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백남준(白南準) 사망
1932. 7. 20 ~ 2006. 1. 29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씨가 29일(현지 시각) 미국에서 74세로 별세했다. 백 씨는 이날 저녁 8시쯤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의 아파트에서 부인 시게코 쿠보다 씨와 간호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뒀다고 가족들이 전했다. 장례식은 수일 후 뉴욕 맨해튼 메디슨 애비뉴의 프랭크 켐벨 장례식장에서 거행될 예정이다. 서울에서 경기중학교와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대에서 미술사학을 전공한 그는 베니스 비엔날레(1993년) 독일 루드비히미술관 선정 ‘20세기 미술작가(1999년)’ 120인에 포함되는 등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2000년 정부로부터 금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연합) /조선 2006-01-30
비디오 아트를 창시한 공로로 금세기 최고의 실험적인 작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는 비평가들로부터 조각가, 행위예술가,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는데, 심지어 그를 ‘환상세계의 여행자’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거의 모든 비평가들은 백남준이 1960년대 초반 이래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예술가들 중에서 가장 도발적이고 혁신적인 인물이라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1964년] 제9회 동계 올림픽 개막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제9회 동계 올림픽 경기대회(Thd 9th Olympic Winter Games)는 1964년 1월 29일부터 2월 9일까지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Innsbruck)에서 개최, 36개국 1,091명의 선수가 참가하였다. 동계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실내 아이스링크가 아닌 6만 명 수용규모의 스키점프 경기장에서 개막식이 거행되었다. 통신의 발달로 이 대회부터 인공위성에 의해 텔레비전 중계를 하기 시작했다. 동계대회 사상 처음으로 성화를 그리스의 올림피아에서 채화하여 비행기로 운반했으며, 심판판정을 정확하게 하기 위하여 처음으로 컴퓨터를 사용하여 점수를 계산했다. 인도와 몽골이 처음으로 참가했으며, 루지경기가 새로 채택되어 남녀싱글과 남자더블 종목이 실시되었고, 이전 대회에서 제외된 봅슬레이가 다시 종목으로 추가되었다.
대회 전에 적설량이 부족하여 연습하던 영국 선수 1명과 오스트리아 선수 1명이 사고로 목숨을 잃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스키노르딕 50km에서 우승한 스웨덴의 에른베리는 3회 연속 출전으로 금메달 4개, 은메달 3개, 동메달 2개를 각각 획득했다. 소련의 L.스코블리코바 선수는 여자 스피드 스케이팅 500·1,000·1,500·3,000m 전 종목에서 우승을 차지하여, 동계·하계 올림픽 대회를 통틀어 첫 4관왕이 되었다. 한국에서도 남녀 7명의 선수가 출전했으나 입상권에는 들지 못했고, 사상 처음 참가한 북한은 한필화 선수가 3,000m스피드스케이팅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대회 우승은 금메달 11개의 소련이 차지했고, 오스트리아(금메달 4개)·노르웨이(금메달 3개)·핀란드(금메달 3개)·프랑스(금메달 15개)가 그 뒤를 이었다. /naver
[1963년]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Frost, Robert) 사망
← Robert Frost (1941)
1874. 3. 26 ~ 1963. 1. 29
샌프란시스코 출생. 남부 옹호파인 아버지가 남군의 R.리 장군의 이름을 그대로 아들의 이름으로 한 것이라고 전한다. 10세 때 아버지가 변사하여 뉴잉글랜드로 이주, 오랫동안 버몬트의 농장에서 청경우독(晴耕雨讀)의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 경험을 살려 후에 이 지방의 소박한 농민과 자연을 노래함으로써 현대 미국 시인 중에서 가장 순수한 고전적 시인으로 꼽힌다.
그 후 교사·신문기자로 전전하다가 1912년 영국으로 건너갔는데, 그것이 시인으로서의 새로운 출발이 되었다. E.토머스, R.브룩 등의 영국시인과 친교를 맺을 기회를 얻었으며, 그들의 추천으로 처녀시집 《소년의 의지 A Boy’s Will》(1913)가 런던에서 출판되었고, 이어 《보스턴의 북쪽 North of Boston》(1914)이 출간됨으로써 시인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이 두 시집에는 대표작 《풀베기》 《돌담의 수리》 《일꾼의 죽음》 등이 수록되었다. 1915년에 귀국하여 미국에서도 신진시인으로 환영받았다. 이듬해 제3시집 《산의 골짜기 Mountain Interval》, 그 후 《뉴햄프셔 New Hampshire》(1923) 《서쪽으로 흐르는 개울》(1928) 《표지(標識)의 나무》(1942) 등이 발표되었다.
신과 대결하는 인간의 고뇌를 그린 시극 《이성의 가면 A Masque of Reason》(1945)과 성서의 인물을 현대에 등장시킨 《자비의 가면 A Masque of Mercy》(1947)을 거쳐 1962년에 《개척지에서 In the Clearing》를 출판하였는데, 이것이 최후의 시집이 되었다. 또 J.F.케네디 대통령 취임식에 자작시를 낭송하는 등 미국의 계관시인적(桂冠詩人的) 존재였으며, 퓰리처상을 4회 수상하였다. /naver
[1953년] 중국의 국민가수 덩리준[鄧麗君] 출생
1953년 1월 29일 ~ 1995년 5월 8일
본명은 등려균(鄧麗筠; 덩리쥔)이나, 데뷔 후 등려군(鄧麗君; 덩리쥔)으로 불렸고 영문 이름은 Teresa Teng으로 이 이름은 일본에서 활동할 때도 '테레사 텐(テレサ・テン)'으로 계속 불렸다. 이 영문이름 테레사는 그녀 자신이 존경한다고 이야기했던 테레사 수녀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라고 이야기되었지만, 실제로는 그녀가 가톨릭 신자로서 자신의 세례명을 사용한 것으로 사후 밝혀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영화 첨밀밀(甜蜜蜜)이 소개되기 전까지는 그다지 알려지지는 않았다. 중화민국, 홍콩, 일본, 중화인민공화국까지 동아시아 대부분의 국가에서 절대적인 인기를 누렸으며 "아시아의 가희(歌姫)"라 불렸다.
1953년 중화민국(대만)의 윈린(雲林)현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중국의 허베이성(河北省), 모친은 산둥성(山東省) 출신으로 둘 다 본토 출신이다. 부친은 원래 국민혁명군(국부군)의 직업군인으로, 국공내전 후에 대만으로 쫓겨왔다. 그의 영향인지 군 위문공연에 열심히 활동하였고, 중화민국에서는 '군인들의 연인'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1970년인 16세때 당시 중화민국의 인기 드라마인 '징징(晶晶)'의 주제가인 '당신만 보면 웃음이 나요(我一見你就笑)'를 불렀고 그후 5년 정도 중화민국과 홍콩을 중심으로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1973년에는 홍콩에서 만난 '도라스(トーラス)'의 사장 후나키(舟木稔)를 만나 일본에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일본 활동
1973년부터 시작한 일본 진출에서 아이돌 계열의 노래인 '오늘밤일까 내일일까(今夜かしら明日かしら)'를 취입했으나 별 성과를 얻지 못하자 곧 엔카(演歌) 계열로 전환하여 '공항(空港; くうこう)'을 취입, 대히트를 하여 당시 '레코드 대상 신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1979년 인도네시아 위조여권을 사용한 것이 발각되어 국외 추방 당했다.
이 후 1984년까지 미국, 홍콩, 중화민국에서 활동하다 일본시장에 재입성, '속죄(償還; つぐない)', '애인(愛人; あいじん)'이 각각 150여만매,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겨(時の流れに身をまかせ)'가 200여만매가 팔리는 대히트를 기록, '전일본 유선방송 대상(全日本有線放送大賞)' 최초의 동서(東西) 유선 대상 3해 연속 대상 및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1985년 12월에는 생전 마지막이 되는 솔로 콘서트를 NHK홀에서 진행하였다. 또한 같은 1985년에는 조용필의 일본 활동 후 일본에서 유일하게 '돌아와요 부산항에(釜山港へ帰れ)'를 부른 가수로도 유명하다(단, 최초 취입은 1983년 渥美二郞. 이후 계은숙, 美空ひばり, 森昌子 등이 취입/노래).
1987년 이후 일본에서 그다지 활동하지 않다가 1994년 11월 NHK '가요 자선콘서트(歌謡チャリティーコンサート)'에 출연하였다.
1995년 취입할 예정이던 '잊지마(忘れないで; Time to Say Goodbye)'는 그녀의 사망으로 취입되지 않았다가 2001년 일본가수(幸治)에 의해 추도음반으로 발매되었다.
중국어권 활동
중화민국 출신으로 대만 및 홍콩, 마카오 등 중국어권 지역에서의 활동도 활발했다.
1979년 위조여권 사용 이후 중국어권에서 활동하였는데, 그녀 자신의 오리지널 노래도 흥행했지만, 주로 일본인으로 태어나 만주국에서 활동한 이향란(李香蘭; 山口淑子)의 노래들을 다시 불러 큰 인기를 끌었다. 이러한 곡들에는 '夜來香', '不了情' 등이 있다. 그러나 대만 출신이 문제가 되었는지, 이향란이 만주국(일본 괴뢰국) 찬양, 2차대전 종전 후 일본 귀국 활동 등을 한 이유가 문제가 되었는지,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은 1983년까지(실제로는 양안관계가 해소된 1987년까지) 등려군의 노래를 금하였다. 등려군은 천안문사건 반대집회 등 중국 민주화운동에도 참여하였고, '何日君再来'와 같은 항일노래도 불렀다.
1987년 일본에서 홍콩으로 이주하면서 활동적인 모습은 그다지 없었고, 홍콩 및 대만에서 활동만 유지하다 1990년 이후 홍콩 반환 등의 문제로 파리로 거주지를 옮겼다.
중국대륙에서 금지곡이었던 그녀의 노래는 인민]간에 높은 인기를 얻고 있었는지 많은 소문과 유언비어, 특히 콘서트에 관한 소문이 많았다. 양안관계 해소 후 실제로 그녀는 그러한 계획을 갖고 있었으나, 천안문사태를 야기한 공산당정부에 실망, 실현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죽음
그녀가 죽었다는 소문은 1990년, 1991년 한 번 씩 흘러나왔으나 유언비어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던 와중 1995년 5월 8일 요양을 목적으로 가끔 방문하던 태국 치앙마이의 메이핀호텔에서 기관지 천식 발작으로 사망, 향년 42세. 1990년부터 동거 관계에 있던 14세 연하 프랑스인 '스테판 퓨엘'이 최후의 간호를 했다. 같은 달 28일 중화민국의 타이베이에서 국장급의 장례가 치뤄져 전세계 3만여명의 팬들이 몰렸다. 그녀의 관은 중화민국 국기와 국민당 당기로 덮여졌다. 현재 묘소는 타이베이시 동북에 자리하고 있으며, 묘 앞에서는 동상과 레코드 장치가 설치되어 그녀의 노래가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 사람들은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사체를 화장하지 않고 그대로 매장하였다. 사후 50년 정도는 생전 모습 그대로 둘 예정이라고 한다.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기관지 천식으로 알려져 있으나, 마약 복용설, 민주화운동 및 반정부운동에 관련한 중공공산당에 의한 암살설 등 여러가지 의혹이 있다.
[1916년] 독일 비행선 최초로 파리 공습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바람을 이용해 이동할 수 있는 비행선(飛行船, airship)을 만들게 되었는데, 1900년 7윌 2일 독일의 F.체펠린이 경식 비행선을 제작한 데서 비롯된다. 그 후에 기술개발과 개조를 거듭하며 실용화를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910년 6월 22일 독일의 프리드리히스하펜과 슈투트가르트 사이의 480km를 20인승 비행선으로 항공수송을 개시하였다. 체펠린비행선은 제1차 세계대전 중 폭격기로서 파리를 폭격하고 바다 건너 영국까지 공습하였다.
이때까지의 비행선은 비행기보다 항속력과 적재량이 우수하여, 교통기관으로서 가장 실용적이라고 평가되었다. 그러나 비행기의 눈부신 발달로 비행선의 활용도가 급격히 감소되었다. 그러던 중 독일·미국 사이의 정기수송에 취항하던 당시 세계 최대인 독일의 힌덴부르크호(승객 50명, 화물적재량 18∼27t, 항속거리 1만 3000km, 선체의 길이 248m, 900hp의 기관 4대, 최대속도 135km/h)가 폭발하였다. 1937년 5월 9일 미국의 레이크허스트에 착륙하기 직전 수소가스에 인화되어 폭발함으로써, 승객과 승무원 대다수가 사망하는 대참사가 발생하였다. /naver
[1915년] 독립운동가 유인석 선생 사망
← 한말 위정척사론자겸 의병장이었던 유인석 선생.
항일 의병투쟁을 벌였던 의암 유인석(1842~1915) 선생이 1915년 1월 29일 사망했다. 강원도 춘성군에서 태어난 유 선생은 1896년 ‘격고팔도열읍’이라는 격문을 발표, 의병을 규합한 뒤 제천성에서 의병활동을 활발히 벌였으나 그해 5월 26일 관군의 대공세로 제천성을 내주고 서북지방을 거쳐 만주 서간도 회인현으로 옮겨 재봉기를 꾀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00년 귀국해 황해도, 평안도에서 후학을 양성했던 선생은 1908년 7월 고종황제 강제퇴위와 정미 7조약 체결 이후 67세의 노구를 이끌고 연해주로 가서 분산된 항일세력 통합에 주력했으며, 1910년 6월 ‘십삼도의군’ 도총재로 추대돼 항일 무력전을 전개하려 했으나 경술국치로 뜻을 못이뤘다. 그뒤 경술국치에 반대하는 연해주 한인대회를 개최, ‘적의 죄를 성토하고 우리의 억울함을 밝힌다’ ‘성피지죄 명아지원’이란 뜻을 가진 성명회를 결성했다. 국가보훈처는 선생을 2000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조선
[1915년] 동양화가 성재휴(成在烋) 출생
← 풍곡의 그림 ‘배암 나오라’
1915. 1. 29 경남 창녕 ~ 1996. 8. 29 서울.
호는 풍곡(豊谷). 19세 때 서병오에게서 서예와 사군자를 배우고, 이듬해부터 3년 동안 허백련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남종화풍의 그림을 배웠으나 점차 발묵(潑墨)을 중시하는 개성적인 표현을 갖추게 되었다. 1950년을 전후하여 〈고사 古寺〉(1947)·〈망월 望月〉(1950)·〈산운 山韻〉(1951) 등의 작품에서처럼 파묵(破墨)과 굵은 선묘에 의한 생동감 넘치는 운필로 독특한 개성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이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를 외면하는 재야 화가로서 1958년 실험적 성격이 강했던 백양회(白陽會)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이 시기에는 〈비조 飛鳥〉(1956)·〈꽃파는 여인〉(1958)·〈4·19〉(1962)·〈생동〉(1965) 등의 작품을 통해 필운의 기에 심취했다. 1970년대 이후에는 강렬한 색채를 과감하게 사용해 채색효과를 극대화하는 기법을 발전시켰으며, 특히 〈산〉(1976)·〈수로 水路〉(1977) 등에서는 화면의 구성에 있어서 굵은 먹선과 빠른 운필, 넓은 색면의 대비를 통하여 화려하고 동적인 화풍을 형성했다. 1955년 서울에서 첫 개인전을 연 이후 미국·중국·타이완 등에서 초대전을 가졌으며 중앙일보미술대전·현대미술초대전에 출품했고, 1987년 호암 갤러리에서 회고전을 열었다.
이 그림은 풍곡 정재휴(豊谷 成在烋) 화백이 한학자인 삼청 변영만(三淸 卞榮晩) 씨 댁에 놀러 갔다가 화의(畵意)를 얻었다.삼청이 영문 잡지를 읽다가 혼자 껄껄 웃는 걸 보고 풍곡이 연유를 물었다. 얘기인즉, 한 선비가 서재에서 술을 마시다가 뚜껑을 닫지 않고 잠든 사이 서공(쥐)이 술병을 밀어 넘어뜨리고는 술을 핥아 먹고 대취(大醉), "고양이 나오라."고 소리쳤다는 것이었다.
풍곡은 어떻게 하면 이 내용을 그림으로 담아낼 수 있을까 궁리 끝에 얻어낸 묘수가 쥐 대신 개구리를 택한 것이었다.쭉 뻗은 손(앞다리)과 발(뒷다리), 쩍 벌린 입, 툭 튀어나온 눈에 힘이 넘쳐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강한 필선에 힘까지 보태져 역동적인 그림이 되었다.기게 당당한 개구리의 모습에서 우리는 되레 역설적인 웃음을 찾아낼 수 있다.동양화 특유의 해학이 담긴 재미있는 그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담채로 그린 달무리가 분위기를 살려 서정성도 돋보인다.
[1907년] 대구의 서상돈 등 국채보상운동 시작
← 1907년 8월 22일, 일제가 국채보상운동 탄압을 위해 조사한 국채보상금모집 현황 사료.
1904년 고문정치 이래 일본은 한국경제를 파탄에 빠뜨려 일본에 예속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한국정부로 하여금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게 함으로써 한국민의 저항을 억압했다. 1907년에 이르러서는 한국정부가 짊어진 외채가 총 1300만원이나 되었다. 당시 한국정부의 세입액에 비해 세출부족액은 77만여 원이나 되는 적자예산으로 거액의 외채상환은 불가능한 처지였다.
이에 1907년 1월 29일 대구의 서상돈 등이 발기하여 전국민이 국채를 상환하여 주권을 회복하자는 취지로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이 국민대회를 열고 국채지원금수합사무소를 설치하여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전국민의 호응을 얻고 각종 신문이 후원하여 신문 캠페인도 벌였다. 이 운동이 실시된 이후 4월말까지 보상금을 의연한 사람은 4만여 명이고 보상금액은 230만원 이상이었다.
이와같이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일제는 이 운동을 극력 탄압 금지함에 따라 더 이상 전진없이 좌절되고 말았다. /조선
[1906년] 고종, 런던트리뷴 기자 더글라스 스토리에게 을사조약을 반대하는 밀서 전달
← 조선 제26대 왕(재위 1863∼1907) 고종
을사조약 체결 3개월이 지난 1906년 1월29일, 고종이 을사조약에 조인ㆍ동의하지 않았다는 밀서를 영국 런던트리뷴 기자 더글러스 스토리에게 전달했다. 밀서는 고종의 측근이 일본측 감시자들의 눈을 피해 스토리에게 전달했고, 스토리는 중국으로 건너가 기사를 영국 본사로 송고했다.
2월8일자 런던트리뷴 3면 머리에 한국의 황제는 실질적으로 포로의 신세다. 을사조약은 황제의 재가를 받지 않았다로 시작되는 기사가 6개항의 밀서내용과 함께 영문으로 소개되면서 한국의 실상이 로이터통신을 통해 세계각지로 알려졌다.
한국과 일본 신문에도 기사가 실려 평소 을사조약은 한일양국이 자발적으로 합의한 것이라고 주장해 온 일본을 곤혹스럽게 했다. 국권을 찾기 위한 고종의 노력은 여기서 그치질 않았다.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에게 일본의 야욕을 고발하는 친서를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하게 했고, 1907년 6월에는 이상설, 이준, 이위종 등 3명의 밀사를 네덜란드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보내 일제의 한국침략을 세계에 알리려 했다. 밀사 외교의 실패는 고종이 감내해야 했고, 결과는 7월19일의 강제퇴위로 이어졌다.
12세에 왕위에 올라 44년동안 망국(亡國)의 전과정을 지켜보며 일본의 불법성을 각국에 알려온 고종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무능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그의 치세동안 나라가 무너진 탓도 있었겠지만, 다분히 일제에 의해 조작된 측면도 컸다./조선
[1902년] 철강왕 카네기, 카네기연구소 설립
← 막대한 부를 학문과 예술발전을 위해 희사, 20세기 부자의 철학을 제시한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
부호는 시대와 그 문명의 거울이다. 그런 면에서 카네기만큼 시대를 반영하는 부자도 드물다. 카네기를 재벌로 만든 것은 산업주의의 쌀이라고 부른 강철이었다. 그러나 그는 미국 전역에 2,500개의 도서관을 지어 헌납한 기업가이기도 했다.
앤드류 카네기는 스코틀랜드 수직공의 아들로 태어나, 1848년 가족과 함께 미국의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로 이주했다. 어려서부터 방적공·기관조수·전보배달원·전신기사 등의 여러 직업에 종사하다가, 1853년 펜실베이니아 철도회사에 취직했다. 1865년까지 이곳에서 근무하는 동안, 침대차회사에 투자하여 큰 이익을 얻었다. 1865년 철강 수요의 증대를 예견하고 철도회사를 사직하고 독자적으로 철강업을 경영하기 시작해, 1872년 홈스테드제강소를 건설했다. 1892년에는 카네기철강회사(뒤에 카네기회사로 개칭)를 설립했다. 1901년 카네기는 이 회사를 4억 4000만 파운드에 모건계의 제강회사와 합병하여 미국 철강시장의 65 %를 지배하는 US스틸회사를 탄생시켰다.
부자인 채로 죽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이런 좌우명으로 평생을 살아온 카네기는 사업에서 은퇴하고 자신의 재산을 ‘나누기’ 시작했다. 먼저 1902년 1월 29일 워싱턴 카네기 협회를 설립했다. 공공 도서관 건립을 지원하는 재단이었다. 당시로서는 천문학적 액수인 2천5백만 달러의 사재를 털었다. 이어 그는 카네기 회관, 카네기 공과대학, 카네기 교육진흥재단 등에 모두 3억 달러를 기증했다. 카네기 정신으로부터 비롯된 ‘미국식 재산 사회환원’ 전통은 록펠러재단(3억5천만달러·1913년), 포드재단(5억달러·1936년) 설립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조선
[1886년] 벤츠가 만든 3륜차 역사상 첫 내연기관 자동차로 공인
← 칼 벤츠
1886년 1월29일 독일인 칼 벤츠(Benz, Karl, 1844~1929)가 제국 특허국에 3륜차를 등록했다. 이로써 특허번호 37435, ‘가스로 가는 자동차’인 이 3륜차는 역사상 첫 내연기관 자동차로 공인됐다. 이 3륜차가 ‘발명’된 것은 그 전해인 1885년으로 벤츠 나이 41살 때였다. 이 자동차는 다루기가 몹시 어려워 시험주행할 때 주변의 벽을 들이박기 일쑤여서 구경꾼들의 웃음거리가 됐다. 이 첫 차를 거리로 끌고 나간 진정한 첫 운전자는 벤츠의 부인 베르타였다.
자동차 발명역사에서 벤츠와 함께 우열을 가리기 힘든 사람이 고트리프 빌헬름 다임러(1834-1900)다. 다임러는 동료 빌헬름 마이바흐(1846-1929)와 함께 1886년에 시속 16㎞의 첫 4륜 자동차 ‘라이트바겐’을 만들었다. 이에 앞서 다임러-마이바흐는 1885년에 사상 첫 오토바이라 할 수 있는, ‘가스나 석유를 태워 움직이는 기계로 끄는’ 내연기관 2륜차(차체는 목제)를 특허등록하고 마차나 보트에 장착해 시험주행도 했다.
벤츠는 1886년 7월 다임러-마이바흐가 1885년에 특허등록한 가솔린(석유) 내연기관을 장착한 자동차를 내놓았다. 그는 이 차를 ‘벤츠 특허 모터카’로 선전하면서 판매했다. 사상 첫 자동차 판매사업으로 기록됐다. 하지만 이때 내놓은 25대(물론 모두 수제품이었다)의 판매성적은 별로 좋지 못했다.
그런데, 가솔린을 공기와 혼합해서 실린더속에서 압축해 점화·폭발시켜 동력을 얻는 4행정(연료흡입-압축-연소·팽창-배기) 내연기관(엔진) 자체를 발명해낸 사람은 다임러도 마이바흐도 아닌 니콜라우스 아우구스트 오토(1832-1891)였다. 오토는 1876년에 4행정 내연기관을 발명해 그 다음해에 특허등록했다. 그러나 오토의 이 내연기관은 실용화하기에는 아직 문제가 많은 초보 수준이었다.
3륜차 개발에 매달리던 벤츠사가 4륜차로 방향을 바꿔 실용적인 4륜차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1890년대였으며, 한때 기술적으로 오히려 앞섰던 다임러사와 합쳐 다임러벤츠가 탄생한 것은 1926년이었고, 1998년에는 미국 크라이슬러사와 합병해 다임러-크라이슬러(판매실적 세계6위)가 됐다.
내연기관 등장 이전의 자동차 엔진은 증기기관이었다. 1827년께는 영국 런던 등지에 증기기관 버스가 나타났고 1860년께는 프랑스에도 등장했으며, 미국에서는 1907년 포드의 T형 포드카가 출시돼 자동차 대중화가 시작됐으나 1920년대까지도 증기자동차가 팔렸다. 영국에서는 증기자동차가 도로를 파손하고 말과 사람을 놀라게 한다는 이유로 규제법까지 만들었는데, 빨간 깃발을 든 보행자가 선도하는 가운데 교외에서는 시속 6.4㎞, 시내에서는 3.2㎞를 넘을 수 없도록 했다. 그 탓인지 영국의 자동차 개발은 독일 프랑스보다 뒤처졌다. /한겨레
[1860년] 체호프[Anton (Pavlovich) Chekhov] 출생
← 체호프(1902)
1860년 1월 29일 태어남 / 1904년 7월 14/15일 죽음 "작가는 과자업자나 화장품 장수, 또는 연예인이 아니다. 작가는 자신의 양심 및 의무감과 계약을 맺은 사람이다." - 안톤 체호프
체호프는 19세기 러시아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작가들 중 한 사람이다. 뛰어난 단편소설 작가이자 희곡 작가로서, 인간성에 대한 빼어난 통찰력과 정교한 기법으로 일찍부터 명성을 얻었다. 특히 희곡 <갈매기 Chayka>(1896)는 연극사에서 근대극을 혁신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초연 당시 혹평을 받았던 이 작품은 2년 뒤 재공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고, 뒤이어 발표된 희곡들인 <바냐 아저씨 Dyadya Vanya>·<세 자매 Tri sestry>·<벚꽃 동산 Vishnyovy sad>과 함께 그의 4대 걸작으로 꼽힌다. 그는 평생 의사로서의 직업과 창작 생활을 병행했으며, 이러한 직업적 경험은 그의 작품들 속에 구체적으로 반영되었다./브리태니커
[1820년] 영국 국왕 조지 3세 사망
← 조지 4세, Thomas Lawrence 경이 1814년에 그린 미완성 초상화(부분)
1820년 1월 29일 영국의 국왕 조지 3세가 사망했다. 그는 1760년 할아버지 조지 2세의 뒤를 이어 국왕이 되었지만 통치 초기에는 7년전쟁으로 나라가 어지러웠다. 조지 3세가 국왕의 자리에 올랐을 때 대(大)피트와 뉴캐슬 공작 펠럼 홀리스가 정치를 좌우했으며, 뷰트 백작 3세인 존 스튜어트로부터 정치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전쟁후유증으로 재정이 위기를 맞고 정국이 불안해지자 휘그당의 에드먼드 버크는 조지 3세의 무능함을 비판했다. 1775년 식민지 아메리카 대륙과 전쟁이 시작되면서 재정은 파탄을 맞았다. 그는 동인도회사 개혁안을 둘러싸고 내각과 갈등하는 가운데 심한 조울증에 빠져들었다. 극도의 정신착란 상태에 이르자 조지 4세가 섭정으로 국사를 대신했다./브리태니커
[1802년] 미국국회도서관 처음 사서 고용
← 제퍼슨
1802년 1월 29일 존 버클리가 미국국회도서관의 첫 사서로 임명되었다. 국회도서관은 존 애덤스 대통령이 5,000달러의 예산을 할애함으로써 워싱턴에 설립되었다. 이듬해 처음 나온 카탈로그에는 소장도서로 서적 964종과 지도 9종이 기록되었다. 그러나 1814년 영국군이 워싱턴을 침공했을 때 국회의사당과 함께 3,000여 권의 책이 불탔다. 이후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이 국회도서관의 확장을 추진하면서 규모를 넓혀갔다. 1851년 또다시 큰 화재가 발생해 많은 책을 잃었지만 시민혁명 이후 소장도서가 크게 늘어 20세기 들어서면서 세계적인 도서관으로 자리잡았다./브리태니커
그 밖에
2002년 군산 유흥주점 화재로 여종업원 12명 사망
2001년 박지은, 미국LPGA 오피스데포골프대회에서 우승
1998년 15개국 국제우주정거장 건설 조인
1998년 필리핀 대법원, 이멜다 마르코스에게 징역 9~12년형을 선고
1992년 한국-우즈베키스탄, 국교 수립
1990년 제8차 남북체육회담 개최
1980년 이희성 계엄사령관, 김계원을 무기징역으로 감형, 김재규 등 6명에 형량 확인
1980년 KOC, 소련 올림픽 초청장 IOC를 통해 접수
1974년 대구시내 고교입시부정 적발
1974년 임충식 육군 대장 사망
1974년 구미 윤성방직, 화재로 전소(피해액 150억원)
1964년 러스크 미국 국무장관 내한
1964년 미국 초대형 인공위성 새턴 1호 발사 성공
1964년 제9회 동계올림픽 개막(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1963년 영국, 유럽공동체 가입 좌절
1963년 콜롬보회의 한국가입 가결
1962년 오스트리아 바이올리니스트 크라이슬러 사망
1961년 루안다 독립 선언
1960년 조병옥 민주당대통령후보 신병치료차 도미
1955년 언론인 김동진, 양재희 권총 피격사건
1940년 일본 오사카에서 철도 충돌. 191명 사망
1939년 한말 의병장 박윤식(朴潤植) 사망
1926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압두스 살람 출생
1910년 순천시민 3천여 명 시장세에 반대, 재무서, 관아등 日人점포 습격
1907년 대구의 서상돈 등 국채보상운동 시작
1905년 미국 화가 버넷 뉴먼 출생
1886년 프랑스 작가 로맹 롤랑 출생
1862년 영국 작곡가 딜리어스 출생
1843년 미국 제25대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 출생
1819년 싱가포르, 영국의 식민지화
1737년 미국 혁명이론가 토머스 페인 출생
1688년 스웨덴의 신비주의자 에마누엘 스베덴보리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