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 평사리 최참판 댁을 다녀와서
밤하늘, 별이 너무 많이 총총총 박혀 빛나고 있었다. 별도 공해가 싫었는지 하동 최참판댁 마당 위 맑은 하늘에 모두 모여 있는 것 같았다. 공해를 피해 이곳에 모여 빛나고 있으니 울산 밤하늘에는 별이 없을 수밖에.......
생각 그려주는 별빛
--하동 평사리 최참판 댁 마당에서
비의새
가로등 없어 먹빛인 밤
최참판 댁 올라가는 길에는
근심 같은 그림자 보이지 않아 좋았다.
까만 눈동자에
생각 그려주는 별빛
별 향기 빛으로 변해
지구까지 수만 년
집시처럼 떠돌며,
사연도 수만 가지
어느 별, 슬픈 이의 눈물에 담겼다가
어느 별, 아이의 순한 꿈에 담겼다가
어느 별, 시인의 빗물 시에 담겼다가
빛 하나에 수만 가지
수억 별빛 수억 사연
별빛이 그려준 생각
가슴에선 향기로 변하는데,
별빛 쫓아낸 불빛으로
생각과 향기 잃어버린 도시
하동 평사리 최참판 댁 하늘에는
도시에서 쫓겨난 별들,
근심 같은 그림자들,
모두 꿈으로 바뀌어
총총총 총총총 빛나고 있었다.
2003년 11월 22일 토요일부터 23일까지 1박 2일 일정으로 소설 토지의 무대인 하동 평사리 최참판 댁과 산청 남명 조식의 유적지인 산천제, 그리고 함양 학사루와 상림으로 문학기행을 떠났다. 정일근 시인이 지도 선생으로 있는 울산 시인학교 학생들의 겨울 문학기행에 동행하게 된 것이다. 나 이외에도 시인학교 학생들의 남편 세 명과 최종두 시인(전 울산 MBC 상무 엮임), 김종경 시인, 권일 사진가, 이선숙 판소리 명창, 김영희 울신시립예술단, 김잠출 울산 MBC 부장, 서대현 경상일보 기자 등이 동행하였는데 모두 23명 정도가 되었다.
오후 2시가 약간 넘어 울산대학교 정문 앞에서 우리를 태운 버스가 출발하였는데, 토요일이라 그런지 길이 많이 막혔다. 옆에 앉은 도순태 시인과 이런 저런 사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책도 읽고 늦가을과 초겨울이 교차하는 차창 밖 풍경도 바라보곤 했는데, 오랜 만의 여행이라 가슴은 끊임없이 부풀고 있었다. 또한, 정일근 시인의 재치 있는 입담이 동행하는 사람들을 지루하게 내버려두지 않았고 ‘본처를 사랑하는 모임(약칭 본사모)’의 익살은 과히 일품이었다. 저녁 7시 하동에 도착하여, 여여식당에 들러 섬진강 재첩국을 맛있게 먹었다. 다시 출발, 버스로 한 3~40분 정도를 가니 최참판 댁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밤이 이슥하였고 하늘의 별이 너무 눈부셨다. 가로등이 없어 더욱 깜깜한 밤길을 걸어 올라갔는데, 삶의 근심같이 언제나 따라다니던 내 그림자가 보이지 않아 좋았다. 어쩌면 그 그림자가 모두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었는지도.......
대충 짐을 정리하고 문학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되었다. 김종경 시인이 먼저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마음이 자유롭고 경계를 짓지 않아야 좋은 시가 나온다. 정일근 시인의 시집(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을 읽으니 시가 많이 좋아진 것 같다. 은현리로 들어가기 전에는 사회의 일에 많은 간섭을 하였는데, 그곳에 들어간 이후에는 자연과의 교감을 몸으로 체득한 것 같다. 하지만 시가 아직도 어렵다. 좀더 쉽게 쓰기를 바란다. 오늘의 화두는 아무래도 ’경계를 허물고 쉬운 시를 쓰자‘가 될 것 같다라고 말하였다. 그 말을 들었을 때, 개인적으로 쉬운 시를 쓰자는 말에 충분히 공감하였지만, 너무 쉽게만 시를 쓰면 독자가 상상할 여지를 없애버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물론, 김종경 시인의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화자가 된 사람이 하동문학회 회장인 최영욱 시인이다. 최영욱 시인은 최참판댁을 관리도 하고 손님 접대도 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는데, 우리가 머무는 동안 많은 도움을 주었다. 최영욱 시인은 소설 토지와 최참판 댁에 대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어느 추운 겨울, 아기를 업고 최참판댁에 동냥을 하러 간 젊은 아낙이 있었다. 하지만 먹을 것을 얻지 못하고 박대를 당해 결국은 길거리에서 얼어죽게 되었다. 죽으면서 ’집에 곡식이 넘쳐나도 먹을 입이 없게 될 것이다‘ 즉, 멸손할 것이라는 저주를 퍼부었다. 누군가에게 들은 그 말이, 박경리 선생으로 하여금 소설 토지를 쓰게 만들었다고 한다. 토지는 25년에 걸쳐 집필되었으며, 원고지 4만장에 600만자, 등장인물만 해도 600명에 이르는 대작이다. 토지가 왜 민족의 서사시인가? 그것은 그 내용에 이데올로기가 없기 때문이다. 북한이든 남한이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며, 토지에 등장하는 주적은 일본이다. 또한, 소설 토지는 인물의 내면적 묘사가 탁월하며 작중 인물을 통해 일본을 배척한다.
1987년 KBS에서 드라마로 방송되었다. 그 후 많은 사람들이 극중 무대인 평사리를 찾아왔는데, 막상 와보니 최참판 댁이 없어(드라마는 일두 선생 고찰에서 찍었음)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그래서 뜻있는 사람들을 주축으로 최참판 댁을 재건하였다. 하동군에서 12억을 내고 국비 30억을 지원받았다. 최참판댁은 99칸이었으나 현재 91칸이 완성되었는데, 마굿간과 우물간이 아직 지어지지 않았으며, 토지 문학관은 최참판댁 옆에다 짓고 있다. 또한, 칸보다는 간이란 표현이 맞다. 간이란 기둥과 기둥 사이를 이야기하는 것이며, 약 여섯 자 180~185센티미터 정도가 된다. 최참판 댁을 다 짓고 난 뒤 박경리 선생이 찾아오신 적이 있었는데, 최영욱 시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야야 내가 지리산에게 참 미안하다.”
박경리 선생은 그만큼 생명을 존중하였으며, 자연을 사랑하였다. 박경리 선생이 만약 행복했다면 절대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편을 먼저 보내고 자신은 암투병을 하였는데 삶 자체가 한이었다고 한다.
최영욱 시인의 말을 다 듣고 ‘소설 토지에 대해서 정말 다른 어떤 곳에서도 들을 수 없는 살아있는 강의’라고 느꼈다.
다음으로 양관수씨의 소설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양관수 소설가는 이번에 ‘끝섬’이라는 단편소설로 토지문학 대상을 차지한 사람이다. ‘끝섬‘은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경제적으로 가장 궁핍한 오갈 데 없는 세 사람의 이야기였다. 현대 사회의 단면을 잘 드러낸 소설이라는 평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정일근 시인의 ’시를 쓰는 자세‘란 주제로 짧은 문학 특강이 있었다. 글을 쓰는 자세는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 일기처럼 쓰는 자세다. 어릴 때 일기 검사를 하면 내용이 달라지기도 하였다. 그 다음이 연애편지를 쓰듯이 시를 쓰는 것이다. 학창시절에 연애편지를 대필해주기도 했는데, 연애편지를 대필하듯 쓴 시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유서를 쓰듯이 시를 쓰는 것이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대왕은 유서에 자기 무덤을 만들지 말라고 하였는데, 신라 992년 56명의 왕 중에 최초로 자기 무덤을 만들지 말라고 한 왕이었다. 무덤을 만드는 것은 백성을 괴롭히는 일이라고 하며 화장할 것을 유언했다. 무덤은 여우가 굴을 파며 목동이 노는 곳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유서인가? 시를 쓰는 사람도 생의 마지막 글인 유서를 쓰듯이, 문무대왕의 아름다운 유서 같은 시를 써야 한다. 몸을 다 던져 시를 써야 한다. 정일근 시인의 강의가 끝나자 최종두 시인이 덧붙이는 말을 하였다. 웃는 가운데도 문학 정신이 베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왕에 이야기한 ’몸을 다 던져 시를 쓰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실천에 옮기기는 어렵지만 시를 유행가 쓰듯이 써서는 더욱 안 되는 것이다. 시는 고귀한 것이다. 詩란 한자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言은 말씀이다. 기독교 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 寺는 절을 의미한다. 불교를 믿는 사람은 법당에서 절을 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불교의 법당이 합쳐져 영롱한 이슬처럼 맺혀지는 것이 시이다.
문학 이야기가 끝이 나고 이선숙 명창의 판소리 공연이 있었다. 캄캄한 겨울 밤에 유서 깊은 최참판 댁에서 울려퍼지는 소리는 밤을 더욱 의미 깊게 만들었다. 구슬프게 울려퍼지는 밤의 울음이었다. 최참판 댁에 깃든 한의 소리였다. 판소리와 북소리, 관객들의 취임새가 잘 조화되어 초겨울의 정취를 가슴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23일 아침, 99칸의 최참판댁은 어수선했다. 밤 사이 본처를 사랑하는 모임(약칭 본사모)가 신발을 다 감추어버렸고 정일근 시인의 신발 찾는 소리로 아침이 시작되었다. 그 소리에 잠이 깨어 밖으로 나가니 철수와 영희란 진돗개도 덩달아 수선스러워 했다. 멀리 산 끝으로부터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고 최참판 댁을 한 바퀴 돌며 구경을 하였다. 최참판 댁 뒤로는 양 옆으로 대나무가 심겨진 오솔길이 있었는데, 그 곳에서 쳐다본 하늘이 너무 투명하게 파란색이었다. 아니 대나무의 날카로운 끝에 찔려 하늘의 파란 피가 눈을 통해 가슴으로 흘러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가슴도 파랗게 물들어 버렸다. 밤새 하얀 서리가 내렸고 오솔길은 내딛는 발걸음에 다다닥 다다닥 하는 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공기도 너무 맑았다. 차향 같은 대나무향이 코 끝을 자극했고 갑자기 아내가 생각났다. 같이 왔더라면......, 오솔길을 따라 걸어가니 초가가 한 채 있었는데 초당이라는 안내푯말이 보였다. 초당 뒤쪽으로 숲이 있었고 산새들의 아침은 무척 분주해 보였다. 최참판 댁에서 사진 촬영을 하고 대문을 나서는데, 너무 인상적인 풍경이 눈 앞에 확 띄었다. 밤에는 보이지 않았던 풍경이 파스텔로 그린 수채화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섬진강 옆으로 드넓은 들판이 보였고 아침 안개와 함께 너무 멋진 장면을 연출했다. 결코 사진으로는 그 느낌을 다 담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옛날 양반의 이러한 풍요를 떠받친 평민의 고통은 어떠했을까하는 생각도 들어 씁쓸한 기분도 들었다.
최참판 댁을 나와 다시 하동 여여식당에서 재첩국을 먹고 남명 조식 선생이 살았다는 산천재로 향했다. 조식 선생은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후학을 양성하였다고 하는데, 그가 올린 상소는 유명하다고 한다. 목숨을 걸고 올린 상소 내용에는 왕의 어머니를 과부로 왕을 고아로 묘사하였고, 바른 정치를 할 것을 충언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을 기재하고 싶으나 메모를 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덕천 서원과 학사를 지나 도착한 곳이 상림이다. 상림에는 낙엽이 모두 떨어져 길에 굴렀는데 낙엽을 밟으며 걷는 걸음이 너무 좋았다. 싸~악,싸~악하는 소리. 낙엽으로 일행들은 서로 장난도 쳤는데 꼭 동심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또한 낙엽에 앉아 듣는 이선숙 명창의 소리는 너무 아름다웠다.
상림에서 쓴 시
단풍이 쌓인 숲.
이만 그루의 나무들 속으로
울려 퍼지는
이선숙 명창 소리.
옷 벗고 잠잘 채비하던
뼈와 같은 가지들
일제히 놀라 눈 동그랗게
뜬 생기.
지나가는 작은 바람이
기웃대고
취임새하는 벗들이
흥겨운
초겨울 상림이 쓴
시.
상림을 마지막으로 경주로 향했다.
첫댓글 세상에나 ~ 너무 좋으셨겠다, 그런 자리는 소문 좀 내셔서 같이 가면 안될까요? 저도 지난 여름 갔다 오긴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