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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점] 어느 겨울날
나쓰에는 요코가 전보다 더 혐오스러웠다.
“요코!”
아침마다 등교길에 요코의 친구들이 떼지어 요코를 부르러 왔다. 나쓰에는 그것조차 왠지 비위에 거슬렸다.
“요코는?”
도오루는 밖에서 돌아오면 으레 먼저 이렇게 물었다. 그것이 나쓰에를 약오르게 했다.
요코는 야단 맞을 짓은 거의 하지 않았다. 야단 칠 건덕지가 없다는 것도 나쓰에를 화나게 했다.
요코에 대한 이런 감정이 어디서 오는 건지 나쓰에는 미처 모르고 있었다. 그날 밤 술 취한 무라이의 고백이 나쓰에를 극도로 우울하게 만들었다. 무라이는 자기를 사랑하고 있었다. 자기를 사랑하는 남자가 딴 여자를 데리고 논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라이의 고백은 나쓰에에게 말할 수 없는 모욕이엇다. 무라이에 대한 증어나 분노가 어느새 형태를 바꾸어 요코에게로 향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쓰에 자신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요코에 대한 나쓰에의 싸늘한 태도는 어느새 게이조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차츰 요코에게 줄 초콜릿이나 책을 사 갖고 집에 돌아오게 되었다. 그것이 또 나쓰에의 감정을 자극했다.
‘좋아. 요코를 절대로 언제까지나 행복하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요코가 누구의 자식인 줄 알고도 남편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걸까?’
나쓰에는 마쓰사키 유카코의 일을 게이조와 아무 관계도 없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게이조의 아이를 낳고 싶다는 전화를 걸어왔을 정도라면 전혀 아무 일도 없었을 것 같지 않았다.
나쓰에는 불임 수술을 했기 때문에 더 이상 아기를 낳을 수 없었다. 그래서 유카코의 그 말은 그녀의 마음을 수시로 자극하여 그 상처가 깊게 곯아 갔다. 무라이의 고백으로 인해 나쓰에는 이중삼중으로 상처를 입고 있었다.
한편 게이조는 툭하면 유카코를 생각하게 되는 자기 자신을 의식했다. 병원 현관에 들어서면 문득 창 너머로 사무실 안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아침마다 ‘혹시나…..’하고 바라던 소망은 여지없이 좌절되곤 했다. 벌써 유카코의 책상에는 다른 사무원이 앉아 있었다.
유카코가 사라진 지 반 년이 지나도 게이조는 부질없는 기대를 걸고 사무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사표도 유서도 없었으니 어디선가 유카코의 시체가 발견되지 않는 한, 불쑥 들어올 것만 같았다.
게이조는 나쓰에를 안게 되는 날 밤이면 무라이에게 능욕을 당한 유카코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르곤 했다. 떠난 후에야 비로소 유카코는 게이조의 가슴에 살아 있는 것 같았다.
끝내 유카코의 행방은 묘연한 채 해가 저물어 요코의 3학기가 시작되었다.
“엄마, 급식비 주세요.”
요코는 오늘 아침까지 세 차례나 나쓰에를 재촉했다.
“급식비라고? 좀 기다려.”
나쓰에는 번번히 알았다는 듯이 대꾸를 하고는 바삐 부엌으로 나갔다. 요코는 녹색 코트 위에 검은 책가방을 멘 채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나쓰에는 부엌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요코는 다시 시계를 쳐다보았다. 학교 갈 시간이 빠듯했다.
“엄마, 학교 늦겠어요.”
“그래? 빨리 가렴.”
“급식비는요?”
“참 그렇지. 엄마 지금 바빠. 내일 줄게.”
나쓰에는 그릇을 닦고 있었다. 요코는 말없이 집에서 나왔다. 요코는 울고 싶었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기는 싫었다. 언젠가 학교에서 선생님이,
“땀과 눈물은 남을 위해 흘려야 해.”
하고 들려준 말을 요코는 좋아했다.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말이었다. 그래서 요코는 울고 싶어지면 얼른 이 말을 생각해 내곤 했다. 그리고는 방긋 웃어 보았다. 웃는 얼굴을 하면 마음이 차분해져 마음까지도 따라 웃게 되었다. 그럴 때면,
‘참 이상해.’
하고 생각했다. 지금도 요코는 웃어 보았다. 그러나 지금은 왠지 울고 싶어졌다.
‘그까짓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하고 요코는 생각했다.
요코도 4월이면 4학년이 된다. 나쓰에의 싸늘한 태도가 날마다 여러 가지 모습으로 몸에 스며들었다.
‘엄마는 병들어 있을 거야.’
요코는 이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어째서 급식비를 주지 않을까?’
요코는 알 수 없었다. 도오루에게는 오히려 성가실 정도로 챙겼다.
“도오루, 오늘 학급비 갖고 가는 날이야. 잊어버리지 마.”
그러나 요코는 이틀이고 사흘이고 재촉을 하지 않으면 돈을 주지 않았다.
‘내일도 주지 않으실 거야, 좀 기다리라면서.’
이날 학교가 끝나자 요코는 다쓰코의 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차비가 없어 걸어가기로 했다. 지금껏 요코는 시내까지 걸어가 본 적이 없었다. 다쓰코의 집까지는 십리 가까이 되었다.
다리 위까지 오자 사무라이 마을이 내려다보였다. 눈이 쌓여 난간이 낮아진 것처럼 보였다. 1학년으로 보이는 남자아이 네댓 명이 굵은 고드름을 가지고 칼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 옆에서 코트도 입지 않은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고드름이 부딪쳐서 흩어졌다. 얼음 조각이 여자아이의 뺨에 맞았다. 뺨이 빨개졌는데도 그 여자 아이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웃었다.
요코는 난간에 기대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도 같이 놀아주지 않는데도 웃고 있는 여자아이가 마음에 들었다. 요코는 힘차게 걸어갔다. 오늘은 선생님이 여느 때보다 더 엄하게 주의를 주셨다.
“언제나 돈을 잊어버리고 오는구나. 숙제는 잊지 않고 잘 해오면서 돈은 어째서 잊어버리는 거야?”
요코는 “아무리 재촉해도 엄마가 주시지 않아요”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요코는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꾸중을 듣고 있었다. 그러면서 다쓰코의 집으로 가려고 생각했다. 하늘은 개어 있었다. 학교에서 다쓰코의 집까지는 꽤 멀었다. 말 썰매가 지나간 눈길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걷고 또 걸어도 다쓰코의 집은 멀기만 했다. 걸어가는 동안 몸에 땀이 배었다. 버스 정류장에 있는 물빛 벤치는 눈으로 뒤덮여 등받이만 약간 보였다. 버스가 몇 대나 요코를 앞질러 갔다.
눈을 헤치며 겨우 다쓰코의 집 앞에 도착한 요코는 한숨을 내쉬었다. 현관에는 털이 달린 빨간 방한화와 아이들의 장화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요코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연습장으로 가지 않고 응접실로 들어갔다.
응접실에는 여느 때와는 달리 아무도 와 있지 않았다. 요코는 갑자기 배가 고팠다. 학교에서는 토요일이라 급식이 없었다. 요코는 코트를 벗고 난롯가에 드러누었다. 오래 걸은 탓인지 피곤하여 어느새 잠이 들었다.
사람들이 웃는 소리에 눈을 뜨니 다쓰코가 옆에 앉아 있었다. 어느새 응접실에는 대여섯 명의 사람이 모여 있었다. 다쓰코는 요코를 바라볼 뿐 아무말도 없었다.
“안녕하세요!”
요코는 다쓰코의 시선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야, 일어났군.”
고등학교 국어 교사인 이치가와가 소리를 질렀다. 다쓰코는,
“잘 잤니? 엄마한테는 전화를 걸어 놓았다. 더 자도 돼.”
하고 웃었다.
요코는 다쓰코의 웃는 얼굴을 보자 기뻐서 덩달아 웃었다.
“점심은 아직 안 먹었지?”
다쓰코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3시가 가까웠다.
다쓰코는 준비해 놓은 상을 요코 앞에 갖다 놓았다. 요코가 좋아하는 콩조림과 계란 프라이가 연어조림과 나란히 놓여 있었다. 다쓰코는 요코가 기뻐하는 얼굴을 보자 싱긋 웃었다.
“점령 중에는 전차에까지도 ‘점령국 일본’이라고 씌어 있었어. 알고 있어?”
갑자기 큰소리를 말한 사람은 아사히가와에서는 이름이 제법 알려진 시인 아자와(井澤)였다.
“뭐야, 그 ‘점령국 일본’이란?”
“‘일본이여, 그대는 나에게 잡힌 몸이로다’하는 뜻이지.”
“흥, 점령되었다 이 말인가?”
“피점령국 일본말이야, 식민지 일본이지.”
시인의 탄식 섞인 말이 여러 사람들을 웃겼다.
“웃지 말라고.”
“하지만 지금은 말랐든 시들었든 어엿한 독립국 일본이니까.”
고지식한 시인 아라이(新井)가 장기판에서 얼굴을 들며 말했다.
“하지만 아라이 씨, 그건 어디까지나 끈 달린 독립이야.”
시인이 말했다.
“원숭이 재주넘기야. 끈만 꽉 잡아당기면 주인의 어깨에 올라타고 어디든지 갈 수 있지.”
웬일인지 모두 잠자코 있었다. 요코는 눈을 반짝이면서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요코, 아저씨들의 이야기를 알아듣겠니?”
이치가와가 물었다.
“잘은 모르지만…….알아요.”
“허, 잘은 모르지만 알아? 그게, 남의 나라에 의지하거나 다른 나라가 시키는 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야. 사람 사이도 마찬가지야. 남에게 너무 의지해서는 안 되지.”
“다쓰코 씨네 밥을 너무 축내서는 안 된단 말이야.”
모두들 웃었다. 언제나 다쓰코의 집에서 얻어먹고 있는 패거리들이었다.
“다쓰코 씨는 남의 나라이고 우리는 일본이란 말인가? 이건 얘기가 좀 다른데.”
다쓰코는 싱글싱글 웃으며 차를 따랐다.
“요코, 미국에서는 말이야, 부잣집 애들도 대학 갈 돈은 자기 손으로 번다더구나.”
“영국도 마찬가지래. 대학에 가거나 결혼을 할 때 부모 신세를 제일 많이지는 것은 일본이라는구나.”
그때 요코가 물었다.
“미국에서는 초등학교 애들도 일을 해요?”
“초등학교 아이들에게는 부모가 돈을 내주는 게 당연해. 왜냐하면 의무교육이니까.”
시인이 대답했다.
“하지만 부모가 주지 않을 땐 어떡하지요?”
“부모가 낼 수 없을 때는 나라에서 내주지. 부모가 돈을 낼 수 있는데도 내지 않으면 벌금을 물어.”
“하지만 초등학교 아이들도 일을 하나요? 우유 배달이나 신문 배달 같은거…..”
다쓰코는 요코의 말을 마음에 새겨 두지 않고 말했다.
“요코, 밥 먹었으면 집에 가야지.”
“…………”
요코는 뭐라고 말하고 싶은 얼굴로 다쓰코를 쳐다보았다.
“아줌마가 데려다 줄까?”
다쓰코는 작은 소리로 물었다. 다쓰코가 이름 붙인 ‘응접실 패거리’들의 화제는 어느새 문학 쪽으로 옮아 가 있었다.
시인이 클로델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혼자서 갈래요.”
요코도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차비 있니?”
“없어요.”
“그럼 올 때는 어떻게 왔니?”
“걸어왔어요.”
“걸어왔어?”
다쓰코의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커졌다.
“왜 그래요?”
다쓰코의 옆에 있던 미술 교사가 다쓰코의 목소리에 놀라서 물었다.
“나 잠깐 밖에 나갔다 올게요.”
다쓰코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응접실을 나갔다. 그녀는 계단을 올라가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요코도 따라갔다.
“저 혼자 가도 돼요.”
요코의 말에 다쓰코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옷장 서랍에서 검은 바탕에 흰 줄무늬가 있는 하오리를 꺼냈다.
“저, 아줌마, 얼마나 일하면 3백 80엔을 받을 수 있어요?”
다쓰코는 하오리의 소매에 팔을 끼다가 동작을 멈췄다.
“어째서 아줌마에게 달라고 하지 않니?”
“하지만 아줌마는 남인 걸요.”
다쓰코는 어째서 엄마에게 달라고 하지 않느냐고 물을 수는 없었다. 버스도 타지 않고 걸어온 요코에게 무슨 곡절이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었다. 요코는 나쓰에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
‘엄마가 주지 않아요. 아줌마가 주세요.’
하고 솔직하게 말하면 어랜애다울 텐데 그렇게 말하지 않는 요코에 대해 다쓰코는 한편으로는 화가 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애처로운 생각이 들었다.
“그럼 혼자서 연습장을 청소할래?”
요코의 얼굴이 갑자기 빛났다.
다쓰코는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요코가 청소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연습장은 열 칸 정도의 다다미와 여섯 칸 정도의 무대로 되어 있었다. 요코는 다다미를 정성껏 쓸고 있었다. 빗자루 잡는 방법을 세 살 때부터 익힌 요코여서인지 빗자루 끝을 들지 않고 눌러서 쓸었다. 쓸고 나서는 무대에 마른 걸레질을 했다. 요코는 구석 쪽에서부터 힘껏 걸레질을 하기 시작했다. 마루에 무릎을 대지 않고 걸레질을 하는 모습은 제자들보다 나아 보였다.
다쓰코는 쉴새없이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무대를 닦는 요코의 모습을 제자의 춤을 지켜보는 엄격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요코는 다스코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지 않았다. 지금은 오직 바닥을 닦는 것이 즐겁기만 했다. 잘 닦아진 마루 판자가 반들거리는 것이 보기 좋았다. 요코가 이렇듯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는 것을 다쓰코는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물건이 될 거야, 저 애는.’
청소를 마치고 요코는 다섯 장의 걸레를 세 번이나 빨았다. 쓰레받이도 깨끗이 닦고 빗자루도 비누칠을 하여 말끔히 빨았다.
“너는 언제나 빗자루를 빠니?”
다스코는 마음속으로는 혀를 내두르면서 태연스럽게 물었다.
“언제나 빠는 게 아니라 더러워지면 빨아요.”
다쓰코는 요코의 일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5백 엔도 주고 싶고 천 엔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3백 80엔만 주었다.
“돌아갈 땐 어두워질 테니 데려다 줄게.”
시계는 4시를 지나 있었다.
차에서 내려 걸으니 게다 밑에서 소리가 났다. 떡가루를 밟는 듯한 소리였다. 추위가 심하다는 뜻이었다. 다쓰코는 검은 방한 코트의 어깨를 추켜올리는 시늉을 하면서 쓰지구치 집안으로 들어갔다.
“어머, 미안해. 데려다 주게까지 해서.”
나쓰에가 갓포(가사나 요리를 할 때 입는 덧옷) 차림으로 마중을 나오며 말했다.
“오늘밤엔 굉장히 얼어붙겠어. 게다 밑에서 빠드득빠드득 소리가 나자 뭐야.”
“언제나 폐를 끼쳐서 미안해.”
나쓰에는 응접실에 들어서자 고개를 숙였다.
“다녀왔어요.”
요코가 아무렇지 않게 인사하는 모습을 보자 다쓰코는 흘금 쳐다보며 웃었다.
“요코, 학교에서 오는 길에 딴 데 들르면 못써.”
나쓰에는 부드럽게 말했다.
“네.”
요코는 자기 방으로 달려갔다.
“요코가 무엇 때문에 나한테 들렀는지 알아?”
나쓰에는 다쓰코의 얼굴을 슬쩍 보고 나서,
“글세, 잘 모르겠는데.”
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요코가 아르바이트를 하러 왔어. 3백 80엔이 필요하다며.”
“뭐?”
나쓰에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선생님과 도오루는?”
“이층에 있어. 도오루는 내년이면 고등학교에 들어가야 하니까 요새 머리를 싸매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어.”
나쓰에는 화제를 돌려,
“고등학교쯤은 가고 싶은 아이들을 다 받아 줘도 좋을 텐데…….”
하고 말꼬리를 얼버무렸다.
“3백 80엔 정도는 줘도 되지 않아?”
다쓰코는 본론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머, 누가 안 준댔나.”
확실히 나쓰에는 주지 않겠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좀 기다려” 혹은 “오늘은 바빠서”라고 말햇을 뿐이다. 나쓰에다운 핑계였다.
“아무튼 나쓰에, 그 애는 3백 80엔어치의 일을 하고 집에 돌아온 거야. 아이에게 쓸데없는 걱정을 하게 한 거 아냐?”
나쓰에는 부엌에 가서 아궁이의 불을 들여다보았다.
“난 이렇게 바빠. 아침엔 특히 바쁘지 뭐야. 그래 그만 잊어버렸던 거야. 하지만 다쓰코한테 돈을 얻으러 가다니 번지수를 잘못 고른 것 같아.”
“부모가 나쁜 거야. 그런 순진한 애한테 괴로움을 주다니. 나쓰에는 옛날부터 인색한 데가 있더니 아직도 못 고쳤나 봐.”
나쓰코는 나쓰에가 심술궂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머, 인색하다니……너무해.”
나쓰에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쓰에는 결혼하기 전에 남한테서 무엇을 받거나 한턱 얻어먹고 나서도 좀처럼 답례를 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버지가 교수여서인지 아랫사람이나 학생들로부터 선물을 받는 데 나쓰에 자신까지 길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심술이 고약한가?”
“너무해, 다쓰코.”
하고 슬쩍 받아넘긴 나쓰에는,
“나 그런 심술꾸러기는 아니야.”
하고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확실히 그 웃는 얼굴에서는 심술궂은 면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쓰에는 방으로 들어갔다.
“요코, 왜 돈 같은 걸 얻으러 가고 그러니? 엄마에게 말하면 줄 게 아냐?”
요코는 나쓰에 쪽으로 슬쩍 눈을 돌렸다. 다쓰코 앞에서는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는 나쓰에의 심정을 요코는 알 수 있었다.
“저, 청소하고 돈을 받았어요. 저 앞으로도 일할 거예요.”
“일을 한다고?”
나쓰에는 당황하여 도움이라도 청하는 듯이 다쓰코를 바라보았다. 다쓰코는 모른 체했다.
“그래요……우유 배달이나 신문 배달이라도 할 거예요. 아니면 낫토(삶은 콩을 발효시킨 식품) 장사라도 좋아요.”
요코는 눈을 반짝이면서 즐거운 놀이라도 하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요코는 돈이 필요할 적마다 언제나 나쓰에에게 달라고 졸라대기보다는 직접 일을 해서 벌고 싶었다.
“어머, 관둬, 요코. 그러면 아빠와 엄마가 남의 웃음거리가 돼. 넌 병원 집 아이야.”
나쓰에는 애원하듯이 말했다.
“야, 오랜만입니다.”
도오루와 함께 서재에서 내려온 게이조가 말했다.
“선생님도 시험 공부를 하시나요?”
다쓰코가 가볍게 목례하며 물었다.
“이거 원.”
게이조는 쑥스러운 듯 목덜미에 손을 댔다. 나쓰에는 식사 준비를 하기 위해 부엌으로 갔다.
“도오루는 이제 아버지보다 더 크구나.”
“덩치는 커도 맨날 설교만 듣는 걸요.”
하고 말하는 도오루의 목소리는 변해 있었다.
“금년 봄에도 연습 때문에 고생이 많겠군요, 다쓰코 씨.”
게이조는 다쓰코를 보니 어쩐지 마음이 개운해지는 것 같았다.
“연습도 큰일이지만 자질구레한 일들이 많아요. 하지만 언제나 응접실에 우글거리는 패거리들이 잘 거들어 줘서 다행이에요. 회장 물색이나 프로그램, 회원권 인쇄에서 포스터에 이르기까지 어느새 담당이 결정되어 덕분에 도움을 많이 받지요.”
“그건 다쓰코 씨가 인덕이 있기 때문이겠죠.”
식사가 시작되었을 때 요코가 말했다.
“오빠, 나 일할 거야.”
“요코, 그런 얘긴 그만두자.”
나쓰에가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상하게 목소리가 날카로워 게이조와 도오루는 눈을 크게 뜨고 나쓰에를 바라보았다.
“뭐야, 요코, 무엇 때문에 야단을 맞았어?”
도오루가 요코를 감싸듯이 물었다.
“아냐, 야단도 치지 않았는데 신문 배달이나 우유 배달이 아니면 낫토 장사라도 하겠다잖아.”
나쓰에는 3백 80엔 얘기는 입밖에 내지 않았다.
“좋아, 일한다는 건 전혀 나쁘지 않아. 우리 선생님은 일한다는 건 딴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하셨어. 하지만 요코, 우유 배달은 날마다 해야 해. 그건 힘들어.”
도오루는 걱정이 되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오빠 맘대로 힘든 일이야. 일한다는 건 노는 것과 전혀 달라. 날마다 일해야 한다면 비 오는 날이나 눈 오는 날에도 쉴 수 없어, 요코.”
게이조의 부드러운 말씨가 나쓰에의 비위에 거슬렸다. 요즘 들어 게이조는 언제나 요코를 감싸는 듯한 정다운 말씨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난 일하고 싶어. 우리 반의 요시다도 신문 배달을 하고 있어. 나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해…..”
평상시의 요코답지 않았다. 도오루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는지 나쓰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요코, 너는 쓰지구치 병원 집 딸이야. 그런 네가 신문 배달이나 우유 배달을 할 수 있니?”
“왜 못해?”
도오루는 포크로 찍은 고기를 접시에 옮겨 놓고 씁쓸한 얼굴을 했다.
“왜라니…….?”
나쓰에는 도움을 청하는 듯이 다쓰코를 바라보았다. 도오루가 계속해서,
“일하는 게 어때서요?”
하고 말했다.
“일하는 건 물론 나쁜 일은 아니야.”
게이조는 나쓰에를 거들려는 심산이었다.
“그래요. 쓰지구치 병원 집 딸은 신문 배달을 해서는 안 된다는 법은 없으니까요.”
도오루의 말에 나쓰에에게는 반항적으로 들렸다. 분명히 도오루는 요코의 편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요코가 그런 일을 해봐. 아빠와 엄마는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돼.”
나쓰에는 말을 부드럽게 했다.
“웃음거리가 돼요? 왜요?”
요코가 순진하게 말했다. 그것은 진짜 몰라서 묻는 투였다.
“어렸을 때부터 일하는 건 가난뱅이들뿐이야.”
나쓰에는 요코에게까지 무시당한 것 같아 화가 치밀었다.
“그런 생각 전 싫어요.”
도오루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도오루의 말에 나쓰에는 기가 막혔다. 도오루에게 무시당한 것 같아서 괴로웠다.
“가난뱅이라니, 남을 그렇게 멸시해도 돼요?”
도오루는 가차없이 말했다.
“그건 엄마의 실언이야.”
먼저 식사를 마친 게이조가 재떨이를 끌어당기면서 말했다.
나쓰에는 게이조와 도오루가 합세하여 자신을 탓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럼 당신은 요코가 우유 배달을 하거나 낫토 장사를 해도 괜찮다는 거예요?”
“별로 나쁠 것도 없잖소? 하고 싶다면 해도 괜찮아요.”
“어머, 창피해.”
나쓰에는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로 말했다.
“왜 창피하다는 거예요? 전 도무지 알 수가 없어요.”
도오루가 말을 가로챘다.
“하지만 낫토 장사를 하다니……..”
“글쎄, 그 생각이 틀렸다니까요. 낫토 장사가 왜 나빠요? 의사는 좋은 직업이고 낫토 장사는 부끄러운 직업인란 말인가요? 엄마는 아주 구식이에요.”
도오루의 말에 나쓰에는 자기도 모르게 다쓰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쓰코 앞에서 창피를 당한 것 같았다. 아까부터 다쓰코가 잠자코 있는 것도 나쓰에는 불쾌했다. 뭐라고 좀 거들어 줘도 좋지 않은가 하고 나쓰에는 생각했다.
‘이 집 식구들은 하고 싶은 말을 좀더 솔직히 털어놓지 않으면 안 되겠군.’
다쓰코는 아까부터 이렇게 생각하면서 말없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요코는 무엇 때문에 갑자기 일을 하고 싶다는 거냐?”
하고 분위기를 수습하려는 듯이 게이조가 물었다.
“……….일하고 싶어졌어요, 그냥.”
“거짓말 마! 요코 너 돈이 필요한 거지?”
도오루가 요코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돈이 필요하면 엄마에게 달라고 하지 그래.”
게이조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나쓰에는 당장 다쓰코가 모든 것을 털어놓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3백 80엔 건’은 게이조에게는 물론 도오루에게도 절대로 알리고 싶지 않았다. 도오루 몰래 나쓰에는 요코를 냉대해 왔다. 그러나 도오루는 요코가 일하고 싶어하는 이유를 민감하게 알아차리고 있었다.
‘엄마가 돈을 주지 않은 게 틀림없어.’
“어떻게 할까, 다쓰코?”
나쓰에가 물었다.
“일하고 싶다면 일을 시켜도 좋잖아? 남이 뭐라고 하든 상관할 것 없어. 요코가 우유 배달이라도 시작하면 난 칭찬해 줄 거야. 설마 쓰지구치 병원이 아이들에게까지 일을 시키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겠지. 대견하다고 칭찬하는 사람은 있어도 흉보는 사람은 없을 거야. 요코, 엄마가 좋다고 하면 우유 배달이든 뭐든 해봐. 하루 이틀 히보고 싫증나면 날마다 일하는 아이는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하게 될 거야. 그것만으로도 공부가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