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현실의 목소리가 아니다
*(책)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지금은 신화가 되어버렸지만 사람들은 한때 사진을 어떤 다른 매체보다도 진실한 매체로 여긴 적이 있다.
국제적으로 사진계를 주도하는 엘리트 사진가 집단인 매그넘(Magnum Photos)의 신조는 사진이 현실의 세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진실한 ‘목소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진이 세계의 진실한 목소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인위적 가공도 배제한 스트레이트 사진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이들에게 당연한 말이었다.
이는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가 이야기한 ‘음성중심주의 신화’를 연상시킨다.
이때 데리다가 말하는 음성(voix, 목소리)이란 말하는 사람의 내면적 실상을 그대로 재현하는 진실한 매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목소리에 대한 환상은 신화가 되고 말았다. 사진의 운명은 이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진실한 목소리로서 스트레이트 사진의 신화는 미국의 사진가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 1864~1946)로부터 시작한다.
1893년 혹독한 추위가 닥친 어느 겨울 날, 그는 카메라를 들고 뉴욕의 5번가로 나섰다.
숨이 멎을 만큼 극심한 한파 속에서 그는 급기야 눈보라 휘날리는 도로를 마차가 질주하는 모습을 찍을 수 있었다. 몇 시간 동안 사투를 벌인 끝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한 장의 사진은 어떠한 가공도 없는 현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스티글리츠의 예화는 사진가의 진정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신화의 탄생을 의미한다.
20세기 사진의 주류가 세계의 진실한 목소리를 자처하는 포토저널리즘이라는 사실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모든 신화가 그러하듯이 신화란 그 속에 비합리적인 측면을 포함하고 있기 마련이다.
진실한 사진 혹은 사진적 진실의 신화 역시 그와 전혀 반대되는 측면을 포함하고 있었다.
실제로 스티글리츠의 다른 한 장의 사진은 깨질 수밖에 없는 신화의 모순을 그대로 보여준다.
1907년에 찍은 〈삼등선실〉은 어떤 인위적 가공도 없는 스트레이트 사진이다.
이 사진은 당시 대형 여객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담고 있다.
말하자면 진실을 담은 한 편의 목소리인 셈이다.
사진에는 활기차고 분주한 승객들의 모습이 생동감 있게 담겨 있다.
스티글리츠, 〈삼등선실〉 The Steerage, 1907
당시의 대형 여객선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는 이 사진에서는 위층(상류층)과 아래층(하층민)의 모습이 대비된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것은 인간의 삶이라는 현실이 아닌 부에 의해 신분이 구분되는 자본주의적 현실이지만, 역설적으로 사진의 미학적 완성도가 오히려 자본주의적 현실을 은폐한다. 사진이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지 않듯 우리의 음성은 순수한 내면의 목소리가 아니다. 데리다가 ‘음성’과 ‘음성중심주의’에 부정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이 사진이 재현하고 있는 것은 눈에 보이는 현실 자체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스티글리츠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상관없이 이 사진이 담고 있는 목소리는 사진에 나타난 모습 자체가 아닌 ‘이데올로기적’ 현실에 관한 것이다.
상단과 하단이 정확하게 구분된 이 사진은 점잖고 잘 차려입은 중산층과 하층민의 일상이 대비된다.
너저분한 빨래가 걸린 하단부의 광경은 전형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일상적 삶을 나타낸다.
이 사진에 담긴 현실은 인간의 삶이라는 현실이 아닌 부에 의해서 철저하게 신분이 구분되는 자본주의적 현실이다.
역설적이게도 스티글리츠의 예술성이 부여한 이 사진의 미학적 완성도는 다양한 편차가 현존하는 조화의 미를 강조하며 상대적으로 자본주의적 현실을 은폐하는 데 기여할 뿐이다.
말하자면 이 사진의 목소리는 현실의 목소리가 아닌 자본주의라는 허상 혹은 이데올로기의 목소리인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데리다가 왜 ‘음성’ 혹은 ‘음성중심주의’에 부정적인 뉘앙스를 부여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음성을 순수한 내면의 목소리로 간주한다는 것 자체가 허구이자 신화일 뿐이라는 말이다.
고대 희랍어의 로고스(logos)라는 단어는 이성이라는 뜻과 동시에 음성을 뜻하기도 하였다.
데리다가 보기에 로고스 혹은 이성을 중요시하는 서구의 전통은 이러한 음성주의의 신화와 관련된 것이다.
그는 서구의 전통적인 형이상학이 유지해온 신화를 ‘백색신화(mythologie blanche)’라고 부른다.
백색신화는 서구 백인의 사상에 기초한 신화를 의미하는데, 이 신화는 플라톤 이래 계속 이어져온 절대적인 이데아 혹은 목소리에 대한 믿음과 관련이 있다.
플라톤 시대부터 음성(말)은 말하는 사람의 발화 현장 자체를 드러내는 현전(présence)을 전제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음성은 글(문자)과 달리 말하는 사람의 현전을 전제하므로 진정성이 담보된다.
이에 반해서 글은 그것을 쓰는 사람이 없는 상황을 전제하므로 현전과는 거리가 멀다.
다른 사람 앞에서 글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 경우란 로맨틱한 사랑 고백을 위해서 굳이 말이 아닌 글로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는 예외적인 상황 정도가 있지 않을까.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아도 되므로 글을 쓰는 사람은 얼마든지 위선적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플라톤 때부터 발화자의 현전 여부가 말의 진실성과 글의 허위성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었다.
로고스 혹은 이성이란 이렇게 음성처럼 진정성을 담보한 진실한 어떤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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