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움에 붙잡히지 말라
요한복음 12장 35-36절
요한복음 11장은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를 살리신 기사로 구성되어 12장은 나사로의 누이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조촐한 잔치를 열었던 기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죽어 장사한지 나흘이 됐기 때문입니다. 썩어 냄새가 난다고 했습니다. 그 나라는 더운 곳이어서 그 날로 장례식을 거행합니다. 지금처럼 냉동실이나 영안실도 없었던 때라 그 날로 장례를 치르지 않으면 서체가 썩어 냄새가 납니다.
스페인의 경우도 당일로 장례식을 거행해버립니다. 스페인 사람들의 경우 세 가지가 빠르다고 합니다. 말이 빠르고, 장례가 빠르고, 사랑이나 결혼이 빠릅니다.
죽은 지 나흘이면 이미 시체가 썩기 시작하기 때문에 다시 살아날 희망이나 가능성은 전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것입니다.
요한복은 11장 25-26절에서 주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갈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나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자를 살리시고, 넘어진 자를 일으키시고, 실패자를 성공케 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불가능을 가능케 하십니다. 그리고 저주를 복으로 바꾸십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을 네가 믿느냐” 라는 말씀에 “아멘”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은 14장 11절을 보면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어라”고 했습니다. 축복도, 은혜도, 기적도, 믿음의 그릇으로 받기 때문에 믿음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12장 속에서 두 가지 상반된 분위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는 나사로를 살려주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과 능력을 감사해 주선한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의 잔치입니다. 얼마나 감사했습니까? 이로운 삼남매였습니다. 생활도 넉넉지 못했습니다. 사회적 지위도 없었습니다. 그런 나사로를 다시 살려주신 예수님을 모시고 마련한 조촐한 잔치였습니다.
마리아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씻었습니다. 마르다는 식사준비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나사로는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앉아 있었을 것입니다. 한 폭의 수채와 같은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둘째는 12장 9절을 보면 예수님을 보기 위해 동네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문제는 12장 10절입니다.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가지 죽이려고 모의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를 11절이 설명합니다.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고 했습니다.
예수가 싫은 그들은 나사로도 싫었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싫었습니다. 그래서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은 어린아이에게 물어도 나쁜 일이었다고 말할 아이는 없습니다. 좋은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좋은 일을 중심으로 일어난 반응은 두 가지입니다. 놀라고 감격하고 감사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시기하고 질투하고 음모를 꾸미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좋은 사람입니까? 좋은 일을 좋게 보고, 좋게 생각하고, 좋게 해석하고, 좋게 말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더 좋은 사람입니까? 좋지 않은 일이지만 좋게 해석하고, 좋게 보고, 좋게 말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항상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오늘의 본문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35절을 보면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고 했습니다.
구름 낀 날에 두 사람이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한사람은 “날씨가 왜 이 모양이야. 비가 올 테면 오든지 아니면 해가 뜨든지 해야지, 비도 아니고 해도 아니고 사람 기분을 잡치게 만드는구먼,”이라며 불평을 토해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오늘 날씨 그만이네.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고, 얼굴 타지 않아 좋고, 땀 안 나서 이런 날 잡기 힘들다고.”라며 좋아합니다.
이런 경우 날씨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날씨를 보는 눈, 해석하는 마음, 받아들이는 자세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상, 어떤 신학, 어떤 정신, 어떤 신앙에 붙잡혔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의 몸 안에는 시시각각 수백만 개의 새로운 세포가 증식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세포들은 건강한 생각의 지배를 받을 수가 있고, 병적인 생각의 지배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건강한 사고, 신앙의 지배를 받으면 세포는 건강한 세포가 되어 인체의 기능을 활성화시키고 병을 몰아냅니다. 그러나 병적인 신앙이나 사고나 정신의 지배를 받게 되면 세포가 병들기 때문에 모든 병이 유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의 영향을 받느냐, 어느 쪽에 서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적극적 사고방식>이라는 책을 쓴 브리스톨은 책 속에서 “각각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창조하는 힘 즉, 치유하는 힘이 있다. 그것을 끌어내야 한다, 바른 마음가짐이 육체의 회복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고 했습니다.
제임스 앨런은 <생각하는 모습 그대로>라는 책 속에서 “좋은 생각과 행동은 결코 나쁜 결과를 낳을 수 없다. 나쁜 생각과 나쁜 행동은 결코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없다. 그 사람의 생각이 결과를 결정한다.”고 했습니다.
부정적인 생각과 부정적 신앙에 붙잡히면 말과 행동이 부정적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35절에서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수면평가 자문연구소의 크리스이드지코스키 소장은 1천명을 대상을 수면자세와 성격의 관계를 조사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사람들이 잠자는 형이 6가지라는 것입니다.
① 태아형 : 옆으로 누워 하리를 구부리고 무릎을 당기고 자는 형으로 감수성이 예민하고,
② 통나무형 : 두 팔을 내린 채 옆으로 누워 자는 형으로 매사에 느긋하고 사교적이며 남을 쉽게 믿고 쉽게 속아 넘어가고,
③ 갈망형 : 옆으로 누워 팔을 앞으로 향하고 자는 형으로 의심이 많고 냉소적이며 어떤 결정을 내리기 까지는 시간이 걸리지만 일단 결정을 내리면 절대 마음을 바꾸지 않고,
④ 군인형 : 차렷 자세로 하늘을 보고 누운 채 자는 형으로 조용하고 인내심이 많으며 안달하지 않는 성격,
⑤ 자유낙하형 : 엎드린 채 고개를 옆으로 향하고 두 팔을 베게로 감싸는 형으로 사교저적이며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과민한 성격,
⑥ 불가사리형 : 똑바로 누워 두 팔을 머리 위로 향하는 모습, 남의 말을 잘 듣고 잘 돕는 형으로 남의 이목을 끌려하지 않은 형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로 코를 고는 형은 군인형과 불가사리형이라고 합니다.
잠자는 모습이 여러 가지인 것처럼, 그리고 그 모습을 따라 성격이 다른 것처럼 신앙생활고 어떤 형을 다르고 닮느냐에 따라 행, 불행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는 뜻은 어둠을 조장하고 조종하는 사단마귀에게 붙잡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은 1장 4절에 “그 안에 생명이 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고, 8장 12절에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2장 36절에 “빛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어둠은 마귀의 대명사요 도구입니다. 마귀의 역사가 있는 곳엔 언제나 어둠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계신 곳엔 빛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빛 되신 주님을 따르면 어둠이 물러가고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빛은 사람 마음을 밝게 해줍니다. 그러나 어둠은 사람을 우울하게 만듭니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면 집안 분위기나 인테리어를 밝게 바꿔야 합니다. 커튼 색깔도 우중충한 것보다는 밝고 화사한 것이 좋습니다. 음악도 밝고 경쾌한 것으로 바꾸고, 드라마도 복잡한 삼각관계 슬픈 것은 피해야 합니다. 조명도 밝게 바꿔야 합니다. 음침한 분위기나 어두운 조명은 사람의 마음을 음산하게 만듭니다.
모기가 좋아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것은 검은 색깔과 습도입니다. 햇빛이 비치는 낮엔 활동하지 않습니다. 흰옷 입은 사람과 검은색 옷을 입은 사람이 같은 장소에 있으면 검정색 입은 사람에게 덤빕니다. 그리고 습지에서 번식하고 기식합니다. 습지를 없애고 고인 물을 없애면 모기는 번식하지 못합니다.
마귀는 어둡게 합니다. 심령을 어둡게 하고, 환경을 어둡게 하고, 세상을 어둡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곳을 활동무대로 삼고 활동합니다. 그러나 내가 빛을 따르고 빛을 믿으면 어둠의 세력은 물러갑니다. 왜냐하면 빛의 세력이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지하실에 한 줄기의 햇빛이 들어오면 지하실 안에 환하게 밝아집니다. 그러나 그 빛보다 생명의 빛 예수의 빛은 온 세상을 다 밝히고도 남습니다. 초 한 자루가 어둔 방안을 밝히듯 빛이신 예수님은 온 세상을 다 밝혀 주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그 빛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꺼지지 않습니다. 원자력 발전도 고장이 납니다. 제철소의 용광로 불도 꺼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빛은 영원히 꺼지지 않습니다. 그 힘이 고갈되지 않고 약화되지도 않습니다.
둘째, 온 인류를 밝힙니다. 지구를 밝히는 태양도 지구의 자전을 따라 뜨는 곳이 있고 지는 곳이 있습니다. 해가 지면 어둠이 찾아옵니다. 밤이면 어둠을 밝히기 위해 지구상에는 수억만 개의 전기 불을 켭니다. 그러나 예수님 한 분으로 세상을 밝히고도 그 힘이 남습니다. 너무나 큰 초월적 빛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영혼을 살리는 영원한 빛이십니다. 태양도 점점 흑점이 많아지고 그 열이 식어간다고 합니다. 전구도 오래 쓰면 빛이 약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히 빛나며 인간의 영혼을 살립니다.
렌트겐이 1895년 음극선 실험 중 불투명 물체를 통과하는 빛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X레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X레이와 비교가 안 됩니다. 말라기 4장 2절에는 예수님을 “의로운 해”, “치료하는 광선”이라고 했습니다.
그 빛이 오늘까지, 그리고 영원히 나와 함께 하시면서 나를 비추시고, 지키시고, 이끄시고, 고치시는 것입니다.
어둠을 떠납시다. 버립시다. 붙잡히지 맙시다.
빛을 따르고 믿읍시다. 어둠을 따르지 맙시다.
빛 앞에서 변화되고 고침 받읍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