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집 사람들
이 성 상
정옥 언니 남편이 돌아 가셨다. 평생 막노동과 어설픈 목수로 살다 10년째나 중풍으로 누워 지내다 간 분이다.
형제들이 병원 영안실로 모여들었다. 모두가 팔남매. 첫째인 정희 언니가 일착으로 영안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애석함도 미움도 없는 담담한 언니의 표정에 정옥 언니는 더 슬퍼 보인다. 비록 힘없이 고생만 하고 살다 마지막도 뼈만 앙상하게 보이다 간 그 남편의 마지막을 형제들은 무관심하게 보는 거 같다. 그게 더 친형제도 아닌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다음으로는 가까이 사는 정일 오빠다. 들어오자마자 고인 앞에 엎드려 기도 한 후 국화 한 송이를 영정 앞에 놓고 나온다. 언제나 체구가 작고 바짝 말라 갸날픈 모습이다. 하객이 대부분 고인의 집안사람이나 형제들이다. 왠지 그 옛날 당집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연일 제쳐놓고 나도 이곳에 바삐 왔었다.
다음으로 영안실을 찾은 이는 정만이 오빠다. 8형제들중 남자 중에는 둘째로 이 가정에 믿음의 선구자로 지금은 전라북도 무안에서 작은 농촌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분이다. 뒤이어 정성이 정억이가 대를 이어 목사가 된 사람들이다. 이 모두 어려을 때부터 가난한 집에 아이가 8이나 되니 제 각기 끼니도 잘 나누지 못할 때 교회에서 주선해 데려다 심부름 시키고 공부시키고 신학대학을 졸업케 해서 목사가 된 형제들이3명이 된다.
“ 아이고, 오빠! 오랜만이시네요. 얼굴은 그대로 이시고 잘 지내시죠?”
“그래, 어떻게... 잘 지내지?” 내가 맨날 신세만 져서 .... 고마워.....
무슨 소리에요, 잘 지내시면 됐지. 정만이 오빠와 내가 나눈 대화다.
아직도 무안에서 목회 여전 하시죠? 그래 그렇지, 뭐...
얘기를 나누는 중에 정금이와 시향이가 들어온다.
“아이고 누이 잘 지내죠?” 정금이의 인사말에 나는
“그래 너는 어때? 지금 어디서 살아? 벽제? 아, 그렇구만” .
“시향인 어떻게 지내고? 지난번 가게는 잘 안 됐다며?”
“네, .... ”
“어떻게 그렇게 됐어? 손해 많이 봤지?”
“네..... ”
힘없이 대답하는 그애의 표정이 더 애처러워 보인다. 혼자 살면서 어떻게든 근면하며 자립해 보려구 해도 뭐가 부족한 건지 하는 것 마다 잘 안 풀리는 듯하다.
이제 그녀 나이도 40이 되어 가는데 엄마인 정희언니와 단 둘 모녀지간에 지금은 가까운 갈현동에 살고 있다고 했다. 이 사람은 고등학교 나와 직장에서 알게 된 부산 남자와 결혼을 했는데 사내아이를 낳은 지 10개월 만에 불행이도 그만 남자가 세상을 떠났고 그러면서 아이를 시댁에 빼앗겼단다. 평소 지병이 있었던 남자였다고 했고 시댁에선 남자의 혈육이라며 아이를 놓고 가게 했다는 것이다. 젊은 며느리라 재가를 하라는 뜻일 거라는 생각도 가졌었단다. 그러나 친정으로 돌아온 뒤 재가는 않은 채 혼자인 세월이 어언 20년이 돼가는 것 같다. 자신이 낳은 그 아이를 친 엄마라고 밝힐 수도 없이 시댁에선 철저하게 금을 긋고 살게 한지 그 세월이었다.
그러다 다행이도 얼마 전 이제 그 아이가 군대를 간다면서 한 번 찾아 왔더란다. 깜짝 놀라 반가움 반 기쁨 반 눈물로 맞아 안아보곤 보내야 했던 친어미의 심정을 이제는 그 아이가 알 것인지 그렇게 잠시 보곤 또 이별을 했단다. 아직도 시댁에선 자기네 손이라고 우기기만 한다니 기가 막히다. 재혼도 안 하고 저렇게 혼자 사는 이유를 본인 만 알 것인지 내가 강권해서 몇 년 전에 한 남자를 소개한 적이 있었지만 나가 보긴 했어도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금도 그 당집이 예전 한옥 모습 그대로 금성당이란 간판을 달고 은평구 뉴타운 5단지 안에 기념물로 숨어있듯 서있다. 보존가치가 있어서 일 것이고 육간대청 미음자 한옥 기와 건물이 그대로 약간의 수리를 한 채 서 있는 것을 본다. 예전 일들이 그리울 때 그 집을 찾아보고 배회하며 생각에 잠길 때가 있다. 그 집은 사람들이 모여 성대한 굿을 치르는 곳이었고 온 동네 사람들이 드나들었고 가까이 사는 사람들은 거의가 다 굿 잔치의 시중을 들며 살았다.
당집이란 신을 모셔놓고 무당이 굿을 하게 장소를 빌려주는 곳이다. 무당의 역할은 신에게 재물을 바치고 무가(舞歌)와 도무(蹈舞)로 길융화복 등의 인간의 운명을 조절해 알리고 비는 일이다. 세 박자에서 다섯 박자인 덩덩 덩 덕궁으로 이 음률이 반복되면서 굿거리는 이어지는데 무격은 장구와 방울을 든 무악을 울리면서 환자에게 주술적 행위를 가하기도 한다. 이때 무당은 무아의 경지에 몰입하여 탈혼의 과정을 거쳐서 신과 접하게 되고 신탁을 받게도 되는 것이다. 이렇게 무당은 인간의 소망을 신에게 고하고 또 신의 의사를 탐지하여 인간에게 계시해 주는 영매자로서의 구실을 하는 일이다.
왕이나 궁중의 사람이 병을 얻으면 무조건 이 무당을 불러 치유케 하였고 일반 민중들 역시 질병이 발생하면 무당을 찾아야 낳을 수 있다는 생각에 젖어있던 시절에 이 굿은 번성했던 것이다. 또한 무당의 유형에는 강신무와 세습무가 있다고 한다. 강신무당은 강신체험 즉‘신 들렸다.’는 신병을 통해서 된 무당으로 내림굿과 수련과정을 거쳐서 무당이 된다. 세습무당은 가계를 통한 무업의 전승으로 무당이 된다고 했다. 무당의 역할은 무속의 제의인 굿을 주관하는 사제이다. 남자 무당을 박수라고 하기도 하는 것 같다.또 기자 만신 등 여러 이름들이 있는 것 같다.
우리무속은 한국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던 기층 문화가운데 하나라고 본다. 산업화와 근대화에 따라 무속이나 무당의 역할이 점점 축소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대 부분의 사람들은 무당을 그저 호기심의 대상으로 여기거나 동정어린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심지어 무당은 미신으로 세상을 어지럽힌다하여 악의 축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그러나 근대사회로 접어드는 길목 앞에서 미신은 반드시 척결해야할 사회적 문제이기 전에 무당과 굿은 미신으로 치부되어도 동시에 보존해야할 전통 문화 유산이기도 한 것 아닐까.
당집에 굿을 하는 날은 온 동네가 잔치하는 날이기도 했다. 누구라도 조금씩은 당집을 알고 가며오며 기웃거리기도 하고 밥 한끼 막걸리 한 잔 할 수도 있는 데가 그곳이었다. 수시로 동네사람들은 무당집을 찾았다. 굿판을 벌릴 때는 물론이려니와 식을 준비하기 전에도 많은 일꾼들과 손이 필요했다. 사람을 접대하고 음식을 만들고 제기를 닦고 나르고 제단을 준비하는 일 각종 무속 기구들 챙기는 일 또 식이 끝나면 음식을 나누고 정리하고 말끔히 그릇을 닦아 다음 제식때 다시 쓸 수 있게 제자리 보관하는 일 같은 게 많기도 했었다. 머슴이 서너명 식모가 여러 명이었고 그리고 시중드는 아이들 까지 모두 인근 각처 동네 사람들이 그 일을 다 했다. 그러면 이 당집의 총 지배인 격인 외숙모는 그들에게 금전적인 보수보다는 치르고 남은 음식을 나눠주고 밥 먹이는 일로 그들을 다 시키고 움직이게 했다. 먹다 남는 음식도 버리는 법이 없이 한데 섞어 큰 주걱으로 쓱쓱 비벼 일한 사람, 심부름 애들을 먹게 했고 일하지 않은 사람은 남는 음식도 절대 나눠주는 법이 없었다.
굿이 진행되면 늘 피리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장구도 뒤따랐지만 피리부는 사람의 외모가 아주 출중한 어떻게 보면 외국사람 같기도 해서 동네사람 칭송이 자자한 과천이 집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 분의 멋진 모습이 50여년이 흘렀는데도 기억이 또렸하고 눈에 선하다. 여자는 무당으로 둘이 전국을 다니면서 굿걸이 장단에 혼을 팔았을 것 같은 사람들인데 신분이 달라 보였고 그 당시 자가용 찦차도 가지고 다녀서인지 졸졸 따라다니기도 했던 인기 아저씨였다.
이렇게 해서 외숙모네는 많은 수입으로 주변 땅을 사 모아 지독히 관리를 해서 부를 이뤘지만 자신의 자식 둘 외에 누구하나 돌보며 살질 않았다. 우리 이모네가 옆에 살았고 우리어머니가 당집 주인 의 친딸인데도 절대 가까이 하질 않고 출가외인으로 취급하며 등 돌리고 살았던 것 같다. 그 당집을 중심으로 옆집에 우리 형제 6식구와 부모가 살았고 조금 떨어진 길옆에 이모네 6식구 그리고 뒷밭 옆에 순희 언니네 10식구 등이 모여 집성촌처럼 자리하고 살았었다. 집집마다 농토도 없어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니고 허드렛일 남의집 소작농으로 일하며 끼니를 이어 갔던 것 같다. 당집 외 엔 누구의 집도 여유가 없어 보였고 밀가루 풀떼기 죽 같은 게 아니면 그냥들 굶었다고 한다. 특히 정희 언니네 8형제는 줄줄이 아이를 낳아 정말 힘들게 살았던 것 같다.
그녀 어머니는 바느질 솜씨가 고은 분으로 언제나 애들 옷을 기워 입히느라 늘 뭘 깁고 있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끼니가 없어도 항상 웃는 낯이고 아이들은 못 먹어 서인지 크질 못해 작은 체격들이고 병약해 보였었다. 우리 집도 생활이 별반 다르질 않았다. 아버지가 양복 기술자로 일을 다니셨고 덕분에 우리 식구는 옷 만들고 남는 천으로 만들어진 옷을 그래도 깨끗하게 입고 다녔던 것 같다. 우리 형제들도 예외없이 당집의 노동력일 뿐이었다. 그 넓은 마루를 결대로 잘 닦지 않으면 큰 소리가 나오고 깨끗이 닦아야 밥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그때도 자기 아이들은 절대로 우리랑 같이 안 주고 안방에 새로 차린 밥을 먹였었다.
다른 동네 사람처럼 철저히 구분없이 우리에게도 대한, 그때의 외숙모를 생각하면 그래선 안 되겠지만 지금도 소름이 끼친다.
원래 당집의 원조는 우리 외할머니의 어머니가 창립을 하셨다고 한다. 얼굴이 얽은 분으로 당차고 걸걸하셨고 뭔가 남다른 데가 그 시절 있으셨던 분이었다고 들었다
. 일찌기 남편을 여의고 언제 부터인지 신이 내렸다며 무당으로 지내면서 지역에서 꽤나 알려진 분으로 돌아가시면서 따님 되시는 외할머니에게 전수가 되고 그렇게 당집이 운영되었던 것 같다. 우리 외할머니도 언제부터 그 일을 하셨는지는 내가 어려서 잘 모른다.
외숙모의 남편은 한국 동란때 이북으로 끌려가 소식이 끊어져서 혼자 아들 둘을 데리고 살아야 했고 나중에서야 죽었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외숙모가 도맡아 당집 운영을 했겠고 강하고 냉철하게 살림을 도맡아 하면서 동네 사람들의 도움과 부역을 빌어 지금의 당집을 남겼으리라 생각이 된다.
나는 당집의 주인인 외할머니의 외손녀로 당집의 내력이라던가 주변 인물들을 수십 년 접하고 살아서 다 가족 같다. 집집마다 사정을 대충은 알며 보고 지냈지만 나도 결혼해서 내 집안 지키느라 모든 사람들과 최근에는 잘 접촉이 없었다. 이런 초상 날이나 돼야 겨우 그전 사람들을 만나 볼 수 있고 사는 소식을 들을 수 있다.
정금이는 그 집 여덟 형제 중 막내다. 나이가 57세인데 아직도 노총각으로 혼자 지내는 것 같다. 어려서부터 모두가 다 그랬지만 잘 먹지를 못해서 일 것으로 몸이 약해 힘든 일을 하지 못하고 지낸다고 들었다. 쉬운 일만 찾아다니다 보니 운전사 일이고 그것도 택시 운전 같은 것은 못하고 자가용이나 잠시 주인 모시고 다니는 일 같은 걸 그동안 했던 모양이다. 더군다나 화물차나 버스 같은 것도 해보긴 했는데 힘에 붙혀 오래 못한다고 하니 그의 경제적 사정도 안 좋을 것 같다.
친구네 벌 키우는데 따라다니며 산다는 말도 들었었다. 잠시 남편이 경영하는 작업장에 화물차를 운전해 보라고 했더니 와서 일을 하다 힘에 부친다면 두 달 만에 그만두었던 일도 있다. 결혼도 안하고 혼자인 것이 그리고 건강한 몸이 아닌 게 딱하다.
맏이인 정일이 오빠 얘기다 그동안 무슨 일을 하며 가족 거느리고 지냈는지 잘은 모른다. 결혼해서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아내는 고등학교졸업을 했다며 평생 국졸인 남편을 무시하며 지내긴 했지만 억척으로 한 가정을 그래도 잘 이끌어 온 사람이라고 들었다. 정일 오빠는 평소 몸이 약하고 어려서 병치레가 많아 힘든 일은 못하고 산 올해 73세로 남자형제 중 맏이다. 이 분 역시 성장기에 먹을 것이 부족해 못 얻어먹고 살아서 몸이 부실한게 맞는 말일 것이다. 없는 집에 애들만 8형제나 되니 무슨 힘으로 그 아이들을 잘 먹이고 키웠겠는가. 이 분 들의 어머니가 우리 외할머니네 수양딸로 와서 앞집 농사꾼에게 시집보냈으나 그분 역시 능력이 모자랐던지 밥을 늘 제때 못 먹고 동냥하듯 당집이나 어디서 얻어다 먹이고 그게 없으면 늘 굶고 살았다고 한다. 그래도 마음은 비단같이 고와 바느질을 잘 하시고 늘 양말이라도 깁고 게셨고 우리이모와 같이 당집의 식모살이로 평생을 보내신 분이고 했다..
다음으로 정성이 내외가 들어와 분향한다. 김포에서 목회를 하는 남자로 3번쩨 형제다. 현재로 봐서 그래도 형편이 조금 나은 듯 하고 1남1녀를 둔 다복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듯하다. 내가 인사를 하니
“아니 누구시더라? ...” 나를 잘 모른다.
“나야 윤숙이 누나. 당집 외손녀...”
“아... 아이고 죄송합니다. 내가 몰라 뵙고..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형님도 도와 주시고...”
“뭘,... 애들은?” “네.. 게내들도 곧 올 겁니다. 학생이라...”
“그래, 자주 봐... ”
“네 에..”
이제 정천이와 정억이만 남았다. 이름에 모두 숫자가 들어갔다. 얼마나 돈이 궁하고 없이 사는게 한이 됐으면 이름이라도 풍요롭게 살라고 그렇게 지었을까 하는 마음에 더 애잔한 마음으로 그네들을 보고 있다. 많이 보고 싶었다.
3형제나 목회를 하는 목사로 살게 이끌어 주신 분은 그 동네 작은 감리교회 유목사 내외분이셨다. 목사 사모님도 장로라는 직책으로 이 동네에 처음 교회를 개척했다고 했다. 여자도 장로 직분을 가질 수 있었던 시절 같다. 요즘 보는 목사들 같지 않게 옛날의 그 목사님은 정말 헌신적으로 성도를 몸과 말씀으로 끌어안고 같이 눈물과 기도로 구원을 보이신 분이셨다. 가난한 동네에 굶는 아이들을 데려다 밥을 먹이고 버려진 아이들을 교회로 이끌어 가르치고 학교를 갈 수 있게 친 자식처럼 이끌어 주셨다. 박정만의 형제들도 그분이 늘 손잡고 기도하고 도와줘 신학대학을 나오게 해 목사안수를 받고 살게 하신 분이다. 모두가 주님의 은혜요 참 제자로 직분을 다하신 그분들이다. 내외분들의 기도로 여러 영혼의 삶이 바뀌었다. 얼마 전까지 90이 넘으셨는데도 캐나다에 살아 계신다고 했는데 사모님이 노후를 이끌고 한 번 나오셔선 2년 전에 목사님이 돌아 가셨다고 얘기를 하더란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당집 외할머니나 외숙모는 사람들이 교회 나가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고 한다. 교회 가면 밥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며 그렇게 나다니려면 당집에 오지도 말라고 하셨단다.
그 다음엔 정작 와 봐야 할 사람, 당집 손자들이다. 그의 어머니와 친할머니가 수족처럼 부리던 일꾼 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동안 별로 왕래가 없고 접촉도 없이 산다는 소리를 듣는다. 윗집 아줌마 그러니까 나의 외숙모는 그의 지역에서 재벌로 동네 새마을 금고 이사장까지 하며 살고 있다고 했다. 과연 이 영안실에 찾아 올 지 안 올지 모르겠다. 그분도 이제 나이가 92세가 되셨을 것이다. 배드민튼으로 운동도 열심히 하고 정신력이 대단한 분이라 오래 사실 것 같았었다.
평소 그 외숙모는 일찍이 남편이 북으로 끌려간 후 혼자 몸으로 두 아들만을 데리고 끔찍이 위하며 다른 당집 드나드는 사람들과는 절대 차별을 두며 키우며 살았다. 그러나 그 당집의 수입이 보통 이상이어서 당대에 주변 땅을 많이 사놔 재산이 어마어마하게 축척이 된 걸 나중에야 들어서 알았다. 나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혼자서 다 관리하며 지냈단다. 그 부를 외가나 친가를 다 멀리하고 혼자 독차지한다고 욕께나 먹으면서도 아직까지 건재하며 잘 지내고 있는 듯 했다. 자신의 작은 아들에게 만은 늘 끝없이 퍼준다고 말들 하지만 누가 감히 따지고 대들지 못한다. 큰 아들은 사업도 하며 건실하고 여물게 산다고 듣는다. 우리 형제가 클 때도 예외 없이 그 집에서 일 하지 않으면 밥도 주지 않았다.
한창때는 일주일이 멀다고 굿을 했는데 굿 당의 기물들과 재물들은 볼 때마다 화려하고 지나치게 풍성했다. 일곱 색깔도 더 넘을 것 같은 깃발들, 굿당 곳곳에서 무섭게 내려다보고 있는 장군이나 위인 같은 사람들의 초상, 위태하게 쌓아놓은 떡과 과일과 음식들, 돼지머리가 맨 앞에 차려져 식을 치르는 인간들을 바라보며 귀엽게 미소 짓기도 했다.
큰 무당과 여러 명의 새끼 무당 징재비 들까지 동원 될 때도 있다. 굿 의뢰자들의 가족을 이리저리 함부로 명령하며 굿을 지휘하기도 한다. 그 가족들은 무당의 명령에 조금이라도 불만을 품으면 굿이 허사가 될까봐 겁내하며 고분고분했고 굽실굽실 그들의 말을 따랐다. 굿이 시작되고 본격적으로 액풀이와 액막이와 비나리 하는 과정이 이어지면서 굿상은 몇 번이나 바뀐다. 장소도 마당에서 심지어 숲에서 진행되기도 했고 굿 당 건물의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면서 아침 일찍부터 오후 늦게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당집이라 항상 굿을 준비하느라 음식이 넘쳐나고 흥청대도 자기 아들 둘은 따로 새로 상을 차려주고 우리를 비롯한 머슴처럼 일하는 사람들에겐 먹다 남은 음식을 한데 모아 쓱쓱 비벼서 배를 채우게 했던 사람이다. 그 많은 마루를 닦을 때도 나무 결 따라 걸레질 하는 걸 시범을 보이면서 철저하게 반들반들 닦아야 했다. 어린 손이 때가 끼고 얼어 터져서 피가 났지만 내려진 미션은 꼭 완수를 해야 밥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일꾼 중에 이번 돌아가신 정옥언니 남편이나 언니도 다 이집 밥을 얻어먹으며 지냈으나 항상 부족해서 늘 굶는 것 같다는 것이다. 때가 돼서 이 집 굴뚝에 연기가 없으면 그 날은 밀가루 풀대기도 못 먹고 아이 여덟명이 다 동네 우물물을 퍼 마시는 날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 집 정옥 언니도 그렇게 살아도 항상 얼굴에 미소가 그치질 않고 바느질만 평생하면서 그의 어머니 대를 이어 당집 식모 일을 평생 한 사람이다. 이것이 멀지 않은 50여년 전 1960년대 얘기다.
그 집 당집 두 아들들은 그래도 H대를 나와 큰 사람은 사업을 하며 씀씀이가 어머니를 닮아 지독하고 잘 지내는데 동생이 좀 부실하게 사는 것 같다고 들었다. 지난 번 은평 뉴타운 조성사업으로 보상을 많이 받은 듯하고 잠시 근처에 나가 살다가 정 붙여 살던 곳이라 그런지 이들도 다시 이쪽 동네 아파트로 이사 와 산다고 들었다. 자신이 살던 집은 이제 문화재가 되어 아파트 위에서 내려다보며 옛 시절을 추억하며 지내는지 모른다.
그리고 송수네가 있었다. 그의 아버지도 머슴으로 살다 장가를 보냈는데 그의 처는 욕심이 많고 욕을 무척 잘 하는 사람으로 소문이 났었다. 2남1녀를 두었는데 아들하나가 누구와 시비가 붙어 싸우다 젊은 나이에 맞아죽었다고 들었지만 두 남매는 공부도 많이 하고 멀리 안 가고 갈현동에서 열심히 산다고 했다. 다 얼굴 보면 옛일들이 생각나고 그리운 사람들인데 잘 못 산다고 하면 마음이 아리고 아프다.
또한 한집 건너 필례 언니네도 살았었다. 없는 집에 자꾸 여자애만 낳으니까 이번엔 틀림없다고 필례라고 지었다며 했고 다음엔 더 틀림없다고 해 ‘확실’이라는 이름을 지어 그 이름으로 평생 사는 언니도 있다. 지금은 김포쪽에서 좋은 신랑 만나 알뜰살뜰 잘 사는 것 같은데 최근엔 근황을 잘 모르게 되었지만 암튼 악착같아서 잘 살 것이라고 믿는다. 오늘이라도 이곳에서 만났으면 바라지만 연락이 안 닿고 사는지라 수소문해서라도 꼭 보고 싶은 사람이다
봄이 오면 당집 동네는 온통 진달래 개나리 아카시가 산과 들에 흐드러지게 피고 논두렁 밭두렁 들판에는 봄이면 쑥 냉이 씀바귀가 지천이었다. 개울가엔 송사리 붕어 메기가 아이들 투망질에 여름해가 저물기도 했다. 지금은 이 지역 이름이 진관동이지만 그 당시 이름은 신도읍 진관외동 내동이었고 경기도 고양군 관할이었다. 앞산이 북한산이고 밑자락엔 박석고개라고 불렀다. 뒤로는 얕으막 했지만 숲이 우거져 항상 들어가기가 꺼려졌던 이말산이 동네를 감싸고 있어 포근함을 주기도 했지만 애들은 잘 올라가지도 않는 좀 두려운 곳이기도 했다. 바로 아래쪽에 우물이 있어 동네사람 모두가 저녁이면 물지게나 물통을 이고 지고 와서 그물을 길어다 먹던 일이 아련히 떠오른다.
동네 이름도 우물골이었다. 나의 막내 동생이 한 밤중에 갑자기 사라져 난리가 났었는데 아이가 어쩐일인지 혼자서 우물를 지나 숲속으로 혼자 들어간 모양이었다. 길을 잃고 얼마나 울며 헤매었는지 큰 사건이 안 난 게 다행으로 호젓한 산속에 정말 귀신이 끌고 간 것인지 그래서 더 산 쪽은 두려워하며 살았던 기억이 있다. 내가 10살짜리 계집아이로 내 눈엔 저녁이면 가로등도 없고 집집이 호롱불만 간신히 밝히고 살았던 그래서 무서워서 밤엔 꼼짝 못하고 화장실도 언니 동생들 동행해서 가고 방에만 있어야 했던 일이라던가 모든 게 부산에서 살던 때 와는 달라 많이 불편하게 지낸 시절이 이곳이었다.
그 이전엔 부산 대신동에서 살다 9살 때 아버지 엄마따라 온 식구가 이곳이 고향이라고 찾아 올라와 살게 된 곳이었다. 집도 정말 얼마 없었다. 구파발 통일로 도로변에 몇 채 뿐 작은 시장이 형성되고 초등학교가 들어서면서 주변으로 집이 뜨믄뜨믄 들어서는 것을 보며 자랐다. 우리 집과 당집주변에 집이 10여 채, 멀리 있는 곳까지 합쳐야 초가집 움막집 합쳐봐야 20여 호 남짓, 황량하기도 했던 곳, 처음엔 그렇게 모여 살았었다.
봄이면 집집마다 겨울에 묵혀놨던 빨래감을 가지고 진관사 삼천리 골로 빨래를 하러 가곤했었다. 머리에 이고 지고 뭔가 들고 나서면 머슴애 계집아이들은 신이 났었고. 즐겁게 소풍가듯 들고 줄지어 걸어서 갔다. 북한산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수정 같은 맑은 물에 잿물같은 것으로 여인네들은 팔을 걷어 부치고 억세게 이불도 빨아 널었다. 옷가지며 아이들 내복이나 고쟁이도 빨고 묵혔던 빨래감을 다 끄집어내 한 짐씩 빨아 서는 너럭바위 위에 척척 걸쳐놓고 널어 말리는 건 순서이기도 했다. 그래야 집에 올 땐 다 말라서 가볍기도 했고 일광욕에 빨래들이 뽀송뽀송 촉감을 좋게도 하기 때문이었다. 솥도 가져와 솔가지를 짚혀 밥도 해 먹으면서 하루 종일 그 골짜기에서 연례행사처럼 세탁에 온몸을 움직였었다. 어른들이 빨래를 하는 동안 아이들은 나들이에 들떠 또 물장난에 신나는 날이었다. 미끄럼도 타고 가재도 잡고 어린 머슴애는 고추도 내놓고 물장구에 소풍 나온 기분으로 벼르던 축제처럼 즐거운 나들이가 되기도 한 게 그리움으로 그려진다.
따스한 봄날 햇볕에 맑은 계곡물을 거슬러 가며 가재라도 잡다보면 반나절이 후딱 지나간다. 가지고 간 비닐 봉지에는 가재들이 어느새 가득이고 옷도 젖어 조금 힘이 들면 아이들은 너럭바위에 벗은 채로 누워 해바라기도 한다. 햇볕을 받은 따끈한 바위는 금새 아이들 몸을 녹여주고 물에 오래 들어가 있어서 탱탱 오그라든 고추들도 햇볕을 받으며 노근노근 풀어진다. 따끈해진 바위에는 땡볕을 받은 빨래들도 산바람까지 산들 불어주어 금방 보송보송 마른다.
이러한 곳이 세월이 지나면서 밭둑 옆으로 허름한 주택이 더 들어서고 방송 언론사 사람들의 주택이 언덕배기에 단지를 이루며 들어서더니 그 동네 이름을 기자촌으로 불리게 되었다. 곧이어 뒤편 이말산 우측으로는 예비군 훈련장이 들어서고 앞쪽으론 중 고등학교가 들어섰고 최근에는 은평구의 뉴타운 이 조성된다며 기존 주택이 다 헐리고 말았다. 안 헐린 곳은 오직 당집 한 곳 뿐이다. 보상금이 나왔다며 한 동안 어수선 하더니 하나 둘 보따리를 싸고 용달차에 짐을 싣고는 다들 어디론가 새 보금자리를 찾아 떠났었다. 주인 떠난 집집마다 텅 빈 모습이 흉물스럽고 어수선 하더니 그 모습도 잠시, 며칠 후 중장비가 들이 닥쳤고 순식간에 단지 조성이 끝나고 아파트가 쭉쭉 올라가 옛 동네의 고즈녁했던 모습은 다 없어지고 세상이 변해 버렸다. 좀 떨어진 물푸레골엔 단독주택이 들어선다고 했고 진관사입구엔 한옥이 한 채 두채 느리게 들어서더니 한옥마을이 동네 이름이 되었다.
북한의 신의주까지 연결이 된다는 통일로는 국가적 대동맥 같은 1번 도로다. 신작로 길 같았는데 6차선으로 넓어졌고 주변이 정비가 되고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이곳도 한 도시화가 되고 말았다. 지하철이 일산까지 연결이 되어 이용을 하게 된지도 벌써 20년은 넘은 것 같다. 이제 구파발역 앞엔 큼지막한 롯데 쇼핑몰까지 들어서서 주변을 온통 바꿔 놓더니 빠질세라 주변으로 주상복합건물이 빈자리 없이 들어섰다. 일대가 다운타운 못지않게 번화가로 변해 버려 격세지감을 절로 느끼게 한다. 오직 당집 칠성당만이 예전 모습 그대로 고적하게 모든 세월을 간직한 체 그 자리에 남아있다.
이곳이 세월 속에 많이 변한 만큼 내 자신도 그 세월을 같이 나누듯 어느덧 환갑을 맞고 초로의 60대가 되었다. 10살에 이곳에서 신도초등학교 다녔고 중학교 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사는 게 힘들게 되자 엄마와 우리 6남매가 어느 기관의 도움으로 정릉으로 이사가 어렵고 고달픈 어린 시절, 학생 시절을 보내기도 했었다. 거기서도 계속 우리집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고 그 와중에 갑자기 동네 축대까지 무너져 엄마가 돌아가시면서 의지 할 데라고는 그래도 이모 외숙모가 사는 근처 같아 갈현동으로 옮겨 내가 가장 노릇을 하며 살았었다.
이곳에서 살면서 고모의 소개로 30살에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됐고 처음엔 강남구 서초동에서 신혼을 시작했으나 다시 은평구 역촌동으로 그 다음은 일산으로 다시 역촌동 그리고 양주시 장흥에서도 살다 이곳 은평 뉴타운, 다시 얘기하면 옛날 살던 곳 바로 기자촌으로 나도 돌아와 눌러 살게 된 것이 벌써 9년째가 되어간다.
그 동안 남매를 낳아 키워 이제 딸은 시집보낸 지 3년이 되었고 예쁜 손녀를 낳아 그 녀석 보는 재미에 쏙 빠진 남편, 아들 그리고 나까지 그 아이의 열광팬이 되었다. 이제 11개월인데 매일 우리 집에 와 주기만을 노삼초사 기다리는 손녀바보가 되어 살고 있다. 그동안 다행이도 남편 사업이 잘 돼 지금은 좀 여유를 갖고 살고 있다. 일만 하는 남편, 건강하게 커준 자식들 모두가 하느님의 은혜이고 우리의 기도와 신앙이 그리고 우리의 노력과 열망이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하고 만들어 주신 것 같다.
상가 집에 또 한사람이 찾아 왔다. 나의 셋째 동생과 동갑인 명순이가 문상을 온 것이다. 어떻게 알고 멀리 마산에서 남편과 둘이 이 먼 장례식장까지 왔는지 고맙기 그지없다. 이럴 때나 와야 윤숙이 언니도 보고 윤애도 볼 것 아니냐고 얼싸안고 반가워 한다. 마산에서 아구찜으로 성공한 남편과 아이 셋을 낳고 호텔까지 경영한다며 그동안 밀렸던 얘기를 밤늦도록 나눴다. 다시 한 번 언제 날 잡아 만나자고 명함도 내 놓으며 한번 내려오면 꼭 들리라는 말과 함께 다녀간다. 그 집안도 정말 꼬질꼬질하게 살던 농사짓던 집 둘째 딸이다. 인물도 훤해졌고 원래 공부를 잘 했었다. 남편도 잘 만난 듯 둘이 잘 어울렸고 다정해 보여 기자촌 골짜기에 한 인물 난 듯 보여 보기 좋았다. 그러나 끝내 외숙모네 당집 사람들은 얼굴을 안 비쳤다. 연세든 노인은 그렇다 쳐도 아들이나 그의 처라도 와 줬으면, 그 옛날 그렇게 수족처럼 부렸는데 아쉬움이 남는다.
이글을 쓰기 시작하며 퇴고 중에 윗집 외숙모가 돌아 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롯데 쇼핑몰이 생겨 주변사람들이 자주 가게 되는 요즘인데 2 주전 어느 날 그곳 1층에서 그 집 며느리를 만나게 됐다. 태석이 오빠 처다.“어머님 돌아 가셨잖아!” 보자마자 하는 소리에 얼떨떨해 있는데 옆에는 아들이 같이 서 있다. 오랜만에 나를 봐서 친가 쪽 누이가 되는 줄도 모르나 보다. 그래도 노인이 돌아가셨다기에 “ 죄송하네요. 못 찾아 뵈서...” 어딘지 알아야 갔을 것이고 소식 없이 사는 옛날 떨거지들이기에 소식 전하기도 귀찮았을 것이다. 나 역시 더 이상 할 말도 생각이 안 났다. 그래도 아랫사람인 내 자신이 열등감도 무시도 수모도 참고 어른을 찾아보고 살았어야 하는데 잘못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그집 식구들이 보여줬던 행태들이 생각 날 때면 서로 안 보고 사는 게 속 편한 거지. 자족하며 무관심으로 지내고 있다.
자식자랑하며 호들갑인 그 언니얼굴이 이상하게 보였다. 보톡스를 맞았는지 얼굴전체가 깨끗하질 않고 금방 꺼낸 설익은 피자처럼 울긋불긋하다. 같은 뉴타운 옆 블럭에 살면서 못 본체하고 지내고 있다니 서로 도리가 아닌 것 일 텐데 나도 어지간하다. 언젠가 그 집 오빠 내외랑 우연히 한번 본 적이 있다. 길에서 마주친 나를 보더니 그 집 언니와 얘기 중인데 빨리 가자고 그의 처를 끌어당기는 모습을 봤을 때 정말 용서를 해야 되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우리가 잘못하고 살았나? 그 동안 나나 내 형제가 그에게 뭘 잘못 했는지 물어 보고 싶기도 했다.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일게다. 우리 어머니가 친딸인데 출가외인이라고 그 많은 재산 한 푼도 안 주고 외숙모 역시 아들 며느리 손자들에게 다 차지하게 했다. 본인들만 잘 먹고 잘 살다 마음 편히 가셨을까. 이제는 우리도 다 컸고 아니 환갑까지 됐으니 인생 살 만큼 살았다. 다 이해하고 다 용서를 했다. 그동안 내가 그 점을 조금 불평하고 따진다고 더 미워했었지 싶다.
다시 칠성당(예전 이름)을 찾아본다. 기역자 한옥 기와집이 둘이 합쳐진 모양새다. 그 시절 그 많은 사연을 홀로 간직한 체 여전히 고고히 서서 우리를 맞고 있다. 다른 내방객들은 무심히 대청마루와 부엌을 기웃기웃 둘러보곤 볼게 없다는 듯 그냥 나간다.
그러나 나에겐 그 대청마루가 내 어린 부르튼 손으로 닦고 쓸고 또 닦던 그 마루 이고 그 마당 아닌가.
음식 냄새가 자욱했던 부엌, 바쁘게 움직이던 이모와 순옥언니 엄마들의 바쁜 몸짓이 있었고 무당이 장군복을 입고 덩실덩실 칼춤을 보이면 장고와 피리소리의 풍악소리는 언제나 귀가 아프게 울려댔고 제사상엔 많은 음식이 모양 자랑하며 식어갔었다. 제사 상 위의 돼지머리는 역시 다 안다는 듯 싱긋 귀여웠던 게 아니라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도 된다. 언제나 간절하고 처절하게 손을 비비고 모아 절을 수없이 하는 굿 주 의 애절한 모습들, 대청엔 기력이 쇠잔한 환자도 누워 있을 때도 있었다. 그리고 울타리 밖까지 꽉 매운 구경꾼들, 애들은 덩달아 뭐가 신나는지 집 안팎을 뛰어다니고 그리곤 끝날 때를 기다려 침을 꼴깍 삼키며 먹을 것만 노려봤었지.
장례를 끝내고 며칠 후, 난 정옥 언니 정희 언니 시향이 이종 올케를 집으로 초대해 저녁을 대접하며 시간을 같이했다. 환한 얼굴로 손엔 다 들 과일이나 뭘 사가지고 들어온다. 그동안자주 볼 수가 없었는데 이제부턴 돌아가며 식사라도 같이 하면서 지내자고 했다. 어떻게 보면 주변머리들도 없고 악착같은 근성도 없이 큰 욕심도 없이 사는 사람들이다.
힘들고 고단한 시절이었다. 전쟁 후의 나라가 힘든 시절이었으니 뭐 다 그렇게 지내지 않았느냐며 숙명처럼 팔자처럼 편한 마음 들 같다. 현명한 생각인지 모른다. 모두가 삶의 무거운 짐은 이제 다 내려놓은 듯 보인다. 참으며 잘 견디고 지낸 것이 남은 사람들에겐 오늘의 보상인 것 같다. 모두 그 시절 당집에서 허드렛일 궂은일을 있으면 있는 대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해 주며 지낸 사람들이다. 여전히 그 동네를 떠나지 못하고 그만그만한 이웃들이 의지가 돼서인지 근처에서 다 살고 있다. 이제 남편도 자식도 다 떠나보냈다. 딸이라도 남은 정희 언니네는 모녀가 서로 의지가 되어 살아가야 할 것이다. 다들 노년이 행복하고 이젠 쉼도 가지면서 건강들 하셨으면 좋겠다.
식사를 마치고 과일과 커피까지 마친 일행들이 일어서려고 한다. 정희언니가 한마디 한다.
“다음 달엔 김포 확실이네 가야들 될 것 같은데”
“왜요?”
“그 집 막내딸이 결혼한데.”
“그래요?” 다들 처음 듣는 소리라며 반색을 한다.
“신랑이 의사래. 수련의 과정.”
“아마 딸도 의사라지” “그래요? ㅎ하하 잘 키웠네.”
“둘 다 연대 세브란스에서 근무한다는 군”
“그래 너무 잘 됐다.”“맨 날 이름 땜에 놀림 받더니 이름값 톡톡히 하네.”
“그러게 말이야. 고생 끝에 낙이 온다더니 좋은 일이 자꾸 생기네. 다들 한 차로 가서 그날 많이 축하해 줍시다.”
“그래요. 우리 동네 사람, 확실한 사람, 이름 값 하고 인물 났네. 호호호.”
정겨운 만남을 다시 기약하면서 우린 그날 그렇게 헤어졌다. (원고지 85매)
끝
|
첫댓글 다시 한 번 퇴고를 했습니다. 이 글은 나의 처가 얘기해 줘서 써 본 그의 성장기록 이기도 합니다. 다들 힘든 시절 이겨내고 이렇게도 살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