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엉이살림
(김성한)
올여름더위는 뒷심이 센가보다. 처서(處暑)가 지났는데도 한더위가 물러갈 줄을 모른다.
털, 털, 털! 거실에는 늙은 선풍기하나가 숨을 헐떡이고 있다. 휴가를 받아 모처럼만에 내려온 아들이 볼멘소리를 한다.
“이런 고물선풍기는 박물관에나 있을 것”이라고.
옆에서 그 소리를 듣고 있던 며느리가 아들 녀석 옆구리를 쿡! 찌르며, 아내눈치를 살핀다. 아내가 빙긋이 웃자, 며늘아기도 따라 웃는다.
하긴, 생판 틀린 말도 아니다. 이 선풍기는 서른 살을 훌쩍 넘긴 아들보다 나이를 더 먹었다. 시간선택조절은 물론 풍향(風向)조절조차 되지 않는다.
다리도, 날개도 부황증(浮黃症)을 앓고 있는 팔순 넘은 노인네 같다,
그러나 군소리한번 하지 않고 돌아가고 있다. 쉴 줄도 모른다.
정년도 없이 해종일 들일만 하는 허리 구부정한 할아버지같이.
그래도 고물선풍기는 바깥구경이나 하고 있으니 나은 편이다.
선풍기와 동갑내기인 녹 슬은 전기밥솥과 흑백TV는, 아예 창고 안에서 깊은 잠에 빠져버린 지 오래이다.
아내에게는 고치기 어려운 벽(癖)이 하나있다. 무엇이든 모을 줄만 알고 버릴 줄을 모른다. 도시아파트 생활이라는 게, 오래되어 못쓰게 되거나, 고장이라도 나면 버릴 줄도 알아야 되는데, 그게 잘 안 되는 모양이다. 선풍기나, 전기밥솥은 그냥 그렇다 치더라도, 신혼 때 입었던 양복과, 와이셔츠가 아직까지도 옷장에 걸려있다. 이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몇 달 전 모임자리에서 자조(自嘲)섞인 우스갯소리를 한 적이 있다.
“오랜 공직생활을 접고 보니, 남는 건 양복 스무 남은 벌에, 사오십 벌이나 되는 와이셔츠와, 닳아 해진 신발 열 켤레 뿐”이라고.
일일이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옷장이나 신발장이 그득하다.
가끔씩 아파트 앞·뒤 창고 문이라도 열어볼라치면, 고물장터가 따로 없다. 그것도 한물 간 시골 고물난전이다. 시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다듬잇돌에서부터, 놋그릇과, 이빨 빠진 질그릇, 제기(祭器)용기, 고장나버린 시계와, 우산, 구부러진 등산지팡이 등 다 늘어놓자면 한이 없다.
용하긴 용하다. 열 번도 훨씬 넘은 이사에도, 길을 잃어버리지 않고 여기까지 따라왔으니.
아내는 역마살 끼 있는 남편 때문에, 잦은 이삿짐 꾸리느라 고생께나 했었다.
얼마 전, 저녁 늦은 시간에 아내와 조곤조곤 따져보니, 서른 해 넘은 결혼생활에, 열네 차례나 이삿짐을 싸고, 풀곤 했었다.
도시만 해도, 대구에서 서울로, 동두천으로, 천안으로 떠돌아다니다가, 다시고향인 이곳으로 내려와서도 서너 군데나 옮겨 다녔다. 일일이 나열하기가 쑥스럽다.
지금이야 포장이사라고, 이삿짐업체에서 미주알고주알 다 챙겨주지만, 그 옛날에는, 이사한번 할라치면 몇날 며칠 동안, 몸 고생은 물론 마음고생이 말이 아니다.
그것도 한살 터울 꼬맹이들을 데리고 아내 혼자서.
가슴이 찡해온다.
얼마 전 TV에서 ‘부엉이 곳간’ 이라는, 다소 생경(生硬)한 프로그램을 본적이 있다. 부엉이는 온갖 것을 다물어오기에, 둥지에는 없는 게 없어서 생겨난 말이다. 그런데 셈에는 어두워 모을 줄만 알지, 빼낼 줄은 모르는 어리석은 동물이란다. 까칠하게 생긴 부엉이도 그런 면이 있다니….
문득 털털거리는 선풍기 앞에 앉아있는, 늙은 아내가 부엉이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간 빤한 공무원 봉급에 부엉이라도 닮지 않았으면, 집 한 칸이라도 제대로 마련했을까?
지난봄, 아내와 함께 집근처 스무 평쯤 되는 텃밭에 채소를 심었다. 주로 고추나, 참깨, 감자, 옥수수 등 이다. 다행히 어설픈 농사솜씨지만 그런대로 잘 여물었다. 요즈음 해거름 녘이면, 수확한 고추며, 옥수수자루로 승용차 트렁크가 불룩하다.
아파트 베란다에는 초가을 햇살에 얼굴이 빨갛게 달궈진 고추와,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옥수수가 가지런히 널려있다. 주름진 얼굴의 누런 호박도 가부좌를 틀고 참선(參禪)을하고 있다.
삭막하던 베란다가 밭알곡멍석으로 변해버렸다. 마음까지 풍성해진다. 여름 내내 뙤약볕에서 일하던 농부들의 마음(農心)을 조금은 알 것 같다.
그제 일요일 지인들과 등산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바리바리 짐을 싸고 있다. 지난 한철 땀 흘리며 기른 고추, 감자, 옥수수 등이다. 의아(疑訝)해서 묻는 내말에 ‘서울에 있는 아들·며늘아기한테 보내 줄 거라‘ 고 한다.
허, 허, 내참! 하도 어이가 없어 껄껄 웃었다.
모을 줄 만 알던 아내가 변해 버렸다.
부엉이 살림꾼인 아내도, 내리사랑 앞에는 쉽게 무너지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