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길을 가며
―D·J·H에게
이은봉
저녁볕이 벌써 사위에 피어오르고 있다 서쪽 하늘은 아직 밝고 환하지만 머잖아 온 세상에 어스름이 깔리리라
북쪽 산언덕 밑에는 이미 저녁 그림자가 보금자리를 틀고 있다 시간의 발걸음이 이처럼 빨라지니 주위를 둘러볼 때마다 덜컹거리는 가슴이 자꾸 조바심을 낸다
발걸음 더욱 빨리 내디뎌야 한다 더 이상 머뭇대다가는 어둠이 오기 전 이 산언덕을 넘지 못할 수도 있다 마음의 바른 터전을 찾는 데 이처럼 많은 시간이 걸리다니
이제는 더 이상 더듬거리거나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 회초리를 들어서라도 나 자신을 더욱 부추겨야 한다 시큰거리는 왼쪽 무릎을 탓해 무엇하랴
멀찍이 밀쳐 두었던 낮 동안의 슬픔이 우르르 몰려와 또 절뚝이는 발목을 잡는다 별이 뜨고 달이 뜨더라도 밤길은 여전히 낯설고 서툴고 무섭다
그럴수록 어둠이 내리기 전, 땅거미가 깔리기 전 서둘러 옛 마을로 돌아가야 한다
거기 다수운 마음으로 끌어안아야 할 사람들이 있다 그들과 함께 일구어야 할 땅이 있다 뿌려야 할 씨앗이 있다
길가의 가로수들도 어느새 가을을 맞이하느라고 늙어가는 잎사귀들을 흔들고 있다
옛 마을에 이르면 둥구나무 밑에 모여 태극선을 부치고 있는 농부들의 손부터 잡아야 한다 이들과 함께 이룩해야 할 내일이 기다리고 있다
옛 집에 도착하면 등불을 밝힌 채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왁자지껄 지껄여대기도 해야 한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도달해야 할 꿈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저녁밥을 먹은 뒤에도 자리를 펴고 눕기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 있다 잠들기 전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올려야 할 기도는 무엇인가
너무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 날이 바뀌기까지는 시간이 꽤 남아 있다 나누어야 할 일들이 제법 남아 있다 그렇다 주어진 시간을 아껴 쓰며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된다.
―《시와사람》 2021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