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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의 불교 비판을 다시 읽다
정도전(鄭道傳)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교체되는 격동의 시기에, 역사의 중심에서 새 왕조를 설계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꿈꾸던 성리학적 이상 세계의 실현을 보지 못하고 끝내는 정적의 칼에 쓰러져, 조선 왕조의 끝자락에 가서야 겨우 신원되는 극단적인 삶을 살았다.
조선 개국을 위해 앞장선 행동가가 이성계라면, 입국 설계를 한 사람은 정도전이라 할 수 있다.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는 과정을 비롯해 현재의 경복궁 및 도성 자리를 정하였고, 수도 건설이 마무리되면서는 경복궁을 비롯한 성문의 이름과 한성부의 5부 52방 이름도 지었다. 그는 이런 작업을 진행하면서 각종 상징물에 대부분 유교의 덕목이나 가치가 담긴 표현을 썼다. 서울이 수도로서의 의미만이 아닌 유교적 이상을 담은 곳으로 자리 잡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조선경국전을 지은바, 이 책은 조선의 통치 규범을 제시한 것으로, 후일 조선의 최고 법전인 경국대전이 나오게 되는 출발점이 되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조선은 개국 이념의 하나로 억불숭유를 내걸었다. 배불사상은 고려 말에 성리학이 도입되면서부터 이미 유자들 사이에서 싹트기 시작하였다. 정몽주는 젊은 나이에 벌써 이렇게 불교를 비판하였다.
“유자의 도는 모두 일용 평상적인 것이다. 마시고 먹는 것과 남녀관계는 사람이면 누구나 같은 바로서 지극한 이(理)가 그 속에 있다. 요순의 도는 또한 이를 벗어나지 않으니 동정어묵(動靜語默)에 그 바름을 얻으면 곧 요순의 도일 뿐, 처음부터 높고 멀어 행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저 불교는 그렇지 않아서 친척관계를 떠나고 남녀관계를 끊어, 홀로 바위굴에 앉아 초의목식하면서 관공적멸(觀空寂滅)로써 종지를 삼으니, 이 어찌 명상이 도이겠는가?”
또 그의 나이 55세 때 성균관의 박사 김초가 불상을 깨뜨리도록 요구하여 왕의 진노를 사자, “부처를 배척하는 것은 유자로서 떳떳한 일이니, 예로부터 임금 된 이는 이를 내버려 두고 논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여 불교 배척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나섰다.
성리학 도입 이전의 고려는 사회 전반적인 영역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끼친 불교의 위상으로 인해 불교를 우위에 두고 유교를 한 차원 낮은 단계로 보거나, 불교를 우위에 둔 바탕에서 하위에 있는 유교가 근본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유불무수(儒佛無殊)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조선에 들어와서는 정책적으로 배불의 시대를 열었다.
이러한 조선의 배불정책에 체계적인 이론을 내세운 것이 바로 정도전의 불씨잡변(佛氏雜辨)이라는 글이다. 불씨는 ‘부처 씨’라는 뜻으로 ‘석씨(釋氏)’라는 말과 더불어 석가를 약간 낮추어 부른 말이고, 잡변은 ‘잡스러운 것을 바로 잡다’란 뜻이다. 그러니 불씨잡변은 한 마디로 불교의 교리를 비판한 것이다.
불씨잡변은 태조 7년, 그의 나이 57세이던 때, 이방원의 이른바 무인정사(戊寅定社)에 의해 살해되기 직전인 윤5월 16일에 완성된 것으로, 그의 배불사상을 집대성한 것이다. 글의 서문은 권근이 쓰고 발문은 윤기견(尹起畎)이 썼다. 정도전은 이 글을 쓴 동기를 권근에게 이렇게 말했다.
“불씨의 해가 인륜을 헐어 버린지라, 앞으로는 반드시 금수를 몰아와서 인류를 멸하는 데까지 이를 것이오. ‘일찍이 내가 뜻을 얻어 행하게 되면 말끔히 그것을 물리쳐 버리겠다.’고 했다. …… 그러므로 내가 분을 참지 못하여 이 글을 지어 무궁한 후인들에게 사람마다 다 깨달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또 그는 이 글을 완성하고 난 후의 자기 심정을 이렇게 밝혔다.
“세상 사람들이 이단의 설에 미혹되어 사람의 도가 없어지는 데 이를까 두렵다. 아아, 난신적자는 사람마다 잡아 죽일 수 있으니, 반드시 형벌을 다스리는 관리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사특한 말이 넘쳐서 사람의 마음을 무너뜨리면 사람마다 물리칠 수 있으니, 반드시 성현을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여러 사람에게 바라는 바이며 아울러 내 스스로 힘쓰는 것이다.”
이로 보아 정도전은 이단을 물리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생각했으며, 이단을 배격하는 데 전심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불씨잡변의 논설 조목은 도합 20편인데, 이 가운데 15편은 주로 불교의 인과설, 윤회설, 화복설 등 세속의 신앙과 결부된 불교의 교설을 비판하고, 인간의 마음과 본성에 대한 불교적 관점의 오류를 비판한 내용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불교 전래 이후 중국 역대 왕조의 역사적 경험을 들어, 불교가 국가에 유해한 종교임을 논술하였다.
불교 교설에 대한 비판에서 불씨잡변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성리학의 두 중심 개념인 이(理)와 기(氣)의 개념이 많이 응용되었다. 이런 성리학의 이념으로써 불교의 윤회설․인과설 등을 비판했다.
한마디로 말하여 불교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인식을 그릇되게 하고, 사람의 정의(情意)를 어긋되게 하고 사회적 질서 또는 인륜의 질서를 파괴한다는 것이다. 정도전은 이처럼 불교에 대해서 하나하나 논리적인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래서 한영우는,
“불씨잡변에 나타난 정도전의 불교교리에 대한 비판은 철학적 깊이에서나 비판의 철저성에서나 이론체계의 논리성에서 당시의 중국과 일본을 통틀어서 가장 수준 높은 수준에 있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불교가 중국과 우리나라와 일본에 들어온 지 2000여 년이 지나도록 유자에 의한 사소한 비판은 있었어도 이처럼 철저한 비판은 정도전이 최초라고 알려져 있으며, 그 이후에도 이를 능가할 만한 비판이 나온 일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불씨잡변을 통한 정도전의 불교에 대한 철학적 비판은, 불교의 교의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전적으로 바탕을 둔 것은 아니었다. 즉, 유교적 편견에서 이루어진 것이 많기 때문에 자기 나름의 억측과 독단이 많다.
그러면 그에 대한 몇 가지 억견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불씨 윤회지변’과 ‘불씨 인과지변’에 대해서 보기로 하자. 정도전은 윤회지변에서 사람이 죽어서 다시 태어난다는 불교의 윤회설을 유교의 혼백론(魂魄論)과 정수윤회설(定數輪迴說)로 비판하고 있다. 정도전은 사람과 만물은 태극의 이(理)와 음양오행의 기(氣)가 묘하게 응집되어 생기며, 죽을 때는 기의 모임인 정신이란 것은 육체와 함께 흩어지는 것이며,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전제하였다. 불이 꺼지면 연기는 하늘로 올라가고, 재는 떨어져 땅으로 돌아가듯이, 사람이 죽으면 혼(魂)은 하늘로 올라가 사라지고 백(魄)은 땅으로 내려가 사라진다. 또 화기가 꺼지면 연기와 재가 다시 합하여 불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사람도 죽은 후에 혼과 백이 합하여 생물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혼백이 돌고 돌아서, 모든 생물은 인류가 되지 않으면 새, 짐승, 곤충, 물고기 등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 윤회한다면 그 수가 일정하게 정해져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즉 어느 한 종이 번성하면 다른 어느 종은 감소하여야 하는데 세상에 그런 것은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일정한 수를 유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한말로 윤회한다는 것은 이치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성대한 세상을 만나면 인간과 축생들의 수가 늘어나고, 쇠약한 세상을 만나면 인물이 감소하고 다른 동물들도 감소하는 것이지 윤회의 법칙 때문에 중생의 증감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생에서 선한 업을 지으면 후생에 선한 과보를 받고, 악한 업을 지으면 후생에도 악한 과보를 받는다는 불교의 인과응보에 대해서도, 그는 성리학적 설명 곧 음양오행설로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음양오행은 교차하면서 운행되며, 들쭉날쭉하여 가지런하지 않다. 그러므로 그 기는 통하고 막히고, 치우치고 바르고, 맑고 탁하고, 두껍고 얇으며, 높고 낮고, 길고 짧은 차이가 있다. 그리하여 사람과 만물이 생겨날 때에 마침 그 때를 만나 바르고 통하면 사람이 되고, 치우치고 막히면 만물이 된다. 사람과 만물의 귀하고 천함이 여기서 나누어진다.
또 사람에게 있어서도 그 기(氣)가 맑으면 지혜롭고 어지나, 흐리면 어리석고 어질지 못하며, 두꺼우면 부자가 되나 엷으면 가난하고, 높으면 귀하게 되나 낮으면 천하게 되고 길면 장수하게 되나 짧으면 요절하게 되는 법이다.”
한 마디로 윤회의 법칙은 삿된 논리라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술과 누룩의 비유를 들어 그것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즉 술은 누룩과 재료의 많고 적음과 항아리의 덜 구워짐과 잘 구어짐, 날씨의 차고 더움, 숙성 기간의 길고 짧음이 서로 적당히 어울리면 그 맛이 좋게 된다. …… 그러므로 술맛이 있고 없고, 상품이 되고 하품이 되고, 쓰이기도 하고 버려지기도 하는 것은 모두가 다 일시적으로 마침 그렇게 되어서 그럴 뿐이지, 술을 만드는 데에 인과의 보응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면 그의 이러한 주장을 불교의 교리와 대조해 보자.
정도전은 윤회설을 비판하기 위한 첫머리로 영혼을 부정하고 있다. 사람이 죽으면 혼(魂)은 하늘로 올라가 사라지고 백(魄)은 땅으로 내려가 사라진다. 또 화기가 꺼지면 연기와 재가 다시 합하여 불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사람도 죽은 후에 혼과 백이 합하여 생물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한말로 현세 위주의 유교 이념으로 불교를 재단한 것인데, 종교가 지니는 기본적 내세관을 부정한 것이다. 유교는 별도의 내세가 없다. 죽어도 조상은 무덤에 있고 사당에 있다. 죽어도 우리의 곁에 있다. 그러나 불교는 그렇지 않다. 수많은 계층의 하늘(신의 세계)이 있고 육도의 구분이 있다. 이것이 불교의 내세관이다. 내세관이 없다면 종교라 할 수 없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정도전은 문화와 종교를 혼동하고 있다.
불교는 인연설에 기본 바탕을 두고 있다. 인(因)은 직접적인 원인이고, 연(緣)은 간접적인 원인이다. 그 원인에 의하여 빚어지는 것이 과(果)요 보(報)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싹이 난다고 할 때, 씨앗은 인이요 흙과 물기와 햇빛은 연이고, 그것을 밑동으로 하여 올라온 싹은 과다. 이것이 불교의 인연설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러한 인연에 의해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어떤 것도 홀로 존재할 수는 없고, 서로의 수많은 인연에 의존하는 관계망 속에서 이루어진다.
수많은 인연이 쌓임에 따라 모든 것은 항상 변하기 마련이다. 이것이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변하지 않는 고정된 실체는 없다. 곧 제법무아(諸法無我)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의 주체는 행위의 주체가 되는 업(業)이다. 윤회의 주체는 자기동일적 자아는 없지만 오온가합체로서의 가아(假我)가 지은 업력으로 인한 오온간의 연속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고정된 실체는 없지만 인연에 의하여 일시적으로 모인 가아에는 그것을 구성한 오온들이 지은 업의 힘이 전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불변의 고정된 실체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변하지 않는 고정된 실체가 있다면 전생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무아윤회설이다.
이처럼 불교의 윤회와 인과설은 인간을 물질적인 육체와 영혼으로 나누어 볼 때 육체는 나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그리고 영혼 즉 마음은 영원하지도 영원하지 않기도 하다는 이론 구조에서 나온 것이다. 정도전이 말한 술과 누룩의 관계도 인과론으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예로 든 술의 경우, 누룩과 재료의 많고 적음과 항아리의 덜 구워짐과 잘 구어짐, 날씨의 차고 더움, 숙성 기간의 길고 짧음이 다 인연으로 작용하여 술의 좋음과 나쁨이란 결과로 빚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도전은 유교는 육체나 영혼은 영원하지 않고 죽어 소멸한다고 하여, 유한성으로 끝난다는 현세적인 철학만으로 불교를 비판하고 있다. 성리학적 잣대만을 가지고, 사람은 죽어도 정신은 불멸한다는 논리정연한 불교의 인과윤회설을 틀린 것으로 논박하고 있다.
그리고 일체 유정은 정해진 수가 있어 증감이 없다는 정수윤회설은, 정도전이 어느 경전을 인용했는지 알 수 없는데, 붓다의 교설에서 이런 부분은 찾기 어렵다. 그리고 모든 생물은 인류가 되지 않으면 새, 짐승, 곤충, 물고기 등이 될 것이므로 그 수가 일정하게 정해져 있어야 한다는 정도전의 주장도 불교의 윤회설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왜냐하면, 윤회는 수많은 요소들의 관계 즉 인연에 의해서 이루어지므로 시공간적으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시간에 따라서 그 수가 달라질 수 있고, 공간적으로 또 그 수가 달라질 수가 있다. 그러므로 어느 한 개인이 처한 한 시점이나, 어느 한 공간을 보고 항상 그 수가 일정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불씨가 인륜을 버림에 관한 비판’ 즉 ‘불씨훼기인륜지변’에 대해 보기로 한다. 그는 이 글에서, “부자(父子)에게는 부자의 친함이 있고, 군신에게는 군신의 엄격함이 있고, 부부와 장유와 붕우에 이르러서도 각각 도가 있다. 이는 그것이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인륜을 무너뜨리고 사대를 버렸으니 그것이 도에서 멀어졌다고 하겠다.”는 명도 선생의 말을 빌려 불교를 비판하였다.
이는 아마도 출가자를 빗대어 평한 것으로 보인다. 종교적 의례를 이끌어가는 사제자의 계율을 불교 전체를 비판하는 도구로 삼은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또 설사 출가자라 하더라도 불교가 유교의 으뜸 덕목으로 여기는 충이나 효를 경시하는 것도 아니다.
고상현은 이와 관련하여 장아함경 등의 불교 경전을 예로 들었다. 그 한 대목을 보자.
“첫 번째는 부모님을 공손하게 받들되 부족함이 없게 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할 일이 있으면 무슨 일이든지 먼저 부모에게 고하여야 하고, 세 번째는 부모가 하는 일은 공손하고 거스러지 않는 것이며, 네 번째는 부모의 바른 명령을 감히 어기지 않는 것이며, 다섯 번째는 부모가 하던 바른 가업을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중국에서 만들어진 경이긴 하지만, 부모은중경은 부모의 은혜에 대해 깊이 있는 헤아림을 보이고 있다. 또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도 불교에 대한 여러 가지 일사(逸事)를 적은 끝에, 따로 효선편을 두고 효자, 효녀들의 이야기를 실어 그것을 강조하고 있다.
부부간의 윤리에 대해서도 장아함경에서 상세하게 설하고 있다. 남편의 도리 다섯 가지와 아내의 도리 다섯 가지를 조목조목 설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붓다는 붕우간의 윤리도 자세히 설하고 있다.
친할 만한 친구에 네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잘못을 그치게 하는 친구, 다른 이를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는 친구, 남을 이롭게 하는 친구 고락을 함께 하는 친구가 그것이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마찬가지로 불교의 교설도 유교 못지않게 부모, 부부, 붕우간의 윤리를 중시하고 있다. 아마도 정도전은 가정을 떠나는 출가승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비판한 것으로 보이나, 어떻든 불교의 윤리 항목들을 자세히 모르고 유가의 편견으로 그것을 비판하고 있음을 본다.
이어서 ‘자비의 변’에서 정도전은 불교의 자비와 유교의 인이 서로 비슷한 듯하지만, 불교의 자비는 오륜을 무시하고 만물을 사랑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사람을 이롭게 하거나 만물을 구제하는 기능이 없으므로 양자는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정도전이 불교의 자비는 사람을 이롭게 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은 무엇을 근거로 하여 펴낸 논설인지를 알 수가 없다. 불교의 자비설을 담고 있는 사섭법(四攝法)을 통하여 그것을 잠시 살펴보자. 사섭(四攝) 즉 네 가지의 섭사는 보시섭(布施攝)․애어섭(愛語攝)․이행섭(利行攝)․동사섭(同事攝)을 말한다.
보시섭은 중생이 재물을 구하거나 진리를 구할 때 힘닿는 대로 베풀어 주어서, 중생으로 하여금 친애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여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다. 애어섭은 중생을 불교의 진리 속으로 들어오게 하기 위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하여 친애하는 정을 일으키게 하는 것으로, 보살은 온화한 얼굴과 부드러운 말로 중생을 대한다는 것이다.
이행섭은 몸과 말과 생각으로 중생들을 위하여 이익 되고 보람된 선행(善行)을 베풀어서, 그들로 하여금 도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동사섭은 보살이 중생과 일심동체가 되어 고락을 함께 하고 화복을 같이하면서, 그들을 깨우치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적극적인 실천행이다.
이 동사섭은 남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여기는 이타행이다. 동사섭은 사섭법 가운데 가장 지고한 행이다. 보시․애어․이행은 처해진 환경에 따라서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는 것이지만 동사섭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자비가, 정도전의 말처럼 ‘사람을 이롭게 하거나 만물을 구제하는 기능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이를 보면 정도전의 주장은 실제와 상당히 멀어져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또 그는 ‘진가(眞假)의 변’에서 불교가 천지만물을 가환(假幻)이라고 하고, 심성을 진상이라고 말하는 것을 억설이라 비판하고 있다.
불교가 천지만물을 가환이라고 하는 것은 공(空) 사상에 기반한 것으로, 제행무상 즉 세상만물은 항상 변하고 있기 때문에, 변하지 않고 고정되어 있는 어떤 실체도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수많은 요소들이 서로 인연을 맺고 의존하여 일시적으로 존재할 뿐이라는 것이다. 진정 이것을 깨달아 욕망의 허깨비[幻]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이 이치를 알면 무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금강경 사구게(四句偈)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인연으로 이루어진 모든 것은 一切有爲法(일체유위법)
꿈과 환상과 물거품과 그림자와 같고 如夢幻泡影(여몽환포영)
이슬과 같고 번개와도 같으니 如露亦如電(여로역여전)
마땅히 이렇게 볼지니라 應作如是觀(응작여시관)
그러므로 불교에서 말하는 가환은 공의 이치를 깨달아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는 즉 번뇌에서 벗어나는 길을 말한 것이지, 정도전이 말한 것처럼 단순히 실재하는 것이 허깨비라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다.
또 정도전은 ‘지옥의 변’에서, 지옥이 아닌 극락에 가기 위해 부처를 섬기고 불전에 재산을 바친다고 함을 비판하고, 이는 선을 행하도록 하는 방편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지옥이나 극락은 원래 윤회인과설에서 나온 것이다. 선인선과, 악인악과를 설명한 것인데 사실은 이러한 교설은 하나의 방편설이요, 불교의 본질은 깨달음의 경지 곧 열반에 드는 것이며 윤회를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니 정도전은 하위의 개념을 지적했을 뿐, 상위인 해탈의 경지는 간과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비판은 단편적이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 ‘불씨화복의 변’을 살펴보자. 정도전은 불교의 화복론을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은 논리를 폈다.
“불씨는 사람의 삿됨과 그름은 논하지 않고, 이에 말하기를 ‘우리 부처에게로 오는 자는 화를 면하고 복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비록 열 가지의 큰 죄악을 지은 사람일지라도 부처에게 귀의하면 화를 면하게 되고, 아무리 도가 높은 선비일지라도 부처에게 귀의하지 않으면 화를 면할 수 없다는 말이다. 가령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 할지라도 모두 사심에서 나온 것이요, 공도가 아니니 징계해야 할 것이다. 하물며 불설이 일어난 후 오늘에 이르는 수천 년 동안에 부처 섬기기를 독실히 한 양(梁)의 무제(武帝)나 당의 헌종과 같은 이도 화를 면치 못했다.”
그런데 불교만 믿으면 복을 얻는다는 말은 불경 어디에도 없다. 다만 포교 과정에서 당시의 무식한 대중에게 원효 같은 이가 쉬운 포교를 위해 ‘관세음보살을 암송하면 극락 간다.’고 했다는 말은 전한다. 앞서도 말했지만, 불교는 선을 행하면 선업을 받고, 악을 지으면 악업을 받는다는 인과보응의 교설이 있을 뿐, 불교를 믿지 않으면 화를 면하지 못한다는 교설은 없다. ‘과거를 알려면 현재를 보고 미래세를 알려면 현재를 보라.’고 하여 업에 따른 인과를 강조할 뿐이다.
다음으로 ‘불씨 결식의 변’을 보자. 정도전은 불씨 걸식의 변에서 스님들이 걸식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남자가 밭가는 것이나 여자가 베 짜는 것을 옳지 않다고 하여 버렸으니, 어찌 힘써 일함이 있었겠는가? 부자도 없고, 군신도 부부도 없으며, 이 또한 선왕의 도를 지키는 사람도 아니다. 이런 사람은 하루에 쌀 한 톨을 먹을지라도 모두 구차하게 먹는 것이다. 진실로 그 도와 같이 하려면 지렁이처럼 아예 먹지 않은 뒤에라야 가능할 것이니, 어찌 빌어서 먹는단 말인가? 더구나 자기 힘으로 벌어서 먹는 것을 옳지 않다고 하니, 그렇다면 빌어먹는 것은 옳단 말인가?”
이 또한 앞에서 본 ‘인륜을 버림에 관한 비판’에서 살핀 바와 같이, 사제자 즉 비구 출가자들의 수행법을 불교 전체의 폐해로 비판 것이다. 출가자들이 가장 우선시하는 것은 수도이므로, 득도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생필품 이외는 무소유를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붓다 당시 출가자들의 교단 생활방식은 당연히 걸식이었다. 걸식에 있어서도 매일 한 끼만 하되, 미리 저축해서도 안 된다고 하였다. 석가 자신도 매일 직접 걸식을 했으며 제자들이 걸식해서 대신 올리는 것을 거절하였다.
붓다 당시의 출가자들은 4의법(四依法)에 충실하였다. 4의법이란 수행자의 최소한 생활을 위하여 규정한 네 가지 규칙인데, ① 출가자는 걸식(乞食)으로 살아가며, 목숨을 마칠 때까지 이에 힘써야 하고, ② 출가자는 분소의(糞掃衣) 즉 시체를 감싸서 무덤에 버려진 천 조각을 이은 옷을 입어야 하며, ③ 출가자의 주거는 나무 밑에서 살아가야 하고[樹下座 수하좌], ④ 출가자의 약은 오줌을 발효시킨 것[陳棄藥 진기약] 이외 비싼 약을 먹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걸식은 무욕을 실천하는 하나의 수행 방편으로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덧붙일 것은, 당시 인도 사회는 승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것이 큰 공덕을 짓는 보시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석가가 직접 걸식을 행한 것도 한 사람의 걸식승이라도 세간에 나가지 않으면, 그만큼 세간 사람들이 복을 지을 기회를 잃게 되므로, 출가자는 저마다 걸식을 하여 세인들이 공덕을 이루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걸식은 출가자와 세간의 합의적 사항이었다.
걸식은 물론 출가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요, 재가자에게 적용되는 계율은 아니다. 이러한 취지로 행해진 걸식을 정도전은 간과하고 출가자들의 걸식 행위를 단순한 무노동 취식을 위한 방편으로 생각하였다. 이렇게 엄격했던 걸식 규범은 후대로 내려오면서 시공간적 변화를 겪었다.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후 백장 선사는 그의 청규(淸規)에서 “하루를 일하지 않으면 하루를 굶어라.”고 하였다. 이러한 영향을 받아 한국 불교도 자급자족의 울력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상에서 정도전의 불씨잡변에 대하여 간략히 살펴보았다. 정도전 당시의 불교는 본연에서 이탈하여 많은 부폐상을 보이며 타락한 면이 많았다. 그래서 이에 대해서 많은 유학자들이 그 폐단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떠받칠 개국이념 수립이라는 대명제 앞에서, 정도전은 불씨잡변이라는 이름으로 불교를 비판하였다. 불씨잡변은 이러한 측면에서 개혁을 위한 최고의 명문으로 찬사를 받고 있다.
그런데 불씨잡변이 당시의 현실적인 폐단을 지적하면서 불교의 교리가 가지고 있는 바른 이해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진 것만이 아님을 위에서 살폈다. 그는 이단배척이란 사명감과 성리학적 이념에 경도되어 불교를 바르게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면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불씨잡변은 편향적 비판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첫댓글 저도 불도는 아니지만 절에 가면 시주 조금 하고 불전에 삼배를 올립니다. 여러 종교 중에 가장 마음이 간다고 여겨집니다. 글을 한 편 한 펀 읽어나가며, 빌 브라이슨의 '모든 것의 기원'을 읽어나가는 느낌입니다. 고맙습니다.
저는 정도전이 자신의 머리 속에다 멋진 한 국가의 구조를 그려내고, 실제로 구현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