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거(携擧) 종말론의 희극성과 비극성
강인호목사 / 테너플레이 한인교회
휴거 종말론 집단의 종말 임박 현상
휴거주1를 믿는 사람들이 디데이라고 말하는 10월이 가까이 오면서 갖가지 몸부림을 치고 있다는 기사가 연일 신문에 오르내리고 있다. 얼마전 한국인이 경영하는 이발소에 갔더니 이발을 하시는 늙은 아저씨가 연신 함숨을 쉬면서 한탄하시는 이야기를 들었다.
주1’휴거’ 라는 말은, 영어로는 '랩쳐(raphure : 환회 또는 열광적인 기쁨을 뜻함)이지만, 구체적으로 신약성서 데살로니가 전서4장16절에서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고 한 말 가운데 "끌어 올려"라는 말을 한자 말로 번역한 말이다. 이러한 현상이 인류의 종말이 시작되는 징조라고 믿는 주장을 ‘휴거폰 혹은 휴거 종말’ 이라 부른다.
자식이요? 있지요. 한데 있으면 뭘 합니까? "후건(휴거)지 뭔지에 미쳐서 부모고 가정이고 다 팽개치고...말두 마시우."하시는 것 아닌가.
이 노인은 휴거론에 빠져 있으면서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포기해 버린 아들 얘기를 한참 늘어 놓으며 괴로와 했다. "어서 빨리 10월 28일이 지나 갔으면 좋겠수다. 그 느므 자식덜 닭 쫓던 개꼴 되는 걸 봐야 속시워 하겠어요. 휴거라는게, 즈이 놈덜은 세상이 끝장이라고 떠드는데 사실 즈이덜이 끝장나는 날 아니것어요?" 아닌게 아 니라 그 노인의 말대로 요즈음의 현상은 휴거의 징조보다는 휴거론자들의 종말이 임박한 현상이 아닌가 생각된다. 휴거론에 빠져서 가정을 팽개치 고 정상적인 모든 생활을 포기한채 극단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는 현상들은 분명히 퇴폐적인 종교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퇴폐적 종말론이 그럴듯해 보일 정도로 시대가 갖가지 종말적인 현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비극이 아닐 수 없다.
휴거론 종말론의 내용, 성서학적 무지와 점성술에서 비롯돼
휴거를 주장하는 이들이 펼치는 성서상의 논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성경에는 분명히 종말현상으로서 휴거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되어있다. (데살로니가 전서 4:17)
둘째 그러나 성경에는 예수가 그 때 (종말의 때) 를 아무도 모른다(마태24:36)"고 나와 있지만 삼위일체 교리를 믿는다면 하나님 아버지=아들 예수
=성령이므로 아버지가 아시는 일을 아들이 모를리 없다(삼위일체교리에 대한 이해).
셋째 ‘깨어 있는 자'는 재림의 때를 알 수 있다고 성서는 말하고 있다. (마태 24:32, 데살로니가 전서 5:4)
넷째 인류의 종말은 1999년에 있고, 1992년에 예수 재림이 이루어지고 믿는 자들의 공중 휴거가 일어난다. 이때부터 대대적인 7년 환난이 일어난다.
섯째 요한계시록이 말하고 있는 짐승의 수 666은 컴퓨터 바코드 혹은 유럽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이 표를 받은자는 휴거에 참여할 수 없다.
여섯째 휴거를 준비하려면 죄를 회개하고 쉬지말고 기도하며 사랑을 실천하고 1992년 10월에 예수 재림이 일어남을 믿어야 한다.
이상과 같은 주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첫번부터 세번까지는 성서를 인용하면서 근거를 대지만, 인류의 멸망이 정확하게 1999년 이고 이의 7년전인 1992년부터는 휴거와 7년 대환란이 시작된다는 네번째의 주장은 노스트라다무스주2의 성경역사 7천 년설(혹은 6천 년설)에 근거한 종말론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러니까 휴거론에서 구체적인 날짜를 제시하는 부분은 성서보다도 중세의 점성술에 의해 영향을 받은 셈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휴거를 준비하는 길은 1992년 휴거를 믿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주② 노스트라다무스 Michel de Notredame Nostradamus (1503-1566), 프랑스의 점성가, 의사, 샤를 9세의 시의 (侍醫). 점성술에 기초한 운문 예언서 "Centuries"가 유명한데, 그의 예언서를 연구 해설한 책만도 6천여종에 달한다. 1999년 인류종말섬은 그의 예언서를 해석하면서 여러번 수정을 거쳐서 나은 주장이다.
성서적 종말론은 박해받는 사람들을 위한 박해시대의 희망문서였다.
휴거른자들이 의거하고 있는 성서적인 근거 가운데 소위 인류 종말에 대한 예언이라든가, 악마의 표 666에 대한 해석들은 인용한 성서 본문 자체의 시대적 상황이나 역사에 대해선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문자만을 가지고 소박하게 현재에 적용하면서 상상의 날개를 펴고 있다. 구약성서의 다니엘서나 요한게시록과 같이 성서에서 종말론을 이야기하고 있는 묵시문학이라는 것들은 모두 처절한 박해시대에 생겨난 문학이다. 박해를 이기고 끝까지 순교할 것을 다짐하는 유 대교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희망의 신앙 격려문이다. 그러나 상황 자체가 극심한 박해 상황이기에 표현법은 철저히 전통적인 암호표기법을 썼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처절한 죽음을 면할 수 없었던 시대였기에 누가 본다해도 괜찮을 난해한 암호와 상징을 사용했다.
수 많은 짐승과 온갖 재앙에 대한 갖가지 환상적 표현들은 모두가 빠짐없이 이미 구약 성서 곳곳에서 사용한 표현법이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당시 기독교인들의 처절한 박해상황과 역사적 경험과 순교신앙이 반영돼있다.
666은 그리스도교를 박해한 일곱황제로, 순교신앙 간직할 것 강조한 의미
요한 계시록 13:16-18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도 그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를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육이라."
또한 요한계시록 17:9-10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 기도 나온다.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산이요,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이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깐 동안 계속하리라.
요한게시록 13:18에 나오는 짐승의 수 666에 대하여는 그동안 해석이 구구하지만 17:9-10에서 해석하고 있는 "지혜의 뜻"을 따르며 666이란 "일곱 왕"이라는 것인데, 일곱 왕을 누구로부터 칠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돼 있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666이라는 숫자에는 그리스도인들이 겪었던 박해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경험과 기대가 깃들여있는 것이다. 하인리히 크라프트에 의하면 역사상 가장 극악한 기독교 박해자였던 도미티안 황제가 암살을 당하자 (96년) 이어 즉위한 네르바 황제 (그도 98년에 죽어버리고 말았다) 시대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제국이 멸망당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박해자 도미치안 황제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한 클라우디우스 황제시대로 부터 시작해서 네로, 베스파시아누스, 티두스, 도미치안 까지의 다섯 황제는 이미 죽었고, 방금 즉위한 여섯번째 황제 네르바도 일년을 죽어 넘어지면서 로마가 멸망될 것이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해방을 맞을 것이라 는 희망을 갖고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기 위한 암호문자라는 것이다. 주3®
주3이에 관한 해석으로는 Heinrich Kraft의 Die Otenbarung des Johannes의 한글 번역판, 『요한묵시록』, 국제성서주석, 한국신학연구소 1983.
그런데 이러한 역사적인 암호문자들을 휴거론자들은 단순한 상상에 의거해서 해석하거나 문자 그대로 이해하려 하기에 보통 넌센스가 아니라는 것이다.
신학적 무지는 비극을 낳는다.
하나하나 신학적 안목을 갖고 살펴보면 휴거론 이라는 것이 얼마나 황당한 상상으로 이뤄진 것인 가를 알 수 있다. 이들의 희극성은 성서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 부족과 기독교 교리의 중추를 이루고 있는 삼위일체신론 (三位一體神論)에 대한 무지스런 이해, 그리고 시대 착용적인 고대세계관의 고집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서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부족은 성서자체의 경전과정에 대한 몰이해와 성서의 내용이 맞고 있는 시대적 상황과 의의에 대한 무지, 그리고 성 서적 표현법들 가운데 특히 묵시문학적 표현들이 지니고 있는 암호적인 의미사용의 의미에 대한 몰이해 등으로 이야기 할 수 있다. 이들이 재림의 때를 알수 있다"는 논리를 펴기 위해 제시하는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이해는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역사적인 이해나 신학적인 의미에 근처에도 접근하지 못한 것이다.
.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똑같이 동일하다는 것이 삼위일체 신앙인데 왜 아버지는 알고 아들은 모르겠느냐 (최후의 심판의 때를)"는 주장에는 삼위일체라는 말을 역시 문자적으로 이해하면서 이 교리가 역사적으로 고백해온 신앙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하다는 것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칼케돈 회의 (A.D. 415) 에서 삼위일체교리에 대한 결론은 삼위는 위격에서 다르시나 본질에서는 동일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론에서는 우선 위격의 다름이 지니고 있는 뜻을 깊이있게 이해한 후 본질에서의 같음을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주4® 삼위일체론에 대한 현대신학적인 이해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기초적인 틀이 잡히기 시작했다. 이에 관한 현대신학의 논의는 Eberhard Juengel의 『세계의 비밀로서의 하나님』 (Gott als Geheimniss der Welt) 참조.
기본적인 신학 인식이 없는 상태에서 성서나 교리자체를 뮨자만 가지고 극단적으로 해석할 때는 휴거론 같은 비극적인 주장을 낳게 된다.
칸트의 말을 엇빌려 말해보자면 신학이 없는 신앙은 맹목적이고, 신앙이 없는 신학 또한 메마르다. 신학없는 신앙이 죄충우돌하며 빚어내는 온갖 맹목의 행태는 가히 희극적이라고 할 수 있다. 휴거론을 포함한 모든 시한부 종말론과 고대 세계관을 그대로 수정없이 받아들이는 모든 내세론(천당 지옥론)과 말세론, 그리고 축자영감설(逐字靈感說) 에 의한 성서해석들은 하나 같이 신학이 필요 없다는 맹목의 신앙으로 철옹성을 쌓고 온갖 퇴폐 행각을 벌인다. 요즈음 문제가 되고 있는 일부 휴 거론자들의 소요도 한예에 불과하지만 축복과 영혼구원의 메세지 만을 팔고 있으면서도 정작 죄없는 이들의 처절한 고통과 불행, 그리고 가진자들의 불의한 행운들에 대하여는 끝내 침묵하거나 오히려 조장하는 기존 교회들도 모두 신학없는 맹목의 신앙 행태요 이단이 아닐 수 없다.
1992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