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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탄생과 내적 준비(Birth and Internal Preparations)
1.1.가문과 탄생
사람은 아무리 멀더라도 근본을 떠날 수 없습니다. 변치 않는 심정적, 정서적인 근본을 떠날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냐. 이것은 뿌리가 거기서 퍼져 나갔기 때문입니다. 뿌리를 넘어설 존재가 없기 때문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향심(鄕心)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고향이라는 것은 내 삶에 있어서 중요한 교육의 재료를 80퍼센트 이상 공급하는 곳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에게서 고향과의 인연을 끊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지 않겠어요? (187-290)
1920년 1월 6일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문촌'에서 문선명선생은 독립운동가의 후손인 아버지 문경유선생과 어머니 김경계여사의 8남매 가운데 차남으로 탄생하였습니다. 남평 문씨인 선생의 가문은 대대로 배고픈 사람은 절대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말라는 전통을 가지고 있어서 배고픈 사람들에게 밥을 해주고 잠자리를 제공하는 등 선의의 공적을 쌓은 집안이었습니다. 증조부이신 문정흘 선생은 당대에 성공하여 부유하였으나 막내아들인 문윤국목사가 독립운동에 가산을 헌납하였습니다.
선생의 작은 할아버지인 문윤국 목사는 3·1운동 평안북도 책임자로 2년 동안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으며, 상해 임시정부에 가산을 털어 후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선생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다음 해 선생의 일가가 독립만세 사건을 중심삼고 시련을 겪던 터전 위에 탄생하셨습니다.
선생은 어린 시절 타고난 호기심과 탐구력으로 자연의 이치를 깨달았으며, 정의감과 동정심으로 불쌍한 사람이나 동물들을 돌보았습니다. 선생이 10여세 되었을 때 집안이 모두 기독교에 입교하였습니다. 이후 선생은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고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선생님은 16세 때에 비상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부활절 아침에 오랜 시간 눈물어린 기도 끝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생님께 나타나셔서 많은 계시와 교시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심오하고 놀라운 것들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고통 받고 있는 인류 때문에 하나님께서 슬퍼하고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에게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특별한 역할을 해달라고 요구하셨습니다. (134-145)
1.2.학창시절
스무 살 전에, 그때에 이 길을 출발한 거예요. 그때는 천진난만한 그런 시대였습니다. 좋은 무엇이 있으면 전부 내 것으로 만들고 싶고, 색다른 것이 있으면 알아보고 싶고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그런 마음이 강한 때였어요. 그런 시절에 이 엄청난 하늘의 뜻을 알고 천적인 대명을 받들고 나서는 그날부터는…. 이 엄청나고 큰 것을 하나님이 약속함과 동시에 그것을 느끼고 소망으로 삼고 지탱하기에 너무나 크고, 그것을 받들기 위해서는 안팎으로 모든 것을 갖추어야 할 자기 스스로의 책임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50-106)
16세가 되던 해 4월 17일 부활절이 다가오는 어느 날 아침, 문 선생은 밤을 꼬박 새워 기도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만나 하늘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날 홀연히 나타나신 예수님은 죄악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인류와 그로 인한 하나님의 슬픔을 해원시켜 달라는 간곡한 당부를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 후 선생은 오직 한 뜻, 하나님과 인류의 해방을 위해 남모르는 공의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창조주 하나님과 인간의 타락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와 뼈를 깎는 노력으로 드디어 구원섭리의 해답을 찾기에 이르렀습니다.
선생은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경성상공실무학교 전기과를 졸업, 일본 와세다대학 부설 고등공학교 전기과에 입학했습니다. 어렸을 때 문 선생은 옳다고 생각하면 곧바로 행동에 옮기는 성격의 소유자로, 유학 중에 친구들과 비밀결사를 조직해 항일 지하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당시 일본 경찰의 요시찰 인물로 지목돼 일상생활 동태에 대한 감시는 물론 경시청에도 불려 다녔으며, 항일운동 혐의로 1944년 체포되었다가 1945년 2월에 풀려났습니다.
2.공생애 출발과 성혼(The Start of Rev. Moon’s Public Life and the Holy Wedding)
2.1.공생애 출발과 수난(The Start of Rev. Moon’s Public Life and Hardships He Faced)
2차 대전 직후 기독교문화권을 중심하고 비로소 지상에 부모의 이념을 가지고 통일운동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기독교와 기독교문화권인 미국이 통일된 세계 위에 있었습니다. 그때에 선생님의 말을 들었으면 해방과 더불어 27세 이후 3년 내에 이 나라의 해방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남북을 통일해서 그러한 뜻을 이루기 위해 품었던 사나이의 꿈이 이 기독교와 미국이 책임을 못 함으로 인해 좌절됐습니다. (166-76)
해방 후 선생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불리던 평양에서 선교를 시작하였습니다. 선생을 따르는 제자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북한은 이를 우려해 선생을 남한에서 보낸 간첩으로 몰아 1946년 8월 12일에 옥중에 수감하였습니다. 공산 당국은 남한에서 온 간첩이라는 혐의로 고문하였지만 혐의점을 찾지 못하자 11월 21일에 석방하였습니다.
2.2.흥남감옥 수난 (Suffering at Heung-nam Prison)
선생님은 공산당이 감옥에 넣고 별의별 놀음을 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끝끝내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되 절대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내가 약속했으면 내가 약속한 것이 절대적이요, 그가 나에게 명령하면 그걸 절대적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어렵고 쉽고 그거 다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감옥에서도 효자는 효자 노릇 해야 됩니다. 충신은 충신 노릇을 감옥에 들어가서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106-72)
선생님은 옥중에서 매를 맞아 쓰러지면서 피를 흘리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며 차라리 송구스러워했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먼저 아는 하나님 앞에 어떠한 호소도 원망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로지 갈 길을 바라보며 목적지를 향해 묵묵히 갈 뿐이었습니다. (12-205)
선생은 고문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길 멈추지 않았습니다. 1948년 2월 22일 북한 정부의 종교 말살정책으로 선생은 다시 투옥되었습니다. 평양에서 3개월 수감되었던 선생은 5월 20일 특별노무자를 수용하는 흥남감옥으로 이송되었습니다. 흥남감옥은 수감자들을 굶주림과 추위라는 극한적인 상황에 둔 채로 비료공장에서 3년 동안 강제노동을 시키면서 죽도록 내버려두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생은 옥중에서도 타인을 생각하며 모범수로 타인의 존경을 받으며 생활하였습니다.
2.3.통일교회 창립(Founding the Holy Spirits Association for the Unification of World Christianity)
기독교가1945년에 선생님과 하나 되었더라면 그 이후로 어떤 고난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반대하는 자리로 떨어지자 선생님은 숱한 고난을 받아야 했고 그것을 스스로 이겨내야 했습니다. 통일교회를 창립시켜 기독교를 대신하여 세계적인 탕감복귀의 기반으로 세워야 했습니다. (130-289)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흥남감옥에서 나온 선생은 부산으로 왔습니다. 선생은 제자들과 부산 범냇골에서 토담집을 짓고 다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선생이 제자들과 손수 지은 토담집은 2평 남짓했지만 선생의 뜻은 이미 세계를 향해 있었습니다. 대구를 거쳐 서울까지 전국적으로 선생의 말씀이 전해졌으며, 선생의 큰 뜻을 따르는 젊은이들이 모여들었습니다.
1954년 서울 북학동에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가 창립되었습니다. 당시 연세대와 이화여대 등 당시 지식인이었던 교수, 대학생들이 선생의 말씀을 듣고 새로운 삶을 결심하였습니다. 위기감을 느낀 학교 측은 학생들을 퇴학시키고 교수를 제명하였으며, 선생을 풍기문란 죄로 고발하였습니다. 1954년 7월 4일 선생은 무고한 죄로 서대문형무소에 입감되었다가 석 달 만에 무혐의로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생의 말씀은 이미 마른 들판의 불길처럼 한국을 넘어 일본, 미국까지 전해졌습니다. 또한 선생의 말씀을 담은 ‘원리해설’이 처음으로 발행되는 등 내적 기반과 외적 선교 활동이 활발하게 확대되었습니다.
2.4.한학자 여사와 성혼
1960년에 행했던 성혼식의 배후에는 아담 이후 예수님 때까지4천년, 예수님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2천년의 역사과정에서 걸렸던 모든 것을 탕감조건을 세워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 행사는 세계적이고 천주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는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고, 그에 대한 박해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컸습니다. (122-97)
1960년 문선명 선생과 한학자여사의 성혼식이 이루어졌습니다. 한학자 여사는 1943년 안주에서 3대째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탄생, 모친 홍순애 여사의 절대적 신앙생활 속에 성장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학자 여사의 독실한 신앙과 성품을 보고 문선명 선생의 배필로 한학자 여사를 간택하셨습니다.
성혼식은 전국 각 교회로부터 선발된700여 명의 성도가 모인 가운데 진행되었는데, 이 식은 문선명 선생의 성혼이자 동시에 이제까지 아버지만을 모셔오던 자녀들이 참부모를 모시고 찬송하고 경배드릴 수 있는 대전환의 깊은 의미가 있었습니다. 선생은 성혼을 기점으로 원리가 세계적으로 전해지고 세계 평화의 뜻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3. 흥남에서 부산까지 남하노정(The Southbound Journey from Heungnam to Busan)
3.1.유엔군의 흥남 상륙과 극적인 출옥1950. 10. 14 02:00경
10월12일 형기가 7년 이상인 죄수 한 70명 정도를 30리쯤 산속으로 끌고 들어가서 전부 죽여 버렸습니다. 그 다시 선생님의 형기는 5년이었기 때문에 그다음, 다음날이 내가 끌려갈 차례였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바쁘셨을 것입니다. 13일 밤거리를 내다보니 벌써 사태가 달라졌습니다. 유엔군이 흥남에 상륙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드디어 10월 14일 공산군이 물러가자 우리는 감옥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22-130)
3.2.평양 체류 40일1950. 10. 24 ~ 1950.12.4
평양에 나와서40일 동안 있었는데 거기에서 280리만 가면 나의 고향입니다. 이틀이면 고향에 갔다 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향에 있는 부모 형제들은 찾아 가지 않고 뜻을 대했던 사람들을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찾아갔습니다. 하늘을 두고 맹세했던 사람들을 만나러 다닌 것입니다. 12월 2일까지 해질녘까지 사람을 보내 가지고, 나로서는 하나님이 돌아서라 하는 지시가 있을 때까지 최고의 정성을 들여야 했습니다. (38-325)
3.3.청단으로의 피난 길
뒤에서는 중공군이 따라오는데 데리고 가는 사람(옥중제자 박정화)은 다리가 부러졌고, 버리고 갈 수 없는 사정이 있고, 데리고 가려니 앞길은 막혔습니다. 지나가는 트럭은 전부 다 군사 물자로 가득하고 길은 이중 삼중으로 막혔습니다. 나보다 큰사람을 데리고 내려오는데 업고 올 수 없어서 자전거에 태우고 오려니 큰일이었습니다. 가자니 갈 수 없고 죽자니 죽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42-33)
3.4.청단에서 임진강까지
청단에서 삼팔선까지 80리 길입니다. 그 길을 달밤에 가는데, 그 길이 잊혀 지지 않습니다. 얼마나 고단하지 이 사람(김원필)은 보따리를 매고 가면서도 조는 거예요. 모르는 사람은 그렇다 구요. 그러나 선생님은 한 발자국이 바쁜 거예요. 오늘 저녁 중으로 임진강 턱까지 가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는 그런 무엇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에는 선생님이 비상 작전, 비상조치를 하는 것입니다. 안테나를 최고로 뽑아 보는 거라 구요. 밤에 남들은 전부 다 자는데 우리 셋이서만 자전거를 끌고 임진강까지 나왔다 구요. 임진강 강가에 와서 잤습니다. (57-274)
3.5.임진강을 건너 서울로1950. 12. 21
아침 새벽같이 일어나 가지고 임진강이 얼어붙어서 결국 강을 건너갔는데 내가 맨 마지막으로 건너갔습니다. 그 후부터는 커트예요. 커트해 가지고 전부 다 돌려보내는 거예요. 그 뒤 사람들은 전부 뒤로 돌아간 것입니다. 이럴 때 1분만 서성댔더라면 어떻게 되었겠나요? (158-57)
3.6.삼팔선을 넘으며
나는 삼팔선을 넘을 때 기도하던 말을 잊지 않는 다구요. ‘아버지! 저는 이남 땅으로 갑니다. 저는 이북에 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패자의 서러움을 지닌 채 옥중의 신세를 면치 못하다가 쫓김 받는 무리의 걸음을 따라 이남으로 갑니다. 반드시 이 손으로 공산당을 소화하고, 몇 년 후에 돌아오겠습니다.’고 결의했습니다. 내 손으로 자유세계를 수습해 가지고 북한을 해방하겠다고, 삼팔선을 양발로 타고 서서 울며 맹세했던 날이 엊그제 같아요. (64-251)
3.7.경북 영천1951. 1. 18
열차가 건너가는 둑이 있었는데, 그 둑에 앉아서 지난날을 생각하며 편지를 찢으면서 결심을 했습니다. 그날이 무슨 날이냐 하면, 선생님이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다는 사실을 중심삼고 만장萬丈의 편지를 써서 세 번 씩이나 연락을 했습니다. 아마 한 20장은 썼을 거예요. 그런데 그 마지막 편지를 갖다 줬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되돌려 보낸 것입니다. 선생님은 되돌려 받은 그 편지를 가지고 이북을 나왔습니다. 1월 18일 그 편지를 읽으면서 찢어 버렸습니다. 그날이 선생님에게는 가장 슬펐던 날입니다. (45-143)
3.8.부산 도착1951. 1. 27
부산에 내려가니 인산인해가 돼 가지고 사람들이 어디 뭐 구멍 있는 데는 다 들어가 박혔고, 있을 만한 데는, 처마 끝부터 전부 만원이거든요. 그러니 어떻게 해요? 낮에는 자고, 밤에는 노동을 나가는 거예요. 거 밤에 추위에 떨던 생각이 지금도 아득해요. (153-310)
3.9.부산 범내골 토담집
부산 범일동, 거기에 그야말로 토굴을 짓고 혼자 있으면서 제2의 출발을 준비했어요. 벽과 지붕을 진흙과 바위로 지은 아주 초라한 장소였습니다. 산비탈에다 오두막집과 같은 것을 짓고, 박스로 임시 지붕을 만들었어요. 그래도 그 방 한 간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모른 다구요. (52-279)
4. 세계를 향한 도약 (Advancing to the World)
4.1. 민족의 중심에 서서 (At the Center of the Korean people)
국내에서는 공산주의 방어 문제를 중심한 승공연합 활동을 승공계몽단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때 모든 국민들은 통일교회 움직임에 전면적으로 반대했습니다. 또 기성교회는 통일교회의 교회 확장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반대하는 환경을 넘어 국민이 가야 할 길의 내적 방향을 제시함과 동시에, 국외에서는 세계 국민들이 하나님의 뜻에 재차 귀속할 수 있는 길을 닦지 않으면 안 될 책임이 있었던 것입니다. (135-243)
1954년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가 창립된 후 초창기 활동은 한국 내 전도활동을 통한 내적인 기반 마련에 집중되었습니다. 문선명 선생이 직접 원리말씀을 강의하시고 생활을 통해 식구들에게 모범을 보이시는 등 초창기의 뜨거운 열기는 전국적으로 번져갔습니다. 특히 선생은 눈물로 기도하시고 온 몸이 땀에 젖도록 열과 성을 다해 말씀을 해주셨기 때문에 이에 감동받은 사람들은 말씀을 전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주말 수련회, 7일 수련회, 21일 수련회, 40일 수련회가 정립되었고, 교회의 형태도 갖추어졌으며, 1957년 초 20개에 불과하던 교회가 1960년 1천개로 확대되는 등 짧은 기간에 한민족의 중심에 교회 기반이 안정적으로 마련되었습니다.
4.2. 세계선교의 확장 (Expanding the World Mission)
단 시일 내에 통일운동은6대주에 걸쳐 127개 국가에 번지게 되었습니다. 1971년에 하나님께서는 선생님에게 계시를 주시어 수백만 명이 새로운 하나님의 계시를 기다리고 있는 미국으로 빨리 가서 메시지를 전파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 나라가 전 세계의 인류와 연결을 맺는 데 있어서 교량의 역할을 하도록 선택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02-289)
1958년 일본, 1959년 미국으로 전해진 인류구원과 세계평화를 향한 선생의 메시지는 젊은이들의 가슴을 울렸고 새로운 삶의 비전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세계의 젊은이들이 선생의 운동에 동참하였으며, 말씀의 불길은 역사상 전례 없이 짧은 기간 동안 세계 180개국까지 전해졌습니다.
세계로 퍼져나간 선생의 말씀은 청년들에게 새로운 희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러한 희망은 일시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으로 끝나지 않고 세계평화를 위한 구체적인 활동들로 모아져 세계를 바꾸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선생은 다양한 단체를 설립하여 세계평화를 이루어가기 위한 일들을 준비하였으며,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공산주의에 근본적인 대안을 제시하며 승공활동을 펼치셨습니다. 세계평화란 특정 국가의 무력이나 이익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래 한 형제임을 깨닫고 참사랑으로 돌아갈 때 가능하다는 선생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물질 중심의 사고를 주장하는 공산주의에 가장 강력한 위협이 되었습니다.
4.3. 미국을 중심한 세계 승리권 확립
(Establishing the Victory of the Global Providence Centering on America)
사상전에 있어서, 종교면에 있어서 미국의 종교를 내가 리드할 수 있습니다. 세계사에 있어서 공산주의 사상, 민주주의 사상을 내가 리드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 세계적으로 ‘레버런 문주의’, ‘무니즘(Moonism)’이라고 합니다. 무니즘이라는 말이 세계화돼 있습니다. 이제는 ‘가디즘(Godism)’이라고 하고, 또 ‘유니피케이셔니즘(Unificationism)’이라고 하는 등 여러 가지로 말합니다. 민주세계와 공산세계가 벽에 부딪쳐 가지고 20세기 이내에 멸망할 것을 전부 다 공인하고 있지만 레버런 문이 주장하는 이 주의, 이 운동만은 21세기 이후의 주의라고 자타가 공인할 단계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140-262)
선생은1965년 제자 2명을 동반하고 일본, 미국, 유럽 등 세계 40개국을 순회하였습니다. 이때 선생은 특별히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만나 세계평화를 위한 미국의 역할을 말씀하셨습니다. 선생은 청교도 정신을 가지고 세운 미국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나라로서 평화로운 세계를 만드는 데도 앞장서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미국을 깨우는 선생의 외침은 계속되었습니다. 1974년 선생은 평화의 선구자로서 미국 백악관을 방문하여 닉슨 대통령과 요담을 가졌습니다. 이어 선생은 미국 32개 도시에서 '기독교의 새로운 장래'에 대해 연설하셨습니다.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개최된 '희망의 날' 대 강연에는 2만 5천여 명이 참석, 선생의 말씀을 경청하였으며, 미 의회에 초청되어 연단 연설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선생의 메시지는 가치를 상실하고 방황하던 젊은 지성인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어 1976년 양키스타디움과 워싱턴 머뉴먼트 광장에 각각 5만4천, 30만여 명이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선생의 외침은 미국을 감동시켰으며 세계를 움직였습니다.
4.4. 고난과 승리 (Hardships and Victory)
본인은 미국에서 옥고를 치르고1985년 8월에 출감했습니다. 그들은 나에게 허물을 만들어 투옥했지만, 나는 옥중에 있는 13개월 동안 사무친 기도로 미국과 세계의 운명을 위하여 하루도 염려를 안 한 날이 없었습니다. 미국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본인의 사명을 다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영적 신앙적 기반을 재 각성 시키는 수많은 행사들을 진두지휘해 왔습니다. 반대의 회오리가 몰아쳐도, 핍박의 물결이 아무리 거세어도 패자가 되지 않고 위하여 사는 천도를 따라 승리의 제물들을 지닌 채 돌아왔습니다. (135-241)
미국은 선생의 영향력이 커지자 경계하기 시작했습니다. 1981년 미국은 선생을 탈세혐의로 기소하였습니다. 미국은 2년 9개월 동안 재판을 끌면서 선생이 재판을 피해 미국에 더 이상 입국하지 않고 한국에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선생은 결백하였기에 당당하게 재판을 받았습니다. 결국 무고한 선생이 유죄판결을 받고 미국 댄버리 교도소에 입감되자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모인 종교지도자 3천 5백 여 명이 종파를 넘어 하나 된 마음으로 백악관 앞에서 대대적인 항의시위를 벌였으며, 일부 지도자들은 미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선생과 함께 1주일씩 교도소에서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선생은 댄버리 교도소에 수감되어 계시는 동안 한 치의 후퇴도 없이 세계평화를 위한 활동들을 더욱 활발하게 전개하였습니다. 침례교 계통의 쇼우 신학대학에서는 이러한 선생의 노력에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수여하기도 하였습니다.
5. 평화시대 기반 마련(Laying the Foundations for an Era of Peace)
5.1.공산권 승리 (Victory Over Communism)
개인에서부터 가정‧종족‧민족‧국가‧세계, 모든 사상계로부터 반대를 받으면서 이 길을 나왔지만 이제는 다 극복했습니다. 김일성까지도 극복했습니다. 김일성의 그 담벽을 허는 것은 힘이 아닙니다. 하늘의 사랑만이 뚫을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갔다 온 거기에서는 재창조 역사의 기적이 벌어진 것입니다. 고르바초프를 만난 후에 세계가 변화하고, 김일성을 만난 후에 남북회담의 난항의 모든 문제가 즉각적으로 해결되는 사실들은 거기에 하늘이 움직인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227-160)
통일교회는 사상적으로도 원수인 공산주의하고 싸웠지만, 공산주의를 없애 가지고 그들을 구해주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산주의가 무너졌을 때 미국은 다 가만히 내버려두었지만, 레버런 문은 선두에 나서서 공산세계의 젊은 청년과 정부의 간부들을 교육한 것입니다. (244-180)
5.2.공산주의 종언을 예언
선생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적 한계에 대해 끊임없이 지적해 왔습니다. 이는 공산주의를 냉전이라는 국제정치 역학적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섭리역사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에 반드시 공산주의는 몰락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선생은 1985년 제2회 세계평화교수협의회 총회를 개최하면서 주제를 '소련 공산제국의 멸망'으로 채택하도록 하였습니다. 당시 많은 학자들은 이러한 주제를 충격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이후 소련은 개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1980년대 후반 남북미에서 카우사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습니다. 카우사 운동은 좌경화되어 가는 남미에 경종을 울리고 새로운 사회의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5.3.고르바초프와 회담
선생은1990년 4월 11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대통령과 역사적인 만남을 가졌습니다. 이날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있었던 만남은 한소관계에 새로운 장을 열었으며, 한-소수교, 경제협력, 한반도 통일을 위한 소련의 역할 등을 논의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소련 내 종교자유문제 등 인류 평화를 위한 제반 문제가 진지하게 논의되었습니다. 이 회담은 냉전시대를 완전히 종식하고 소련의 개방을 더욱 앞당기는 회담으로 세계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5.4.김일성 주석과 만남
1991년12월 6일선생은 김일성주석과 역사적인 만남을 가졌습니다. 고향이 북한인 선생은 고향을 떠난 지 40년 만에 북한 최고지도자인 김일성주석과직접만나종교의자유와경제협력, 통일방안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으며, 공동선언문을 발표하였습니다. 공산주의 몰락을 제일선에서 주장하던 선생이 김일성주석을만나는모습은오랫동안형과아우가만나는것처럼다정했으며, 시종일관 웃음이 끊이지 않는 등 '통일은 참사랑으로'라는 구호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5.5.세계여성시대 선포 (Declaration of the Women’s Era)
인류의 시조 아담 해와는 그 지은 원죄로 인하여 거짓 부모가 되었으므로 오시는 메시아는 인류의 선한 시조로서 전 인류를 다시 태어나게 할 참부모로 오시게 되는 것입니다. 본인의 내자인 한학자 총재는 본인과 함께 이 고난의 길에 동참한 전 세계 여성의 대표자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편인 본인이 하늘의 뜻을 따라 정의의 길을 가는 동안 불의의 세력으로부터 박해받고 투옥당하는 쓰라린 아픔을 함께 맛보면서 양심적이고 의로운 여성들에 의한 새로운 평화운동을 일으킬 결의를 다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계평화여성연합 창설대회로 결실된 것입니다. (229-80)
이제 메시아로 오시는 참부모 앞에 지금까지 남성들이 주도했던 전쟁과 폭력, 억압과 착취, 그리고 범죄의 세계를 종결짓고 평화와 사랑 그리고 자유가 넘치는 이상세계를 실현할 참된 일꾼들이 바로 이 시대의 여성들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정의와 선을 치고 반대하며 핍박하던 남성 중심의 악한 세력들이 더 이상 날뛰지 못하도록 해야 할 일도 여성들의 과업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15만 한국 여성들은 한학자 총재를 받들고 세계평화여성연합의 기본이념인 두익사상(頭翼思想)과 하나님주의를 남 먼저 무장하여 찾아오는 세계의 여성들을 교육할 수 있는 지도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29-82)
5.6.한일 여성자매결연으로 여성평화운동 시작
1991년 한학자 여사를 중심으로 한국과 일본에서 여성평화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9월에 일본에서 7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아시아와 세계를 구원하는 참사랑운동'을 주제로 아시아평화여성연합 대회가 개최되었으며, 이어 10월에 한국지부 창설대회가 개최되었습니다. 11월에는 서울 올림픽 펜싱경기장에서 일본 각 지역 대표 1,500여 명과 한국 여성 15,000명이 함께 자매결연 행사를 가졌습니다. 이는 오랜 갈등관계에 놓여 있던 한국과 일본의 역사를 넘어 여성들이 화해와 평화의 새로운 역사를 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5.7.세계평화여성연합 창설과 세계적 참부모 선포
1992년 참가정, 건전한 도덕사회, 여성의 참사랑 정신을 기초로 여성이 세계평화를 위해 활동하는 세계평화여성연합이 창설되었습니다. 선생은 지금까지의 역사를 발전시키고 이끌어가는 역량이 남성들이었다면 이제는 '세계 여성시대'가 도래했다고 말씀하시면서, 전쟁과 폭력, 억압과 착취, 그리고 범죄의 세계를 종결짓고 평화와 사랑 그리고 자유가 넘치는 이상세계를 실현할 참된 일꾼은 바로 여성이라고 격려하셨습니다.
세계평화여성연합 한학자총재는 1992년 7월 전국 4개 도시에서 개최된 세계평화여성연합 전국지도자대회에서 문선명 총재를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 재림주, 참부모 이심을 선포하였으며, 8월 24일 제 1회 세계문화체육대전을 통해 문선명 총재는 세계 앞에 인류의 참부모임을 선포하셨습니다.
6. 한학자여사와 가정
6.1. 한학자여사의 길
한학자 여사는 1943년 음력 1월 6일, 평안남도 안주에서 한승운 선생과 홍순애님 사이에 외동따님으로 탄생하셨습니다. 모친인 홍순애님은 1934년 3월 5일'아들을 낳으면 우주의 대왕이요 딸을 낳으면 여왕이 된다.'는 계시를 받고 한승운 선생과 혼인하신 뒤 9년의 정성을 들여 한학자 여사를 낳으셨습니다. 한학자 여사는 1960년 4월 11일 문선명 선생과 성혼하시어 13자녀를 두셨고, 천의에 따라 평생을 문선명 선생을 내조하며, 참사랑을 중심한 참가정운동과 평화세계 실현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아오셨습니다.
한학자 여사는 일생을 하나님의 참사랑을 중심한 평화세계와 인류 이상사회 실현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여 오셨습니다. 부군인 문선명 선생과 더불어 1990년에 구소련 고르바초프 대통령, 1991년에는 북한 김일성주석을 비롯하여 공산세계의 많은 지도자를 만나 평화의 전령의 역할을 다하셨습니다. 또한 공산세계의 몰락과 함께 도래한 탈냉전 이후 참어머니의 심정과 사랑으로 인류가 안고 있는 모든 병폐를 치유하기 위해 세계평화를 위한 국제적인 여성운동을 전개하셨습니다.
1992년4월 10일서울에서 세계평화여성연합을 창설하신 이래 한국 여성으로는 최초로 유엔, 미국 국회의사당, 중국 인민대회당, 한국 국회 등 세계의 중심부에서 '세계평화'의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세계의 주요 대학들을 순회하시면서 젊은이들에게 미래의 길을 제시해주셨습니다.
한학자 여사는 인류 행복과 평화세계를 위한 여성운동뿐만 아니라 청소년 순결운동 및 국제구호 복지활동 등 다방면에서 구체적인 실천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특히 국제구호친선재단의 이사장으로서 세계 180 여 개국과 아프리카 등의 오지에서 참사랑의 구호활동을 펼쳐 오셨습니다.
6.2. 가정과 자녀시대
하나님을 부모로 모시고 인류가 하나 되는 그 중심에는 가정이 있습니다. 문선명 선생 양위분의 자녀들은 예술, 교육, 사회봉사, 구호활동 등 각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하며 2세 시대를 이끌어갈 리더로 자리매김해 가고 있습니다. 특히 3세 손자 손녀들까지 한 마음으로 문선명 선생 양위분의 평화운동에 동참하여 세계를 순회하며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7. 참부모와 성약시대
7.1.성약말씀 선포
어떤 민족, 어떤 종족, 어떤 나라든지 참부모는 다 필요한 것입니다. 모든 국가∙종족∙가정∙개인이 다 연결됩니다. 절대적인 것입니다. 영원불변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개념을 가지고 1992년을 중심하고 세계에 메시아 선포를 하고, 참부모 선포를 다 해 나온 것입니다. 이래서 전부 다 몰아 가지고 미국을 중심하고 1993년에 들어와서 참부모와 성약시대를 발표한 것입니다. (252-280)
7.2.성약시대 안착(Safe Settlement of the Completed Testament Age)
사랑은 일체 이상을 이루는 것입니다. 개인에서 참부모와 성약시대를 안착시키자! 가정에서 안착시키자! 그래서 나라에서 안착시키자!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이상입니다.(252-265)
7.3.훈독회와 이상가정 교육(Hoondokhwae and Education for Creating Ideal Families)
절대신앙∙절대사랑∙절대복종 위에 절대∙ 유일∙ 불변∙ 영원한 가정이요, 거기에 하나님을 모신 영원한 가정이 되어 그것이 영원한 종족이 되고, 영원한 민족이 되고, 영원한 천국이 될 때, 지상천국시대로부터 천상천국으로 직결되어 하나의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295-253)
7.4.새 역사의 산실 청평수련원(Cheongpyeong Training Center: The Start of a New Providence)
성약시대는 축복가정과 영계에 대한 사실을 모르면 완성을 못 합니다. 성약시대의 가정축복은 영계와 육계가 하나 된 자리에 들어가는 거예요. 또 그 하나 된 자리를 이루기 위해서는 영계의 사실을 알아야 돼요. 영계를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300-300)
8. 학위 수상 & 평화메시지(Academic Awards and the Peace Message)
8.1.학위 수상
문선명 선생 양위분의 사상과 생애를 존경하는 많은 학자들은 선생 양위분에게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하였습니다. 문선명 선생은 2000년 IIFWP총회에서 만국평화상을 수상하였으며 브라질 '국민문화 공로 십자상' 등을 비롯하여 여러 나라에서 훈장을 받으신 바 있습니다. 한학자 총재 역시 2001년 UN IAEWP 그랑프리 평화상을 수상하셨습니다.
8.2.문선명 총재
-미국 리커(Ricker) 대학 명예 법학박사(1975년)
-아르헨티나 라 플라타(La Plata) 대학 명예 법학박사(1984년)
-미국 쇼(Shaw Divinity School) 신학대학 명예 신학박사(1985년)
-미국 성경신학대학원 명예 신학박사(1985년)
-미국 버나디언 대학교 명예 법학박사(1985년)
-미국 브리지포트 대학 명예 인문학박사(1995년)
-브라질 훈장회 ‘국민문화공로십자상’ 수상(1986년)
-남부미통합기구 ‘자유통일대십금성 훈장’ 수상(1987년)
-멕시코 국제법률학회 최고훈장 수상(1990년)
-인도 국제통일재단 ‘1991 통일상’ 수상(1991년)
-IIFWP 2000총회 만국평화상 수상(2000년)
-선문대학교 명예 문학박사(2002년)
8.3.한학자 총재
-미국 뉴저지주 브름필드 대학 명예 인문학박사(1990년)
-미국 브리지포트 대학 명예 인문학박사(1995년)
-대만 문화대학 명예 문학박사(1999년)
-브라질 바이야주스테프바신학대학 명예 교육학박사(1999년)
-키르기스스탄 국립사법대학 명예 교육학박사(2000년)
-러시아 우퍼볼타 대학 명예 철학박사(2000년)
-도미니카공화국 페대리코 엔리케스이 카르바할 대학 명예 인간학박사(2000년)
-UN IAEWP 그랑프리 평화상 수상(2001년)
-선문대학교 명예 문학박사(2002년)
8.4.평화메시지
평화세계를 향한 문선명 선생 양위분의 말씀은 43개 국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문선명 선생 말씀은 이미 452권까지 출판되었으며 하나님과 참가정의 가치와 방향성을 제시한 「천성경」, 선생 양위분의 평화 강연문을 모은 「평화메시지」 등이 출판되어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인의 가슴을 뜨겁게 하고 있습니다.
- 문선명선생말씀선집(452권 출판)
- 천성경(20개 국어 번역 출판)
- 평화메시지(43개 국어 번역 출판)
- 세계경전
- 축복가정과 이상천국 I, II
- 가정맹세
- 참부모님 성약시대 강연문집 I, II, III
- 문선명선생 주제별정선(전 12권)
- 평화훈경
- 참부모님 생애노정(전 11권)
- 아버지가 들려주신 사랑이야기(전 12권)
- 아버지의 기도(전 12권)
- 천일국 훈독경(전 12권)
- 훈교경 上,下
- 뜻길
- 참아버님 미수 기념문집(전 9권)
- 한학자총재 화갑 기념문집(전 5권)
9. 심정공감(Relating with True Parents’ Heart)
9.1.수난의 노정 (Course of Suffering)
경기도경찰부수난(1944.10~1945.2) : 문선명 선생은 동경유학시절, 일제의 40년 식민지로서 고통을 받고 있던 민족을 염려하고, 조국의 해방을 염원했던 심정으로 항일 지하운동을 하였습니다. 귀국 후에도 요주의 인물로 경찰의 감시를 받던 선생은 일본에서의 항일운동을 벌인 일이 발각돼 경기도 경찰부에 수감, 극악무도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피눈물이 엇갈리는 고문에도 ‘하나님, 나를 동정마시고, 민족과 국가와 세계 인류를 동정 하시옵소서!’ 하고 기도하며 ‘역사적인 인류의 모든 원한을 대신해 맞는 것이다. 내가 맞고 잊어버리고, 내가 이것을 기억하지 않겠다. 하나님이시여, 이들을 용서 하소서’ 하는 용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1943년 9월 30일, 일본 와세다 고등공학교 졸업 후 10월 중순 귀국.
-1944년10월~1945년 2월, 경기도 경찰부에 유학시절의 항일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과 옥고를 치름. 빈사지경에 이를 때까지의 고문에도 끝까지 묵비권을 행사하여 추가적인 동지들의 피해 없이 사건이 일단락됨.
정주 곽산 지서수감(1945.10) : 8․15 해방이 오기까지를 내적인 준비기로 잡고 인격수양과 원리의 구명에 매진하던 선생은 해방직후 뜻하지 않게 정주 곽산 지서에 일주일가량(종제 문용기씨 동반) 수감되었습니다. 이유는 위조지폐를 사용했다는 죄목이었습니다. 이 일을 돈과 현실에 대한 미련을 버리게 하는 하늘의 뜻으로 여기셨습니다.
- 1945년 10월, 정주 곽산 지서에 위조지폐 연루 혐의로 1주일가량 수감
평양대동보안서수난(1946.8~11) : 문선명 선생은 하늘의 명령에 따라 공산권화 되던 평양으로 들어가 새로운 신앙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당시 평양교계는 해방의 기쁨과 희망으로 교회재건과 신앙의 새로운 혁신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곧 선생의 성경강해를 중심한 말씀에 감동받은 많은 신도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시기한 기성교계와 공산당국의 야합으로 선생은 평양도착 2개월 만에 예수 재림을 준비하던 영적집단 ‘복중교’와의 관련성 및 남한정권이 보낸 스파이라는 모함을 받아 평양 대동보안서에 구속되어 악독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옥중에서 복중교인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였지만 결국 실패하고 선생도 매우 위독한 상태가 되어서야 석방되셨습니다.
-1946년 6월 6일,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평양에 도착, 평양시 경창리에서 집회. 성경강해를 중심으로 한 설교와 성령역사의 뜨거운 예배 분위기로 선생의 말씀을 따르는 많은 신자들이 생겨남.
-1946년 8월 11일, 공산당국은 ‘복중교’의 나쁜 여론을 구실로 지도자들을 구속하고 문선명 선생을 그 유사집단으로 몰아 남한에서 보낸 간첩혐의로 대동보안서에 구속. 혹독한 신체적 고문과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
-1946년 11월 21일, 고문으로 생명이 위독해지자 마지못해 병고를 이유로 석방. 고문 후유증으로 10일간 엄청난 양의 피를 토하심. 평양 식구들의 정성스런 간호에 의해 회복.
흥남감옥수난(1948.2~1950.10.14):선생이 신앙운동을 멈추지 않자 기성교단의 질시와 공산당국의 종교말살정책에 의해 다시 사회질서 문란의 죄목으로 5년형을 언도받고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인연된 식구들을 뒤로하고 하늘을 향한 맹세를 되새기며 선생은 함경남도 흥남 특별노무자수용소로 이감되어 흥남 비료공장에서 강제노동을 하였습니다. 1950년 8월, 유엔군에 의해 흥남이 수복되면서 입감 2년 8개월 만에 석방되었습니다.
-1948년 2월 22일, 기성교단의 투서와 공산당국의 종교말살정책에 의해 평양 내무서에 구속되어 삭발을 당하고 가혹한 고문을 당함.
-1948년 4월 7일, 위 사건의 공판에서 남한의 스파이이며, 사회혼란을 획책했다는 죄목으로 5년형을 언도받고 평양형무소에 수감.
-1948년 5월 20일, 함경남도 흥남감옥(흥남 본궁 특별노무자수용소)으로 이송됨.
-1948년 6월 21일, 흥남 덕동특별노무자수용소에 투옥. 매일 6킬로미터 떨어진 흥남질소비료공장의 비료 하역작업에 동원되어 강제노역.
-1950년 10월 14일, 유엔군에 의한 흥남수복으로 입감 2년 8개월 만에 자동 석방.
서대문형무소수난(1955.7.4~10.4) : 한국전쟁 이후 부산에서 시작된 선생의 말씀은 서울, 대구 등 남한 전역으로 퍼져 갔습니다. 특히 연세대와 이화여대를 비롯해 대학가의 젊은 교인들이 선생의 말씀과 비전에 매료되었습니다. 이를 두려워한 개신교 재단인 연세대와 이화여대는 통일교회 신앙을 가진 교수와 학생에게 이단신앙을 이유로 퇴직, 퇴학처분을 내리고, 선생을 사회 문란혐의로 고발하였습니다. 세상의 온갖 나쁜 소문을 뒤집어 쓴 채 선생은 1955년 7월 4일, 서대문 형무소에 입감되었습니다. 동년 10월 4일, 서울지방법원 결심공판에서 무죄언도를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출감하였습니다.
-1954년 5월 1일, 서울시 성동구 북학동391번지(세대문집)에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창립.
-1955년3월 초순, 박상래 교수가 연희대학교(현 연세대학교)로부터 이단 신앙(통일교회)을 가졌다는 이유로 퇴직 당함.
-1955년 3월 24일, 이화여자대학교 교수5명(양윤영, 한충환, 최원복, 김영운, 이정호)이 이단신앙을 이유로 퇴직 당함.
-1955년 5월 11일, 이화여자대학교 학생 14명이 이단 신앙을 이유로 퇴학당함(신미식, 사길자, 김정은, 서명진, 김경식, 박승규, 지생련, 정대화, 박영숙, 임승희, 이계순, 강정원, 최순화, 김숙자)
-1955년 7월 4일, 문선명 선생 서대문형무소에 입감. 간부 4명(김원필, 유효민, 유효영, 유효원)도 구속.
-1955년 7월 7일, 황환채, 유경규연희대학교학생 2명이 이단 신앙을 이유로 퇴학당함.
-1955년 10월 4일, 문선명 선생 서울지방법원의 공판에서 무죄언도를 받고 석방.
댄버리 교도소 수난(1984.7.20~8.20):1970년대 초 하나님의 섭리를 위한 미국의 역할을 위해 미국선교를 시작하였습니다. 선생의 영향력이 커지자, 미국의 일부 정치가들은 경계하기 시작했습니다. 1981년 이들 정치가들이 주축이 되어 미국정부는 선생을 탈세혐의로 기소하였습니다. 미국은 2년 9개월 동안 재판을 끌면서 선생이 재판을 피해 미국에 더 이상 입국하지 않고 한국에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선생은 결백하였기에 당당하게 재판을 받았습니다. 결국 무고한 선생이 유죄판결을 받고 미국 댄버리 교도소에 입감되자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모인 종교지도자 3천 5백 여 명이 종파를 넘어 하나 된 마음으로 백악관 앞에서 대대적인 항의시위를 벌였으며, 미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선생과 함께 고난에 동참하는 동고회(同苦會)를 결성하기도 했습니다.선생은 댄버리 교도소에 수감되어 계시는 동안 한 치의 후퇴도 없이 세계평화를 위한 활동들을 더욱 활발하게 전개하였습니다. 침례교 계통의 쇼우 신학대학에서는 이러한 선생의 노력에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수여하기도 하였습니다.
-1981년 10월 15일, 미국 뉴욕 검찰청은 문선명 선생을 미국 선교를 위해 세계 각국에서 보내 온 선교기금의 이자소득세약1천 달러(한화 약 90만원)를 탈세한 혐의로 기소.
-1982년 10월 22일, 문선명 목사, 뉴욕연방법원 맨해튼 지방법원에 자진 출두하여 기소의 부당성(종교단체의 일반적 관례)과 종교적 편견, 인종차별에 의한 기소임을 해명.
-1982년 7월 16일, 뉴욕 맨해튼 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6월, 벌금 2만5천 달러 선고.
-1982년 11월 3일, 미국 연방고등법원에 항소했으나 기각.
-1984년 1월 26일, 미국 연방대법원에 항소했으나 기각.
-1984년 5월, 미국 각 교단의 목사 5천 여 명이 미국 사법부의 부당한 판결에 항의, 문선명 선생의 고난에 동참하고 자동고회(同苦會) 결성.
-1984년 6월 26일, 미국 상원 법사위 헌법소위 청문회 증언을 통해 미국 정부의 종교자유에 대한 부당한 박해와 간섭을 비판.
-1984년 7월 20일, 코네티컷주 댄버리 연방교도소에 수감됨.
-1984년 7월 25일, 워싱턴에서 종교자유를 위한 집회 열림.
-1985년 6월 25일, 종교지도자들이 참석한 종교자유수호대회가 백악관 광장에서 열림.
-1985년 8월 20일,13개월 만에 완전 출감. 종교자유연맹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미국 종교지도자 1600명이 서명한 성명서를 레이건 대통령에게 전달.
10. 평화정착시대(The Time for Establishing Peace)
10.1.심정동화(Experiencing True Parents’ Heart)
참사랑의 본질은 위함을 받겠다는 사랑이 아니고 남을 위해, 전체를 위해, 먼저 베풀고 위해주는 사랑입니다. 기쁨으로 주는 사랑입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품에 안고 젖을 먹이는 기쁨과 사랑의 심정입니다. 참사랑으로 맺어지면 영원히 같이 있어도 좋기만 하고, 우주는 물론 하나님까지도 끌면 따라오는 사랑입니다.
조부모, 부모, 손자손녀를 중심삼고 삼대가 한 가정에서 영존하신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천국 가정을 찾아 세우는 것이 종족 메시아들의 책임이요, 평화대사들의 사명이며, 하나님의 소원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디 출타했다가 그리워서 다시 찾아올 수 있는 그런 가정을 찾아 세우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삶입니다.
생명보다 귀하고 사랑보다도 소중한 것이 혈통입니다. 생명과 사랑이 합해서 창조해내는 것이 혈통입니다. 부자지간의 관계야말로 모든 관계 중 최고 최상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혈통을 전수해주어 영존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부모와 자식 간의 모델 혈통관계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억조창생의 평화의 왕 하나님을 참부모로 모시고 사는 참된 왕자 왕녀가 되십시오. 구세주, 메시아, 재림주가 필요 없는 영원한 해방과 석방의 세계에서 천주평화의 챔피언이 되신 문선명 선생님을 모시고, 참된 효자, 충신, 성인, 성자의 가정의 도리를 다하여 태평성대의 평화이상세계왕국을 창건합시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주
감사합니다 아주 ♥
감사합니다 아주
감사합니다
참부모님의 생애는
구사일생
만고풍상
파란만장
그야말로
산전
수전
공중전
땅굴전
게릴라전
화생방전
같은 삶이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