠습니다. 군대에서는 각 군인이 전투에 나가면서 배낭을 하나씩 지어줍니다. 즉, 그 사람이 군인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그 군인에게 필요한 물품들을 넣어 주는 것입니다.
아무튼 여기서 (포르티온)이라는 짐은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교회 지체들에게 교회의 덕을 위해 은사와 재능을 주셨고 각 지체가 경건의 훈련을 통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하셨기에, 매일 경건의 훈련에 힘쓰는 가운데 주께서 주신 은사와 재능을 주의 영광과 공동체를 위해 바르게 사용할 책임을 의미합니다. 이 의무와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신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상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벧전 1:16-17, 21-22).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9-10).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주의 몸을 구성하는 지체들이 힘써 교회를 건강하고 아름답게 세울 것을 당부하시면서 분명하고 확실한 약속을 하셨는데 그것은 그 세운 공로에 따라 상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
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고전 3:8-15)
사실, 교회의 성도들 중에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선한 의도를 진심으로 가지고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연약함 때문에 제대로 세우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물며 교회를 분열시키고 허물려는 의도를 가지고 그 일에 앞장선 자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반드시 임할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는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유기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인 갈라디아서 6장의 앞 장인 5장에는 신자 안에 있는 두 세력을 언급합니다. 그것은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입니다. 이 둘이 신자 안에서 끝까지 싸웁니다. 이때 거듭난 신자가 자유의지 가운데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자기를 쳐 복종시키고 성령께서 기억나게 하시는 주의 지시를 따르면 그는 성령을 따라 행할 것입니다. 그때 교회 공동체가 건강하게 서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죄성이 강함으로 지는 신자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면 그 성도의 죄성이 범죄로 드러나게 되면서 공동체는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때의 해답이 오늘 바울을 통해 주신 우리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 답은 서로 짐을 지라는 것입니다. 죄악이 드러나면 반드시 회개케 하되 함께 아파하라는 것입니다. 함께 아파하지 않고는 교회가 거룩함과 사랑으로 회복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체의 죄성으로 인하여 드러난 죄악을 정죄하기만 하고 회복시키지 못하면 교회는 유기체이기 때문에 무너집니다. 그러나 회개함이 없이 죄를 묻으면 그 공동체는 외적으로는 무너지지는 않더라도 내적으로 부패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가짜 교회, 배교의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건강하고 힘있는 거룩한 사랑의 주의 교회가 되려면 죄는 회개되어야 하고 그 영혼은 사랑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교회 공동체의 모든 지체는 각자의 죄성에 대하여 더욱 깨어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 6장 1-5절은 “그리스도의 몸”을 건강하게 세워 나가는 하늘의 지혜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저는 오늘 갈라디아서 6장의 교훈은 고린도전서 12장의 교훈과 연관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
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14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18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20 …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4 …오직하나님이몸을고르게하여…
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고전 12:12-14, 18, 20, 24-27)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 범죄를 보게 되면 진심으로 아파하면서 저 죄를 나도 지을 수 있는 것인데 라고 하며 기도로 서로 세워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사랑입니다. 결국 죄에 대한 회개와 회복과 경성은 그 공동체를 사랑으로 세울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의 능력이며 온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거룩한 사랑의 교회입니다. .
이제 교회의 각 지체들은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역할을 감당하기 바랍니다. 자신의 주제를 넘어서서 모든 것을 주장하려고 하지 않기 바랍니다. 손이면 손의 역할만 잘 하면 됩니다. 발이면 발을 역할만 잘 하면 됩니다. 발이 주제를 넘어 손과 코와 입의 역할을 다 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이것이 교만이요 스스로 속는 자기 기만입니다. 우리 각각은 가정에서든 교회에서든 주께서 맡기신 역할과 은사가 있으며 어떠한 유기체 안에서도 결국 나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일이 있습니다. 이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주께서 내게 그 유기체를 위하여 맡기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일에 충성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아버지는 남편 또는 아버지의 역할을, 어머니는 아내 또는 어머니의 역할을, 자녀들은 자녀로서의 역할을 잘 하면 그 가정은 천국이 됩니다. 이것이 각 지체가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해야 할 자신의 몫입니다. 이에 로마서 12장 3절에서 바울은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는 갈라디아서 6장 3절 이하의 내용과 동일한 말씀입니다. .
결론은 우리 모두가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꼭 붙들고 주의 영으로 충만하면 교회 유기체는 가장 건강하게 성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 (머리를 꼭 붙들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골 2:6-7, 19).
그리고 그렇게 자라난 신령한 형제들은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는 당부에 아멘하고 온 마음으로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귀한 말씀이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를 붙들어 주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pyright@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