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학 회갑기념회가 그립구나
매월 세번째 토요일은 성대약대12회 동기생들의 월례회를 갖는 날이다.
2월18일(토) 오후 5시12분에 교대역 5번 출구 근처의 맛집에서 이다.
몇달전부터는 당구를 좋아 하고 있는 당구애호가 모임도 갖는다
정기 모임 이전 오후 2시 33분에 가까운 당구장에서 모임이다.
오늘은 여덟명이 함께 했다고 한다.
총무녀석은 오늘이 오마니의 기일(忌日)이라
경기도에 안장한 가족봉안묘원에 다녀오느라 늦는다.
에상외로 퇴근시간이 가까와서인지 차도에는 차들로 혼잡하기만 하다.
마음 은 조급하여 택시를 탔다가 내린다. 전철이 더 빠르고 편하리다.
그래도 1시간을 넘기고야 집회장소로 들어선다.
식당은 시골보쌈을 주로 다르고 있는 곳이다.
미안한 마음으로 모듬초밥과 연어회를 식탁에 올린다.
그전부터 식당주인에게 사전에 양해를 받은 상황이다.
동기들이 돼지고기만을 먹기가 지겹기도 하다고 ,
그래서 가끔 회종류와 초밥을 잠실 새마을시장에서 구입하기도 한다.
동기회장이 최근에 약대총동문회 참석으로 상황을 설명도 듣는다.
열심히 동문회를 이끌고 있는 한참 후배가 기특하기도 했으리라.
총동문회 회장은 강동구에서 약국을 경영하는 여약사 같은데
이름만은 어렴풋이 기억이 된다. 이 노객이 1990년도초에 강동구약사회장을
비롯하여 총회의장, 감사등을 역임할 때이다.
아마도 강동구 동문회에도 참석한 후배로 기억되고 있다.
총동문회 지금의 집행부는 20여년 후배들이 주도권을 행사하는 현실이다.
이 노객도 30여년전의 총동문회 사무총장으로서의 추억도 새롭기도 하다.
총동문회 자문위원들과 집행부 임원들이 재학생 1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한다.
1학기마다 물론 학교장의 추천에 의하여 가정형편이 어렵고 성실한 학생을 추천하는 게다.
그 당시의 등록금이 1학기에 300여만원으로 생각이 든다.
임원과 10회 이전의 자문위원들에게서 1인당 40만원을 갹출하는 것이다.
3~4년을 지속된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은 아마도 성균관대학교 약학대학이
전국의 수많은 약학대학중에서도 최고의 등급에 오른 상태가 아닌가.
전교생이 장학금을 받고 있는 현실이리다.
우리들의 재학생 당시의 모습이 노오란 은행닢으로 회귀하고 있다.
지금은 동기들의 연세가 몇살이던가. 1964년도에 입학한 세월이 2024년이 오면 입학 회갑년이다.
졸업 회갑년은 2028년도기 될것이다.
그 때까지 지금의 동기들이 별 건강의 이상이 없이 지속되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리하여 입학 회갑년이라는 기념행사를 먼저 시행하기로 합의를 한것이다.
80의 나이도 나이인지라 벌써 몇명의 동기들이 저 멀고도 머언 곳으로 떠난 현실이다.
" 잘 있어라, 동기들아 , " 인사도 한마디 못하고 홀연히 하늘나라로 솟아 오른 것이리다.
지금 이자리에서 동기들은 신나게 웃고 떠들며 이야기꽃은 끝이 없다.
서로의 술잔을 가득히 채워주고 있는 동기들이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들도 먼저 가버린 동기들의 뒤를 좇을 것이다.
그런 날이 언제이려는지 짐작도 생각키도 싫은 모양이다.
내일일런지 한달후가 되려는지 28년 후가 되려는지 한치 앞도 내다볼 수도 없는 미약한 인간들이 아닌가.
그곳에 오르면 먼저 안주하고 있는 선배인 동기들과 성대약대12회 동기회를 재창설함도 좋을 것이리다.
입학 회갑년 기념회도 졸업 회갑기념일도 생각만으로도 그립기도 하구나.
성균관대학교 약학대학 4년의 시절이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인가.
철없이 웃고 떠들고 청소년소녀 시절에 창경원 담치기도 서슴이 없다.
약학이 무엇인지 실습이 어떤 것인지 너와 나 우리들에게는 관심도 없지 않았을까.
하늘에 날고 있는 새도 잡을 수 있다던 그 패기 그때의 용기는 어드메로 갔는가.
까마득한 세월이 바로 엊그제 같은 추억일 뿐이리라.
60세가 되면 회갑잔치를 거창하게 베풀던 시절도 있었다.
우리 노객들의 부모님 시절에는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가족의 행사이기도 하다.
현실은 어떤가. 60세 70세 80세 90세가 되어도 특별히 베프는 경사는 아니다.
가족들 끼리 간단히 식사로 갈음하고 있는 요즘 세대이다.
늙고 병들고 우리 나이가 되고 보니 예전에 고려장(高麗葬)이라는 단어가 생각되기도 한다.
고려장이라는 단어가 있을 그 당시의 내 부모님이라면 자식인 이 노객은 어떠한 자세로 마지막 순간을 보냈을까.
예전에 사람이 나이가 들고 병들어 쓰러지면 그를 산중에 가져다 버리는 풍습이 있지 않았는가.
한 아들이 자신의 아버지가 회갑의 나이가 되었을 때이다. 그의 아들인 자식도 아들 딸 댓명이나 있는 아버지이다.
그런데도 늙은 아버지를 버리기 위하여 아버지를 지게에 지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간다.
가다 쉬다를 수없이 반복하며 주저앉기를 몇몇번이던가.
아무도 찾지 않고 찾을 수도 없는 험준한 산속의 암굴로 들어선다.
별도 달도 해도 보이지 않는 동굴속이다. 엎드려서 아버지에게 무언(無言)의 큰절을 드린다.
약간의 음식과 늙은 아버지를 지고 왔던 지게를 놓아둔 채 되돌아 선다.
요즘 나이로 생각하면 청장년층에 속하는 연세일 터이다.
그 순간이다. 항상 어리광만 부리고 철없는 자식으로 생각하고 있던 그의 아들이자 아버지의 손주녀석이다.
그를 따라왔던 그의 어린 아들이 그 지게를 다시 지고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 야, 이 녀석아 ~ 왜 지게를 다시 지고 오는 거냐 ~~~ 어 ~ 빨리 도로 그 자리에 갖다가 놓아라 " 아들에게 던지는 말씀이다.
“ 응 ~~~ 그런데 아빠 ~~~ 저도 아버지가 늙으면 이 지게에 지고 와서 버려야 하기 때문에 가져왔습니다.”
라는 어린 아들의 대답이다.
더 이상 무슨 할 말도 없다. 어린 아들 앞에 주저앉아 펑펑 울어댄다.
" 미안 하구나, 아들아 ~~~ " 크게 뉘우치고 정신이 버쩍 들고있는 모습이다.
아버지를 다시 집으로 모시고 와서 잘 봉양할 밖에 방법이 없지 않는가.
어린 자식에게 못 할 짓을 저지른 애비의 한숨소리가 지게다리를 휘어감고 있다.
그로부터 고려장(高麗葬)이라는 악습은 없어졌다고 한다.
이것은 사실이 아닌 하나의 설화(說話)일뿐이다. 이 노객이 그 당시에 그런 입장이라면 어떠한 행동을 보였을까.
대답은 여러 동기들의 각자 생각들과 대동소이 하리라고 생각되고 있다.
내 어버이를 시야가 탁 트이고 전망이 시원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안장한 곳이다.
" 시원한 곳에 가고 싶구나, 이북에 계신 내 오마니를 가슴에 품고 ~~~ 서 ~ 흐 흐 흑 ~ 흑 ~ 흑 "
이북 고향인 북쪽으로 무릎을 끓으시고 살아 생존에 항상 하시던 내 아버지의 말씀이다.
아버지의 오마니이자 내 할머니를 홀로 남겨 놓으시고 자식들 넷만을 데리고 피난을 나오신 아버지이다.
내 할머니는 창고에 쌓아놓은 곡식을 지키기 위함이라고 한다.
오늘이 내 오마니의 기일(忌日)이시다.
40여년 동안이나 아버지는 망우리에 오마니는 용인묘원에 생이별도 아닌 사이별(死離別) 하신 부모닙이다.
차례상은 생략하고 아내랑 단둘이 어버이가 안장된 경기도 광주시 근처의 가족봉안묘원을 찾은 것이다.
12구(軀)의 납골묘를 아들인 내 부모님의 손자가 작년에 거금을 들여 마련한 가족의 안식처가 아닌가.
평소에 즐겨 드시던 막걸리 한잔을 무릎을 끓고 올린다.
" 오마니 아버지 죄송합네다, 그토록 오랫동안 별거 아닌 사이별(死離別)을 시켜드림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
두분이 오손도손 두손을 잡으시고 편안히 즐기세요, 그리고 어버이의 손자 증손자 자녀들
모두 건강하고 훌륭한 나라의 기둥이 되도록 하늘에서 나마 격려를 부탁드립니다. "
어느 날 이 노객도 낙엽이 지고 황혼에 해가 지듯이 어버이가 편히 잠들고 계신 곳으로 날아가는 그런 날이 오리다.
어버이를 모신 봉안 묘원을 내려오면서 다시 뒤를 돌아다 본다.
두분의 다정다감한 속삭임 소리가 귓전을 때리며 하늘로 치솟고 있는 이 순간이다..
내려딛고 있는 아들 며느리의 발걸음이 이다지도 가벼울 줄이야 그 누가 알기나 하리까.
이 세상을 모두 다 드린다고 해도 어버이에 대한 사랑을 무엇으로 보답을 할 수가 있을까.
항상 부모님께 아무 것도 해드리지 못한 멍청한 맏아들일 뿐이다.
2023년 2월 18일 무 무 최 정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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