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 시집 < 그녀가 웃어요 >의 시세계
김 병 중 (시인, 문학평론가)
1. 들어가면서
웃음을 찾는 사람들, 웃찾사로 통하는 웃음찾기는 요즘 계속 우리들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보다 많이 보다 세련된 웃음을 갖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은 웃음의 기술이라는 새로운 연구 분야와 웃음센터, 웃음강좌, 웃음경영, 웃음치료사와 더불어 웃음 바이러스와 웃음 詩까지 탄생시켜 나가고 있다.
문학 속에서 웃음은 그리 귀하지 않다. 삶의 이야기들이 질펀하게 웃음을 유발하는 작품들은 셰익스피어의 5대 희극을 비롯하여 김삿갓이 쓴 시 등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무겁고 비틀리고 줄여지고 어렵게 쓴 현대시들이 많을수록 문학은 독자들에게 점점 소외되고 설 자리를 잃고 만다. 그러므로 웃음이 묻어나는 시, 보다 재미있는 시로서 서민적 감성에 터를 둔 소박한 문화적 감수성을 자극할 필요가 있다. 웃음 詩는 가볍지만 낯익고 대중성이 있어 시에 웃음이 가미될수록 그만큼 작품의 소재와 내용은 체험적 진실 공유와 다면적이고 창조적인 영향력을 갖게 된다.
칼 조세프 쿠쉘은 “웃음은 마음의 치료제 일 뿐 아니라 몸의 미용제”라고 했고, 니체는 “웃음이 없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라”고 했다. 시적 진실과 웃음 속의 진실은 상호 동질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웃음의 심화 확대는 문학에 있어서 너무도 필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웃음은 인간이 만들 수 있는 표정 중에 가장 매력적이고 설득력 있는 표현이기에 우리는 이 시대를 사는 웃음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회탈같은 웃음을 가진 시인, 얼음도 녹일만큼 따뜻한 미소를 가진 김영희 시인의 <그녀가 웃어요>라는 시집으로 보다 순수하고 흡인력 있는 웃음바이러스를 전염시켜 보고자 한다.
2. 웃음 방정식의 본질
인간은 웃는 재주를 가지고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이는 다시 말해서 웃는 행위를 통하여 희로애락의 마음을 표현하고 그 표현을 매개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토마스 칼라일은 “진리는 웃음을 동반하고, 진정한 유머는 머리에서 나온다”고 했고, 찰스 디킨스는 “질병과 슬픔이 있는 이 세상에서 우리를 강하게 살도록 만드는 것은 웃음과 유머 밖에 없다”고 했듯이 웃음은 인간으로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행위이며, 웃음은 곧 속마음에서 우러나온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많이 웃는 사람은 행복해지고 많이 우는 사람은 불행해진다는 명제가 성립되며, 이것이 곧 웃음방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내리는 눈 속에
그녀가 웃어요
눈꽃을 맞으며
그녀가 울어요
간밤에 내린 눈을
쓸어내립니다
빗자루에 달라붙은 눈꽃이
내 마음입니다
부끄럽습니다
< 눈 > -전문-
이 시에서 시적화자는 눈을 통하여 웃음과 울음을 동시에 말하고 있다. 내리는 눈을 보며 웃고 있는 자아가 있고, 눈꽃을 맞으며 울고 있는 또 다른 자아가 있다. 그래서 시인은 눈이 내린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비를 들고 나가 그것을 쓸어내 보지만 눈꽃이 빗자루에 달라붙어 잘 떨어지지 않는다. 웃음보다는 울음(눈꽃)이 자신의 마음 속에서 잘 해소되지 않고 있으며, 그것이 곧 시인의 마음이라는 표현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 시의 마지막 연에서 “부끄럽습니다”라는 다소 생소한 결어를 던지고 있다. 왜 부끄러울까? 사람은 당면한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웃거나 울 수는 있으나, 하지만 웃고 있다가 갑자기 울거나, 아니면 울다가 의외로 웃는 경우 삼자에게 혼란을 야기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모습을 지켜보는 이들은 행위자의 속마음을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동시에 우리가 알고 있는 집단적 동일성이 무너진다. 삶은 어차피 웃음과 눈물의 융합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지탄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눈 내리는 겨울같은 이 세상 속에서 유쾌하게 웃고 있다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우는 모습이란 아무래도 부끄러울 수 밖에는 없다는 심경을 시인은 솔직하게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가을날에 묵혀 둔 은행잎 하나
깊이를 알 수 없는 그리움으로만 쌓이고
내 마음 내 눈길 가는 곳곳에
마알간 고독처럼 겨울비 내려
지나간 시간들의 안부를 묻는다
< 겨울비 > -일부-
거센 바람불어도 한결같은 머리칼로
비가 뿌리면 더 빛나는 웃음으로
내겐 받기만 한 그대와의 손익계산서
혼자 있어도 혼자가 아니었던 우리가
그날, 아름다운 오로라가 팔락일 때 난 알았다네
흔들리는 건 지금 그대가 아니라는 것을......
< 흔들리는 건 그대가 아니다 > -일부-
위의 첫 번째 시 <겨울비>에서 “은행잎”과 “겨울비”라는 시어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들은 땅으로 떨어진다는 점과 그리움과 고독을 유발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어 웃음과 연계될 수 없는 상당한 거리를 갖고 있다. 그러나 시적화자는 “가을날에 묵혀둔 은행잎 하나”에서 새로운 정서의 긴장을 보여주며 그 위에 촉촉이 겨울비가 내린다는 사실을 도입한다. 여기서 곱게 물든 은행잎은 미처 이루지 못한 소녀적 감상성이 아니라 한여름 폭양과 늦가을 된서리를 견디고 난 뒤에 얻어진 비색이자 시적화자의 고운 삶의 색깔이다. 하여 시인은 이 겨울비가 “마알간 고독”으로 다가와 “지나간 시간들의 안부를 묻는 상황으로 반전시킴으로써 결국 웃음과 뿌리가 맞닿아 있음을 암시한다.
두 번째 시 <흔들리는 건 그대가 아니다>에서는 시적화자의 “머리칼”에 거센 “바람”이 분다. 그러나 부는 바람 자체만으로는 머리칼이 날리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여기서도 첫 번째 시와 같이 “비”가 등장한다. 비는 땅을 적시는 단순한 역할에 그치지 아니하고 “빛나는 웃음”을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하며, 한 단계 나아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손익계산서”를 따지게 되는 진전된 상황을 보여준다. 그런 연후에 나온 계산 결과는 “혼자 있어도 혼자가 아닌” 남다른 사랑이라는 점과 오로라같은 별이 흔들릴 정도로 거센 바람이 불어 닥쳐도 흔들리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이 시는 빛나는 웃음으로 하여 손실보다는 수익이 큰 사랑의 계산을 끌어내는 절묘함이 어렵지 않게 읽히며 이것이 김시인의 사랑의 등식이자 웃음 방정식이라 할 수 있다.
저물어 가는 사랑을
붙잡지 마라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영원한 것은 없다
봄밤은
누굴 사랑하기에도
누굴 미워하기에도
너무 짧다
< 봄밤 > -일부-
시인은 빛나는 웃음을 통한 사랑의 등식을 체험하고 난 뒤 보다 넓은 세계관을 구축하고 새로운 삶을 구도자적 입장을 견지하게 되는데, 그 시편이 바로 <봄밤>처럼 보인다. 마치 일본의 하이쿠를 연상하게 하는 시로써 짧지만 단아하고 명징하며 생의 깊은 의미를 근저에 깔고 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영원한 것은 없다고 전제한 뒤 사랑도 이별의 장벽을 넘을 순 없다고 정의한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봄밤은 아름답다. 누굴 사랑하기에도 누굴 미워하기에도 너무 짧고 아름다운, 그것이 곧 우리네 삶이라고 볼 때 꽃피는 봄밤은 사랑과 웃음으로 가득 채워야 할 계절이라는 역설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시인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여러 생각과 감정을 통합시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상상력을 발하며 빛나는 웃음을 구가하는 긍정적 삶의 지혜를 제시하고 있다.
3. 웃음을 생산하는 에너지와 언어
갈수록 세상살이가 힘겹고 팍팍해지기 때문인지 사람들은 더욱 웃음에 목말라하고 있다. 살면서 웃을 일이 없으니 개그맨들의 힘이라도 빌려서 웃고 싶은 간절한 심정이 보여진다. 그렇지만 영상매체에 쉽게 길들여진 우리들의 감정은 어지간한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는다. 무반응은 무관심과 무기력을 낳고 이어 우울과 불안을 낳지만 가장 춥고 가장 뜨거운 자리에서 한송이 웃음꽃을 피워 세상 사람들을 사랑의 향기에 취하도록 해야 하는 시인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시인은<겨울밤 이야기>와 <청라언덕>에서 가래떡이 익어가는 고향의 밤과 별이 무더기로 쏟아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순수함과 음율이 자아내는 서정성을 불러와 한쪽 가슴엔 자연에서 얻는 웃음의 미학을, 또 한 가슴에는 화로같이 따뜻한 사랑을 수채화처럼 선명하게 채색해내고 있다.
산촌의 겨울은 깊다
저녁이 산자락을 덮으면 군불지피는 손길도 바쁘다
사랑채엔 할아버지가 주무시고
골방엔 고모가 애지중지하는 라디오를 끼고 산다
저녁상을 물린 뒤
할머니가 화로에 가득 불을 담아 들어오시면
그 위에 가래떡을 굽는다
< 겨울밤 이야기> -일부-
무더기로 별이 쏟아지던
초록이 유난히도 반짝이던
그 언덕엔 지금 누가 살까
라일락이 흐드러지게 핀 날
그대는 알게 될 것이다
그 언덕엔 꿈이 모여 산다는 걸
< 청라 언덕 > -전문-
시인의 고향은 산촌이고, 산촌은 하늘이 작지만 골은 깊어 사람들의 정겨운 숨소리는 더 크고 가깝게 들린다. 고향의 겨울 저녁은 추운 밤을 위해 넉넉히 군불 지피고, 저녁상을 물린 뒤 아궁이에서 잉걸불로 골라 담은 화로가 방 한 가운데 들어와 앉으면 화롯불보다 따뜻한 이야기꽃이 무럭무럭 피어나기 시작한다. 아무리 길고 추운 밤이라고 해도 화로 하나만 있으면 문풍지와 부엉이 울음소리가 무섭지 않다. “화롯불 위에서 몸을 틀며 노릇하게 익어하는 고소한 떡가래의 나눔”은 도란도란 이어지는 내밀한 가족 사랑의 내적인 힘을 만들고 그 힘은 다시 웃음을 만들어 내는 에너지 원천이 되고 있다.
시인의 고향에 화로가 있다면 시인의 마음 속에는 언덕이 있다. 무더기로 초록별이 쏟아지는 언덕, 그 언덕 어디에, 누가 있건 어김없이 해가 뜨고 별이 뜨는 일은 반복된다. 그러던 어느 날 시적화자는 라일락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날 드디어 그 언덕에서 그리던 대상과의 만남이 성사되고, 단순하고 소박하지만 꿈꾸는 자와의 극적 순간이 전개된다.
그리움의 대상이던 “그대”를 만나는 일은 매우 주관적이고 내면적이기는 하지만 그대와 동일시 되는 “꿈”은 소유에 대한 욕심이기보다는 미래를 밝히는 희망의 불꽃이다. 타오르는 불꽃 속에 보이는 미소 띤 얼굴은 눈부시도록 순결하고 신비함이 묻어나는 에덴동산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대상과의 합일을 통한 욕망의 표출이자 자아의 정체성에 대한 과감한 노출로서 기쁨 가득한 시인의 얼굴에는 아침 해같이 밝은 미소 번지는 모습이 그려진다.
물방울이 꽃이 되는 선운사
구름은 능선을 훔치고
그 사이
피고 지는 동백
바람이 숨어버린 선운사
숨죽여 봄비는 내리고
동백이 붉어붉어
가슴 시린 봄날
< 선운사의 봄비 > - 전문 -
몇 번이나 굽혔을 무릎과
삐죽이 내민 주머니가
황량한 벌판의 빈
나뭇가지로 흔들리고
무겁게 짓눌려 작아지던
한 사내의 자존심을
지금 꼿꼿하게
세우고 있는 중이다
< 다림질 > - 일부 -
이 세상에서 자연보다 더 정직하고 큰 힘을 가진 것은 없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연 친화나 자연 귀의, 무위자연을 인생 말년의 목표로 삼기도 한다. 서해의 절경으로 빼놓을 수 없는 변산의 채석강 주변과 동백꽃 피는 고창 선운사에서 봄비를 만난다면 우리는 굳이 우산을 받지 않을 것이다. 우산은 하늘을 가리고 좌우 사방의 시야를 방해도 하기에 그런 경승지에는 차라리 비를 맞는 편이 훨씬 낫지 않는가?
선운사에 봄비 내리는 날, 시인은 물방울이 변하여 꽃이 되는 광경을 포착한다. 그 물방울 꽃의 색깔은 투명한 무색이 아니라 붉은 색이며, 그 색을 따라 가면 동백꽃이 붉은 미소를 띤 자태를 뽐내며 만개하고 있다. 미소에 홀려 바람이 숨고, 봄비는 숨을 죽이는 데 이것을 지켜보는 시적 화자의 동백꽃같이 붉게 피는 가슴은 자꾸 아리기만 하다. 꽃잎의 색깔은 꽃 자체의 상징 이상으로 우리들의 상상 세계의 폭을 넓혀준다. 그러므로 동백꽃은 그저 그냥 동백꽃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가슴속에 애타도록 끓고 있는 사랑이나 분노 같은 것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시인의 얼굴은 거울을 보기 위해서도 세수하기 위해서도 아닌 오직 웃기 위해서라고 할 만큼 웃음 가득한 삶이 되며 이것이 시의 동력이 되고 있다.
<다림질>이라는 시에서는 바지를 다리면서 단순히 “구겨진 바지” 주름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한 사내의 자존심”을 꼿꼿하게 세우는 중이라는 표현이 눈길을 끈다. “바지”는 의인화되어 “남편”을 의미하고 남편이 일터에 나가 무수히 굽혔을 무릎을 생각하면서 무릎은 곧 자존심에 비유되고 있다. 생존 경쟁의 현장에 나가 무릎 굽히지 않고 살기란 매우 어렵고, 저녁이면 집으로 돌아와 바지를 벗어야만 비로소 자유로운 해방감을 맞게 된다. 시인의 눈에 보이는 세상의 주름은 다림질로 해결된다는 관점에서 보면 다리미는 남편의 노고를 펴는 웃음제조기가 아닌가? 유추에 의한 유사성의 도입이 새로운 시상으로 연결되어 지적 자극으로 잘 이어지고 있다.
듬성듬성 무를 깔고
그 위에 갈치를 얹는다
그리곤 바다의 깊이를 잰다
한 가지 옷만 고집해 온 놈을
온갖 양념을 입혀 완성한다
< 갈치조림 > - 일부 -
부엌 한켠 끓고 있는 찻물과
그대 위해 꽂아놓은 가을 들꽃이
소리죽여 열반하기 전에
그대 내게로 와요
저 황금 들녘을 가로질러
소식없이 내게로 와주어요
< 엽 서 > - 일 부 -
시인은 일상화된 생활 속에서도 활어처럼 신선한 표현으로 독자들의 구미를 당기게 만든다. <갈치조림>이라는 시는 사람의 마지막 염습장면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무를 깔고/ 그 위에 갈치를 얹는다”, “한가지 옷만 고집해 온 놈을/ 온갖 양념을 입혀 완성한다”는 구절이 그러하다. 그리고 갈치를 무 위에 올려놓고 “바다의 깊이를 잰다”를 잰다는 표현도 시의 남다른 심층적 깊이를 느끼게 한다. 갈치를 올려놓고 재는 바다의 깊이는 몇 미터의 길이가 아니라 수천수만의 바다를 누비고 다녔을 갈치의 일생이며, 그것은 정갈한 은빛 영혼의 웃음으로 빛나는 눈부신 상징이 현현되고 있다.
두번째 시 <엽서>에서는 외연적으로는 가을날 황금들녘을 가로질러 배달되는 엽서를 기다리는 풍경으로 다가오지만, 내포적으로는 1연에서 편지를 기다리는 심경을 두 가지 심상으로 도입하여 기다림을 배가시키며 긴장을 조성하고 있다. “부엌 한켠 끓고 있는 찻물과/그대 위해 꽂아놓은 가을 들꽃이“ 이라는 표현에서 보면 ”부엌에서 끓고 있는 찻물“은 시적화자의 기다림에 애끓는 심정이고, ”꽃병에 꽂아놓은 들꽃“은 이미 뿌리가 잘려 시한부 생명을 사는 순교자적 입장에 선 시인의 담대한 의지를 발견하게 된다. 이후 결국 ”소리죽여 열반하기 전에“라는 결연한 의지로 협박하듯 토로하며, 엽서를 띄울 것을 기대하고 있으므로, 황금들녘을 가로질러 엽서가 배달되는 날 시인의 얼굴에는 그야말로 함박웃음일 것이다.
이처럼 시인의 시적 에너지와 언어는 대부분 자연과 생활속에서 생성 연마되어 웃음으로 현현된다. 웃음이 되기 위해 아파야하고 아픔이 다시 웃음으로 환원되는 순환이 고독과 절망과 위기의 현실을 뛰어넘는 구원의 빛으로 다가오고 있다.
4. 사랑 자국 그렸다가 지우며
시인의 가슴은 뜨겁다. 미지근함 보다는 차라리 차가워야 한다는 것을 지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연유로 시집에 상재된 많은 작품들이 사랑을 주재 또는 소재로 하고 있다. 사랑과 웃음은 동의어 내지 유의어에 속한다. 늘 웃는 얼굴로 사는 시인은 현실적인 사랑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다.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 낸 상상의 궁전에는 행복한 웃음소리가 들리고, 끝없이 생성되었다가 사멸되어 가는 사랑의 대상은 따뜻한 언어와 밝은 미소로 소통되는 아름다운 풍경들이 너무도 순수하고 진실하기만 하다.
만나지 않으면서 만나고
헤어지지 않으면서 헤어지는
비밀스런 내 정원의 꽃밭
예고없이 찾아드는
절망과 허무의 태풍들
그것을 오늘도 난 견딘다
언제나 시작이고 끝이듯이
연륜만큼 고독해 하면서
< 외사랑 > -일부-
광장의 고독이 기둥 같은 데
우린 이제 너무 늦었다
두 손잡고
구름 밖을 날기에는
향내나는
토담집을 짓기에도
옛 그대로 생각나는 것
문 밖의 잔디와
아름답고 독한 향기와
한숨짓는 물결 소리
해변을 감도는 등불 하나
당신은 일찍이 내 애인이었다
< 상처 > -일부-
시인은 사랑을 구하면서 사랑을 누릴 줄도 알고 또 그것을 나눠주는 일에 도 이골이 나 있다. 그만큼 세상을 비판하거나 근시안적으로 보지않고 사물과 대상을 보듬어 안고 다독이면서 늘 선험적 사랑으로의 회귀를 꿈꾼다. 그러므로 시인은 외사랑에도 눈물을 보이거나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당당하고 진실하게 주제가 선명한 시를 통하여 근원적인 고통을 치유하는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외사랑>은 “만나지 않으면서 만나고/헤어지지 않으면서 헤어지는" 역설의 도입으로 사람의 만나고 헤어지는 일 자체가 사랑의 근본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런 역설은 현실의 수용이 어렵고 ”비밀스런 자신만의 정원의 꽃밭“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비밀의 정원을 지키기 위해서는 ”예고없이 찾아드는/절망과 허무의 태풍들“이 있어 ”언제나 시작이고 끝이듯이/연륜만큼 고독해 하면서“ 스스로에게 적지않은 인내를 감당해야 한다는 시인정신이 바탕 되어 있다.
애인을 생각하면서 쓴 시 <상처>는 사랑하는 사람이 상처를 만든다는 명제를 성립시킨다. <외사랑>에서 연륜만큼 더 고독해지면서 이미 고독에 단련되어 스스로 고독을 다룰 줄 아는 시점에서 시인은 광장의 기둥같은 거대한 고독의 기둥 앞에 대항하기를 포기하고 조용히 백기를 들고 만다. 그리고 “구름 밖을 날기에는/향내나는/토담집을 짓기에도” 이미 때가 늦었다며, 이제 눈앞으로 다가와 보이는 “문 밖의 잔디와/아름답고 독한 향기와/한숨짓는 물결 소리/해변을 감도는 등불 하나”가 곧 자신의 애인이라고 단언한다. 결국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상처가 되었기에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방법으로 자연 자체를 사랑하는 역설이 이 시의 울림을 더 크게 느껴지도록 만든다.
끈끈한 사랑놀음
매듭을 지어
끊을 듯 이을 듯 끌어온 시간
그대에게 갇힌 나는
길을 잃었네
< 팔찌 > -일부-
사랑이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난 기다릴래요
내가 더 사랑했다고 해서
부끄럽지도
슬퍼지도 않아요
왜냐구요
내 사랑은 순환선이니까
< 순환선 > -일부-
사랑이 구속이라는 의미의 비유로 쓴 <팔찌>라는 시에서 시인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철저히 갇혀 길을 잃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끈끈한 사랑놀음에 빠져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했을 것이며, 끊어질 듯 이어온 힘든 과정의 사랑이라고 하여도 시인은 결코 절망이나 후회를 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내적인 웃음에너지를 통해 팔찌 자체의 구속이 자신을 더 강하게 사랑의 자의식에 몰입하도록 만드는 긍정의 힘으로 반전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랭보의 “분노와 사랑 없이는 한 줄의 시도 쓸 수 없다”는 말을 생각해보면 위에서 언급된 웃음과 사랑이 결국 김시인의 문학의 원천이 되고 있다는 증거로 보여진다.
<순환선>이라는 시에서 시인의 사랑 공식과 의도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시인은 진정한 사랑이란 “사랑이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난 기다릴래요/내가 더 사랑했다고 해서/부끄럽지도/슬퍼지도 않아요”와 같은 마음으로 임하는 일이다. 기다림이 사랑이요, 사랑에는 부끄러움 따위는 문제가 아니라는 선이 굵고 폭이 넓은 사랑을 설파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시는 사랑은 가정을 만들고 가정의 웃음은 가장 아름다운 태양이 되어 집안 구석구석을 햇빛으로 가득 채우게 된다는 것으로 김시인에게는 사랑과 웃음이 하나의 생리작용이며 고뇌를 배설하기 위한 수단 이상으로 보여지고 있다.
5. 많이 웃는 세상을 위한 행보
웃음에 목마른 시대에 웃음 갈망하는 사람들, 그 가운에 존 반드로는 “마지막 웃는 자가 가장 잘 웃는 자”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웃을 수 있으며 어떤 웃음을 웃어야 하는가? 이에 상포르는 “모든 날 중 가장 완전히 잃어버린 날은 웃지 않는 날이라”고 대답한다. 곧 이 말은 무조건이라는 전제가 요구된다는 것으로 방법과 종류보다 가장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회탈같이 웃지 않으면 안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유난히 선명한 가르마처럼
햇살에 반사된 흰 신작로처럼
내 지나온 청춘의 길이
물길처럼 펼쳐진다
산불이 난 걸까
바삭바삭 타 들어가는 내 영혼
그 눅눅했던 슬픔은 날개를 파닥이고
박하향이 스민 듯
눈물나게 가을은 화사하다
무대도 없이 배우가 된 나는
준비된 대사를 외워본다
돌아보지 마라
생이, 마흔의 생이 나를 고문하고 있으니
가을이, 아직은 끝나지 않았으니
< 가을날의 삽화 하나 > -전문-
이 가을, <가을날의 삽화 하나>에서 낙엽이 떨어지고 시적화자의 영혼에도 눅눅했던 슬픔이 날개를 파닥이는데 박하향이 스민듯 가을은 화사하게 다가온다. 이즈음에서 마흔의 생이 시인을 고문하고 있을까? 무대도 없이 배우가 되는 우리네 삶에서 우린 준비된 대사를 갖고 있지 않지만 시인은 대사를 준비하고 그것을 조용히 외워본다. 그리고 아직 가을이 끝나지 않았으니 돌아보지도 말고 그저 앞만 보고 가자고 마음을 정리한다.
유난히 선명한 가르마 같은, 햇살에 반사된 흰 신작로같은 시인의 지나온 청춘의 길에서 결코 후회하지 않으며 시인은 오늘도 웃는다. 웃음의 미학을 펼쳐가는 삶의 편린들이 시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시인, 고정희 시인의 말대로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는다”는 신조로 오늘도 고운 심성으로 사랑과 웃음을 펼치며 그녀가 웃고 있다.
첫 시집에서 다소 부족한 점이 없지는 않지만 그녀의 만족한 웃음과 넘치는 사랑이 작품의 부족한 점을 일순에 덮어버리고 만다. 웃음의 바탕위에 사랑과 계절과 겨울바다, 달빛 고운날, 봄비, 봄날, 청라언덕, 오월단상, 여름밤, 코스모스, 가을이 가는 저녁, 첫눈, 겨울아침의 연가, 풍경 등의 재목만 봐도 서정이 주를 이루고 있는 데, 머지않은 미래에 묶어낼 제2시집에는 좀더 다양한 주제와 소재, 그리고 엄격하고 치열한 문학정신으로 압축미와 간결미, 절제된 언어로서 우리 앞에 더 큰 웃음으로 서게 될 그날이 오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