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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가끔 만나 교제를 이어가던 동년배 목사 생각이 난다. 다부진 체격에 큰 목소리를 가진 부흥사 타입의 목사다. 흥분하면 더욱 커지는 그의 목소리에 주변이 의식되어 식당에서 가끔 소리를 낮추어 달라는 부탁을 해야 했다. SNS 프로필 사진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제대로 그려준다. 어느 교회인지 모르지만 규모를 짐작케 하는 널찍한 무대에 놓인 투명 강단을 앞에 두고 두툼한 질감의 화려한 박사 가운을 입고 설교하는 컷이 실려 있다.
영성의 흔적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영성의 결정판으로 인정받는 40일 금식을 해냈으니 말이다. 개척한 교회가 기대대로 부흥하지 않자, 떼 쓰듯이 40일 금식을 시작했고, 기어코 완주했다고 한다. 그의 깊은 종교성은 사소한 일에도 드러났다. 커피 한잔이 탁자에 올라와도 눈을 감고 고개를 숙여 기도한다. 그 앞에 기도를 잊은 채 덥석 들어 마시는 나는, 어떤 성도가 봤으면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모르는 의심스런 목사로 비쳐졌을 것 같다. 40일 금식의 화려한 경력에 주스 한잔을 마시기 전에도 종교적 예를 표하는 그는, 모양으로만 보면 흠 잡을 데 없는 성직자가 분명해 보인다.
헌데, 속에서 나오는 언사가 투영하는 생각과 마음 씀씀이는 그의 수련과 겉모양이 무색할 정도로 천박한 것에 놀란다. 감정이 격해지면 상스런 말은 예사이고 입에 담아서는 안될, 누굴 죽여버리고 싶다는 극한 말도 주저없이 토해냈다. 좀 전에 음료 한 컵 앞에 경건한 자세로 기도하던 목사가 저잣거리의 잡배로 돌변하는 것이다. 물론, 그의 입장에서 격정을 쏟아 낼 만한 억울한 일이 있었고, 꼬이고 비틀어지는 인생사에 시달리다 보니 폭발할 만하다고 여겨졌지만, 도를 넘는 일이 분명했다.
신학교 안에 기거할 때, 한번은 어떤 목사 부부의 생일 식사에 초대 받아 간 적이 있다. 그 자리에는 잘 아는 전도사도 참석했다. 그들은 신앙의 결이나 신학이 비슷했고 지나온 삶의 자취에도 공통점이 많았다. 일반적인 한국 목회자와는 달리 개방적인 신학의 틀과 자유로운 생활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이었다. 보수적인 신앙인이 조심하며 꺼려하는 오락과 취미를 즐기는 데에도 별 거리낌이 없었다.
식사가 끝난 후에 와인 한 병이 식탁에 올라왔다. 얼마전 와인 생산으로 유명한 지역을 다녀오면서 사온 거라 했다. 술을 입에 대지 않는 탓에 동참할 수는 없었지만, 생일 상을 물리고 와인 한 잔 정도 마시는 것은 특별한 날에 어색하지 않은 이벤트일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지켜봤다. 그런데, 약간의 시음 정도로 좋은 자리의 말미를 장식한 뒤 끝날 거라는 예상은 순진한 오산이었다. 주거니 받거니 술잔이 오가더니 다음 병이 오픈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병이 나왔다. 술판이 벌어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분위기에 끼어들지 못한 나는 이방인이 되었고, 어색한 자리를 피하느라 급한 일을 핑계로 자리를 떠야만 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동일한 이름표를 붙이고 있으면서 생각에 있어, 사는 방법에 있어 천차만별이다. 같은 기독교라는 우산 아래 있지만, 여러 신학과 삶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이 같은 실상은 확신의 경계를 정하고 안전한 길을 가고 싶은 신앙인들에겐 혼란스럽고 불편한 게 사실이다. 혹자는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없이 내가 속한 교단이나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따르면 된다고 외면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다수의 큰 목소리를 여과없이 수용하기보다, 묻고 숙고하며 참된 길을 발견하고 그 길을 걷고 싶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진실을 알고 그것에 기대려 할 것이다. 즉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무엇이며 그에 따른 삶의 방식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아 거기에 생을 담보하고 싶어 할 것이다.
2
시편 가운데 137편은 널리 애송되는 시 중 하나일 듯 싶다. 한때를 풍미하던 팝 밴드가 시의 전반부를 따와 노래로 만들어 히트했던 기억이 난다. 비록 짧은 애가이긴 하나 회화적인 묘사와 극적인 전개를 통해 묘한 미적인 여운을 남기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여기에 비슷한 환경에 놓인 독자의 감정을 어루만져 주는 효과도 지닌 것 같다. 하지만, 여러 긍정적인 외피 이면에 속속 배어 있는 날 선 정체성과 섬뜩한 감정의 표출은 읽는 이의 마음을 편치 않게 만들고 만다.
1우리가 바빌론의 강변
곳곳에 앉아서,
시온을 생각하면서 울었다.
2그 강변 버드나무 가지에
우리의 수금을 걸어 두었더니,
3우리를 사로잡아 온 자들이
거기에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고,
우리를 짓밟아 끌고 온 자들이
저희들 흥을
돋우어 주기를 요구하며,
시온의 노래 한 가락을
저희들을 위해
불러 보라고 하는구나.
4우리가 어찌 이방 땅에서
주님의 노래를 부를 수 있으랴.
5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아,
너는 말라비틀어져 버려라.
6내가 너를 기억하지 않는다면,
내가 너 예루살렘을
내가 가장 기뻐하는 것보다도
더 기뻐하지 않는다면,
내 혀야,
너는 내 입천장에 붙어 버려라.
7주님, 예루살렘이 무너지던 그 날에,
에돔 사람이 하던 말,
“헐어 버려라, 헐어 버려라.
그 기초가 드러나도록 헐어 버려라”
하던 그 말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8멸망할 바빌론 도성아,
네가 우리에게 입힌 해를
그대로 너에게 되갚는 사람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9네 어린 아이들을
바위에다가 메어치는 사람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새번역)
강제 이주를 당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 땅 바벨론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했다. 다행히, 바벨론 사람들은 히브리인들을 적대하지 않았고, 그들 가운데서 비교적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다.
그 땅이 살 만한 곳이었고, 세대가 바뀌는 긴 세월 동안 동방 문화 속에 노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강대국 바벨론에 동화되지 않았다. 융성했던 바벨론 문화에 젖어, 익숙한 바빌론 사람들과 어울리며 충분히 물의 없이 살아 가는 편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 길이 실리에 맞고 미래를 위한 현명한 처세로 보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 안에 돌이 되어 버린 선택 받은 백성이라는 정체성은 조금의 타협도 용납하지 않았다. 이 시에서 드러난 것처럼, 두고 온 땅 예루살렘이 그들의 뿌리이자 돌아가야 할 땅임을 집요하게 되뇌이게 했다(5, 6절).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다시는 민족이 그 땅에서 뿌리 채 뽑히는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도록 자극했다.
포로로 이방 땅 바벨론에서 살아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심정은 참담했다. 1절의 "바빌론 강변 곳곳에 앉아서 울었다"는 표현이 뒷받침해 준다. 더위를 피할 수 있는 바벨론 강변은 그 땅의 주인으로 사는 사람들이나 이방의 객이었던 유대인들의 쉼터이자 모임의 장소였다. 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떠나온 고국, 시온을 생각하며 울었다.
함께 있던 바벨론 사람들은 그들의 아픈 마음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듯, 버드나무 가지에 걸어 놓은 수금을 보고는 고향의 노래를 불러 자기네 흥을 돋우어 달라고 청했다(2-4절).
어찌, 주님의 백성이 주님을 찬양하던 노래를 이방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부를 수 있겠는가?(4절) 주님 만이 받으셔야 할 찬양을 속된 이방인들이 즐기도록 사용할 수는 없었다.
이로 인해, 시인은 오히려 더욱 견고한 다짐에 이른다.
‘절대 하나님과 함께 누리며 영광의 삶을 살았던 예루살렘을 잊지 않겠다’고.
‘비록 그 땅에 살지 못해도 자신의 뿌리는 그곳에 있다’고.
‘차라리 혀가 입천장에 붙어 버리고 손이 말라 비틀어져 어떤 재주도 발휘하지 못하더라도 마음만은 시온의 백성으로 살겠다’고(4-6절).
여기까지의 흐름으로 시가 마무리되었다면 다음을 읽는 이들이 어리둥절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본향을 향한 애절한 그리움을 키워가며 선택 받은 백성으로서 다져가는 옹골진 자세에 감동하며, 읽는 이 역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뼈 있게 살아 보고자 자세를 가다듬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는 여기에서 매듭을 짓지 않는다. 급격하게 방향을 바꿔, 준비되지 않은 독자를 혼미 속으로 이끌어 간다. 참으로, 당황하게 만드는 구절들을 펼쳐 놓기 시작한다. 유다의 심장 예루살렘이 무너질 때, 침략자에게 박수를 보내며 멸망을 기뻐했던 에돔을 기억해 달하는 시인의 간구까지는 동의할 수는 있겠다.(7절) 그렇지만, 이어지는 바벨론을 향한 극한 저주를 마주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수용할지 막막해진다.
“멸망할 바빌론 도성아, 네가 우리에게 입힌 해를 그대로 너에게 되갚는 사람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네 어린 아이들을 바위에다가 메어치는 사람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8, 9절)
정당한 복수가 용인되고 악인을 향한 저주가 당연했던 시대라 하더라도, 고조된 감정으로 ‘무고한 어린아이들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사람은 복 있다’고 기술한 마지막 시구 앞에서, 생각은 복잡해지고야 만다. 과연 하나님의 뜻이 반영된 저주로, 아니면 사사로운 감정의 표출로 받아 들여야 할지. 또 현재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이 부분을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해야 하는 건지. 필시, 납득할 만한 정리가 필요한 구절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당한 수모와 고통을 백번 감안하더라도, 어린 생명들을 무참하게 죽이는 사람을 복 있다 한 표현이 그려내는 극도의 증오심은 하나님의 마음과는 동떨어진 일그러진 감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북 왕국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앗시리아의 심장 니느웨의 멸망이 임박했을 때, 요나는 그 땅이 통째로 사라지기를 바랐던 예언자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달랐다. 요나를 불러 니느웨를 향해 멸망의 때를 선포한 이유는 그들에게 기회를 주시려는 의도였다. 비록 그 성이 진노를 받아 마땅한 악이 성행하는 이방인의 땅이었어도, 어린아이들을 비롯한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십이만이 하나님의 마음을 붙잡고 있었다. 적개심이 가리워 요나가 보지 못했던 소중한 영혼들을 주님은 크게 보고 계셨던 것이다(요나 4:11).
이 한가지 예로만 비추어 봐도, 시의 마지막 구절은 창조주 하나님의 속성을 반영하지 못한 분노의 배설 이상이 되기 어렵다. 강한 민족 정체성이 빚어낸 거침없는 폭력성의 단면을 전시하고 있을 뿐이다.
3
개인이나 집단이 보유한 강한 정체성은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특성으로 기울기 쉽다. 역사는 이를 여실히 증명해 준다. 사상이나 철학, 종교가 빚은 왜곡된 정체성은 시대마다 비극의 동인으로 작용했다. 정복과 학살의 역사 뒤에도 배타적인 정체성의 어두운 힘이 역사한 사례가 즐비하다.
종교 역시, 본질을 잃어버리고 단단한 정체성으로 강화될 때, 무자비한 야만성을 드러내 왔다. 유대 시온주의자들이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써 가고 있는 폭력의 기록들만 봐도 이를 입증해 준다.
타종교야 말할 것도 없고, 사랑의 종교라 일컬음 받는 기독교가 걸어온 길에 쌓인 부끄러운 과거 또한 일탈한 정체성이 남긴 유산이었다. 앞으로도, 강경한 정체성을 입고 보존과 확장이라는 명분 아래 무자비의 역사를 써 나아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 앞에 포용과 타협은 변질로 간주되고 용서와 사랑은 쓸데 없는 낭비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
사회적으로 한창 이슈가 되고 있는 동성애 문제에 대해 두터운 혐오의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동성애자들은 모두 잡아다가 죽여버려야 합니다.” 열심을 가진 어느 기독교도의 입에서 나온 언어다. 이것이 지나치게 보수적인 기독교 집단 내의 특정한 목소리라 치더라도 뭔가는 결여 되어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분명히 교리와 가르침은 그 사람의 편이 되어 주겠지만, 기독교 정신마저 그 메마른 마음의 편이 되어 줄지는 모르겠다.
앞서 언급했던 시의 주인공들인, 바벨론에 포로로 살았던 유대인들이 선민이라는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정체성의 포로가 되었을 때, 모든 사람을 향해 관심과 사랑을 품으신 자비의 하나님께 눈뜰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외눈박이처럼 특정 성경 말씀이나 삐뚤어진 전통의 구멍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투지를 다지는 우리 안의 사람들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보지 못한다. 사랑을 말하지만 그분의 사랑은 오로지 자신들이 구축한 교리에 부합하는 곳에만 흐른다고 믿는 것 같다. 그렇지 않은 곳에는 심판주의 진노의 눈길만이 머물 뿐, 자비는 없다고 간주하는 듯하다. 이에 따라 그들의 혐오와 무자비는 정당화된다. 그것이 정의로운 하나님의 편이 되는 길이며, 악을 대하는 적합한 대응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것 같다.
왜곡된 강한 정체성의 위험성은 단지 기독교의 본질을 잃어버리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 지향점이 외곬이어서 기독교 안에 잠재된 용서와 포용 같은 여러 미덕을 보지 못 할 뿐만 아니라, 화석이 되어버린 교리의 수호와 팽창이라는 단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권력을 탐하는 경향을 보인다. 즉, 권력이 될 만한 돈, 인맥, 정치적인 힘 등을 얻기 위해 다방면에 걸쳐 기지를 발휘한다.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권력이 효과적으로 성취해 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편향된 정체성으로 경도된 그들이, 포기를 모르고 정치 권력을 쥐어 보고자 뭉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며 도전하는 이유이자, 돈이 있어야 전도도 선교도 할 수 있다며 헌금을 독려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강한 유대교 정체성을 소유했던 바울은 권력을 적절하게 이용했다. 자신을 만든 종교를 수호하겠다고 자청하여 나섰던 열혈 청년은 그 사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권력이 필요했다. 당시의 권력자들은 크게 번지는 신흥종교를 잠재우는 일에 바울 같은 투철한 정체성을 가진 유대교 신봉자가 필요했을 터이고, 그가 권력을 얻는 데는 큰 장애가 없었을 것이다. 이 후, 권력을 손에 쥔 바울의 활약이 어떠했는지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만 봐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기독교가 전 세계적인 종교가 된 데에는 권력에 힘 입은 바가 컸음을 부정할 수 없다. 식민지 경영에 혈안이 된 권력을 동력 삼아 미지의 대륙과 섬 곳곳에 교회를 세워 신앙을 전수할 수 있었다. 상당 기간 지속되었던 힘에 의한 수월한 전파와 확장의 기회는 수명을 다했지만, 여전히 그 방법은 매력적인 호소력을 가진 것 같다.
어쩌면, 권력이 자신들이 공유하는 정체성을 빠르게 실현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더 견고해졌는지도 모른다. 정치적 야망을 위해 시대착오적인 정책을 불러와 유권자를 미혹하는 부도덕한 정치인일지라도 자신의 정체성을 실현해 줄 인물이라 판단하면 종교적 영혼을 팔아서 열광하며 빌붙는 모양이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본이라는 새로운 권력이 그들의 정체성을 곳곳에 심어 줄 것이라는 확신 하에, 그것을 앞세우고 선교의 이름으로 앞다퉈 미지의 세계로 진출하고 있는 현실이 말해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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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인가?
지극히 기본적인 질문을 던져 보는 까닭은 치우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 때문만은 아니다. 정체성이 모호하거나 아예 상실한 우리의 동료들 때문이기도 하다. 이들은 세속에 푹 젖어 육신의 즐거움을 채우며 살아가거나, 아니면, 삶의 쳇바퀴 속에서 무기력하게 겨우 그 이름의 명맥만을 유지하며 살아간다.
어떤 경우이든 그리스도인의 참 모습에서 빗나갔거나 멀어졌다면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는 단지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 거기에 머물자는 선에 그쳐서는 안될 것이다. 그 지점에서 다시 새롭게 시작하여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길을 잃지 않도록 언제나 그 자리를 확인하고 점검해 보는 기점으로 삼아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이름이 보여주듯 그리스도와 묶여진 사람들이고, 그분의 영역에 속한 사람들이다. 그분의 가르침이나 교리의 준수 여부에 의해 규정된 이름이 아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의해 부여된 이름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그리스도를 떠나 존립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두 개의 시민권이 있다. 하나는 하늘나라의 시민권이고(빌립보서 3:20), 다른 하나는 각자가 속한 나라의 시민권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두나라의 시민의 권리와 책임을 피할 수 없으며 어느 한 쪽에만 비중을 두고 살아가서는 안된다. 하늘나라 시민이라고 세상 시민으로서 책무를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가정, 사회, 국가에서 각각 차지하는 위치 가운데 맡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의무를 가진다. 다만, 거기에 임하는 인식과 태도와 행동에 있어서는 하늘나라 시민의 삶의 원리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하늘나라 시민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가시적인 세상에 살지만 비가시적인 하늘나라 시민이 가져야 할 품성과 행동을 나타내며 살아야 한다.
천국 시민인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살아갈 원리는 풍부하고 자세한 매뉴얼에 담겨 있다. 성경은 교리를 집대성한 추상적 경전에 머물지 않는다. 믿는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의식과 태도뿐만 아니라, 행동양식의 기준이 되는 원리를 소상하게 기술해 주는 실제적인 지침서의 기능을 한다. 그 안에 기술된, 말씀하시고 친히 본을 보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은 천국 시민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상세하게 드러내 준다. 그분은 용서와 사랑이 미쳐야 하는 범위, 시민으로서 존중하고 이행해야 할 의무, 재물과 세상의 것에 대한 태도, 그리스도인을 둘러싸고 있는 적대적인 환경과 거기에 대해 가져야 할 자세 등등, 천국 시민의 삶의 원리를 명시적으로 설명하셨다. 이에 더해, 제자들은 세속에 터를 잡고 천국 시민의 삶을 살아내야 할 그리스도인들에게 정교하게 다듬은 원리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준다. 당시의 제도 속에서 어떻게 또 다른 세계의 사람들(그리스도인)이 마찰과 충돌없이 조화롭게 살아가며 영향력을 끼질 수 있는지 친절하게 언급한다. 밖으로, 세상의 권력자를 향해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지, 어떤 태도로 주종 관계에 임해야 하는지, 가족 구성원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믿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지를 말해준다. 안으로, 공동체 내에서 간직하고 배격해야 할 가르침이 무엇인지, 리더십을 어떻게 대하며 성도 간에 지켜야 할 규범은 무엇인지, 현재의 위험과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대비하는 지혜로운 태세는 무엇인지 등 실제적인 삶의 방법을 가르치고 기록으로 남겼다.
헌데, 이 모든 실제적인 원리는 사랑과 거룩함의 토대 위에서 작동해야 한다. 둘 중에 하나라도 무너지면 기독교의 참모습은 변형될 수밖에 없다. 사랑 없는 기독교는 계율이 지배하는 경직된 종교로 남게 될 것이고, 거룩함을 상실한 진리는 설득력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교회의 태동과 함께 점점 기독교가 세상을 잠식할 수 있었던 힘은 색다른 교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돈이나 정치 권력의 힘을 빌어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그리스도인들의 혁명적인 삶에서 나왔다. 사도들이 자신들과 성도들을 “나그네”로 즐겨 부른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돈이나 정치 같은 세상의 권력에 기대어 생존하고 세력을 넓히는 데 관심이 없었다. 나그네로 하늘나라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저항이나 안정을 취하지 않는 대신, 그들이 발 붙인 거주지에서 그 어떤 권력보다 강력한 사랑의 힘을 행사하며 영역을 넓혀 갔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을 따랐던 그리스도인들이 보여 주었던 숭고한 사랑의 실천은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처럼 우뚝 솟은 거대한 제국의 산을 넘게 했고, 건널 수 없는 철학과 종교의 강을 건널 수 있게 했다. 무력과 정치적인 수완이 동원된 것도 아니고, 자금을 모아 사람들을 포섭한 것도 아니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핍박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했고, 목숨을 빼앗는 사람조차 용서해 주었다. 대적하기보다 피하는 편을 선택했고, 바꾸려 하기보다 인정하고 순응하기를 먼저 했다. 그리스도인의 이런 혁명적인 정체성과 삶의 실천이 세상의 권력이 할 수 없었던 변혁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랑과 함께 거룩함은 그리스도인의 행동 원리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 거룩함이 수반되지 않는 사랑은 위선의 탈을 쓰기 쉽다. 즉 모순된 행위가 된다. 사랑의 진정성이 의심받게 되고, 설득력을 상실하게 된다. 기본적으로 세상은 그리스도인을 향한 거룩함에 대한 기대치를 가지고 있다. 이에 미치지 못하면 귀를 막고 마음을 닫아 버린다. 거룩함의 토대 위에 교리나 사랑, 혹은 그 어떤 가치나 행위가 놓여져야 순수하고 참된 것이라는 보편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도들이 자주 성도의 거룩을 강조한 목적이 하늘 나라 시민의 자질을 갖추게 하는 데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복음이 설득력을 갖기 위해선 반드시 뒤따라야 할 삶의 표지이기 때문에 명시적으로 혹은 암시적으로 이를 강조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소금으로 비유하셨다. 말씀을 이끌어 가시면서 ‘그 맛을 잃어버리면’이라는 가정의 어법을 차용하셨다. 가정을 빌어 결과를 선명하게 설명하신 까닭은 맛을 잃어버리면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해서였다. 소금이 맛을 잃어버리면 무용지물에 불과한 것처럼 성도가 그 특성을 잃어버리면 아무런 효용을 발휘할 수 없다. 거룩함이 그 특성에 해당한다.
고차원적인 논리를 펴고 지고한 이론을 설파한다 해도 거룩함이 받쳐주지 못하면 사람들은 외면하며 비웃을 것이다. 반대로, 소박하고 단순한 진리를 말하더라도 거룩한 삶의 증거와 함께 다가갈 때 울림이 되고 긍정의 결과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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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개신교) 안에는 너무도 다양한(?) 주장이 분포한다. 양극단에 포진한 보수와 자유라는 신학의 프레임이 만들어 내는 소리, 그 사이에서 근소한 간격으로 줄지어 수많은 색깔로 이견을 내고 있는 형상이 우리의 자화상이다. 이를 우리 내부에는 다양성으로 해석하며 애써 긍정의 눈길을 보내는 어떤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분열상으로 읽어 내며 부정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다른 편에 선 많은 사람들이 있다. 우리 안의 견해가 어떠하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혼란스럽게 비쳐질 뿐만 아니라, 불미스런 모양새로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목소리와 신앙생활의 방법, 삶의 양태마저 각양각색이라 그들의 혼란은 더욱 가중된다.
이러한 혼돈 속에서 우리는 무엇으로 그들에게 어필할 수 있겠는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신학과 교리의 정통성으로 설득할 수 있겠는가? 혹은 개신교 안의 주류임을 주장하며 다수의 논리로 설득하겠는가? 어떤 것도 그들의 굳어진 불신을 해소시키지 못할 뿐더러, 우리 안에서 조차 수긍하려 들지 않을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삶으로 실현하는 참된 정체성을 통해 세상을 설득할 수 있다. 교파와 교단, 정파를 초월해서 각자가 안착한 곳에서 사랑과 거룩함을 바탕으로 한 하늘 나라 시민의 정체성을 구현해 나갈 때 사람들은 기독교의 실체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뒤에 실존하시는 생명의 예수님을 보는 데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결코 새로운 방법이 아니다. 지금은 잃어가고 있으나 신앙의 개척자들이 따르고 적용한 오래된 전통이다.
금식, 은사, 신앙 지식 같은 업적으로 치장하고 종교적 냄새를 풍기는 사람들이 기독교의 존재감을 높여주지 못한다. 이제는 우리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임을 과시하듯 거리에 앉아 거친 구호를 뿜어내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대변해 줄 수 없다. 세상의 방식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며 세상이 주는 안락과 쾌락에 취해 하나님 나라 시민의 정체성을 상실한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도전을 줄 리 없다. 맛을 잃어버린 소금처럼 영적인 생기를 잃고 세파에 무력하게 휩쓸리는 그리스도인에게 세상을 변화시킬 것에 대한 기대를 가질 수는 없다.
지금은 우리의 정체성을 다시 확인해야 할 때이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정체성이 참 모습에 부합한 것인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 치우치거나 왜곡되지는 않았는지. 모호해지거나 약해지지는 않았는지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런 뒤, 땅에 사는 하늘나라 시민의 정체성을 어떻게 세상에 실현해 나갈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며 찾고 실천해 나가야 한다. 우리 안의 어떤 특정한 부류에게만 내려진 사명으로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스도에게 빚진 모든 사람에게 부과된 의무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