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컴퓨터 마우스 왼쪽 버튼을 또다시 클릭.
혜은은 태호가 부른 발라드 동영상을 계속 반복하며 보고 있었다.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고 오히려 짜릿함마저 들었다.
고개를 들지 못했던 자존심도 원기를 되찾았다.
입막음 해주는 조건으로 자신을 위한 끝내주는 발라드 한 곡을 불러달라는
까다로운 조건을 그가 쉽게 승낙할 줄이야.
‘기자들은 눈동자에 쌍불을 켜고 가사속 은혜라는 여인의 정체를 밝힌다고
혈안이 됐겠지?‘
괜히 거짓정보를 찾아 헤매는 기자들에게 미안해졌다.
‘하태호, 이 강혜은을 무시하면 안 된다는 걸 이제 똑바로 깨달았겠지?’
혜은은 인터넷을 종료하고 촬영장으로 갈 준비를 하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보니 방금 전까지 동영상으로 보았던 태호였다.
“여보세요?”
혜은은 여유로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약속대로 했으니 나중에 딴소리 하지 마.]
딴소리 했다가는 절대 가만 안 둘 태호의 목소리에 혜은은 입술이 약간
경직되었다.
같은 말이라도 예의 없이 싸가지 어투로 말하는 태호였다.
머리카락을 묶고 있는 밴드를 풀고 옷장에서 수건과 속옷을 챙기며
그녀는 계속 통화를 이어갔다.
“나도 그 정도의 의리는 있어. 노래 고맙다는 말을 못했네. 잘 들었어.
꽤 애절하던데 나한테 그런 마음일린 없을 테고...“
[맞아. 너 아냐. 그럼 끊는다.]
뚜뚜..
일방적으로 통화를 끝낸 태호였다.
혜은은 들고 있던 수건과 속옷으로 바닥으로 집어 던지며 바로 옆에
위치한 침대시트에 몸을 대자로 뻗었다.
태호를 한방 먹인 만찬이 채 하루로 지나지 않아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깔아뭉개고 있다는 걸 느낀 혜은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중얼거렸다.
“너랑 연애하는 여자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여자다. 아아...답답해!....
왜 자꾸 신경에 거슬리는 거지?....그냥 싸가지 없는 녀석이라고 넘어가면 되는데....“
**
태호가 일으킨 스케이트장에서의 소동으로 인하여 유아는 인정에 이끌려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이미 퇴사한 회사 동려직원이 통사정하고 매달리는
바람에 유아는 울상인 채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자신이 기자로서 스타와 인터뷰를 할 때와 지금의 느낌은 판이하게 달랐다.
말도 함부로 하지 못하니 답답했고, 진실을 숨겨야 될 부분도 있으니 거짓말쟁이가
되기도 해야 한다.
“꼭 이렇게 해야 돼?”
유아가 옆자리에서 같이 일했던 동료직원 혜미에게 물었다.
“너도 부장님 성격 알잖아. 내가 오죽하면 싫다는 너를 계속 들볶았겠냐....”
혜미의 입장도 이해 못하는 건 아니기에 유아는 그만 투덜대기로 했다.
인터뷰 장소는 유아의 집이었다.
그건 유아가 바득바득 우겨서 된 것이었다.
“내가 맛있는 거 사준다니까.”
혜미는 억지로 졸라서 인터뷰하는 거라 미안해했다.
“됐어. 여기가 편해. 시작하자.”
“좋아. 일단 녹음기부터 켜고.”
혜미는 녹음기를 ON상태로 맞추고 인터뷰자세를 잡았다.
유아는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을 놓지 않으려 눈을 빛냈다.
“남동생이 연예인이어서 연예부기자로 직업을 택한 거니?”
“그렇지... 부모님의 부탁도 있었고...거의 압력수준이었지.”
30분가량 인터뷰가 진행되었을 쯤 혜미는 어릴적 사진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 중에 한 장을 잡지책에 실었으면 바람을 내비쳤다.
친구의 부탁이니 치사하게 안 들어줄 수도 없고, 사진 한 장 싣는데 크게
문제 될 것 없다는 판단이 서자 유아는 방에서 두꺼운 앨범을 한 권 들고
나왔다.
사진이 뭐 거기서 거기지.
“엄하게 나온 사진 달라 하지 마.”
유아는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치, 엄하게 나온 사진이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너 볼 때 마다 누구랑 약간
닮았다고 느꼈었는데 이번에 태호하고 남매사이인거 알고 나서 무릎을 딱
쳤다는 거 아니냐. 바로 태호였다고.“
혜미는 자신의 일처럼 흥분하며 들뜬 목소리로 말하며 앨범속의 사진을
한 장 한 장 씩 들여다보았다.
유아도 함께 사진속의 옛 모습을 보며 추억에 잠기는 시간을 가졌다.
“어? 이 사람......영화배우 이현수 아니야? 이현수 고등학생 때 모습인데?”
아뿔사!! 저 사진이 저기 있을 줄이야!
유아보다 혜미의 눈동자가 빨랐다. 사진속의 인물은 누가 보아도 이현수였다.
혜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이 사진도 이현수잖아. 그것도 너하고 단 둘이 꽃밭에서 찍었네.”
고1때 유원지에서 패션잡지의 모델처럼 설정해서 찍은 사진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사진속의 두 사람은 서로 등을 대고 먼 곳을 바라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유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긍정도, 부정도.
혜미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릴 방도도 없었다.
“이현수씨와 가까운 사이야? 친척?”
“....그냥...부모님끼리 알다보니 친해졌어. 지금은 연락도 잘 안해.”
어영부영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하려 했다.
요즘 따라 거짓말이 자꾸만 늘어간다. 이러다 피노키오처럼 코가 길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음,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너 이현수씨 취재할 때 무척 난감해 했던 게
기억난다.“
혜미는 유아의 말을 믿는 눈치였다.
“이현수씨 얘기는 기사에 넣지 말아줘. 이 인터뷰의 중점은 태호와 나잖아.”
“왜? 이현수씨와 친분이 있었다. 이정도로도 안 돼?”
얘가! 얘가!
“괜히 이 현수씨 쪽이 신경쓸까봐 그래.”
“난 괜찮을 것 같은데?”
기자의 특성상 놓치기 싫은 기사내용이었기에 혜미는 고집을 부렸다.
결국 유아가 언성을 높이며 혜미의 고집을 꺾었다.
“안 돼! 절대 안돼! 내가 싫어!”
예민하게 반응하는 유아를 보며 깜짝 놀란 혜미는 가슴에 손을 얹고서
유아를 흘겨보았다.
“알았다. 지지배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미안.”
유아는 구겨진 인상을 폈다.
혜미는 계속 앨범속의 사진을 보며 이야기를 꺼냈다.
“이현수 그 사람 참 안 됐어. 진실인지는 모르겠는데 사생아라고 밝혀진
딸이 진짜 딸이 아니라는 소문이 돌고 있어. 이현수씨는 거기에 관해서는
일체 아무런 말이 없고. 사생아 딸 때문에 이혼까지 했는데 만약 진짜 딸이
아니라면 얼마나 황당하냐? 안 그래?“
이건 또 무슨 말?
혜미가 고개를 들어 유아를 쳐다보자 유아는 뛰는 가슴을 진정하려고 눈에
힘을 팍 주었다.
“이현수씨 측근 말 들어보니까 아무래도 이번 영화촬영 마치고 전국 시사회까지
다 돌면 몇 달이 될지 몇 년이 될지는 몰라도 한국에 있지 않을 계획이래.
나한테 몰래 말해주며 비밀 지켜 달라고 한 거라 영화개봉하고 상영관마다
막 내릴 때까지 기사화하지 않을 거야. 영화 더 이상 상영하지 않으면 그 때
특종으로 내보낼 계획이지. 너도 이현수씨 취재했지만 그건 몰랐지?“
연이은 혜미의 폭탄적인 충격발언에 유아는 안개 속에 갇힌 것 마냥
헤어나오질 못했다.
혜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 곳을 멍하니 응시하는 유아의 눈앞에
손을 내저어 보았으나 유아는 그런 혜미의 손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야!”
혜미가 어깨를 툭 치며 놀래고서야 유아는 안개 속에서 헤어 나왔다.
창백해졌던 얼굴에도 핏기가 돌기 시작한다.
**
승철이 운영하는 헬스클럽을 찾은 유아는 데스크 안내직원에게 사장실의
위치를 물었다.
제 발로 그를 찾게 될 줄이야.
그에게 그토록 접근금지라고 입이 닿도록 말한 게 무색할 정도이다.
“사장실은 저 오른쪽 통로로 들어가셔서 쭉 직진하시면 됩니다.”
안내대로 사장실 앞에까지 간 유아는 심호흡을 가다듬고 사장실을 노크했다.
이윽고 들어오라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유아! 침착하자.
승철은 하반기 실적자료를 검토 중이었다. 그가 서류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민준의 도움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지 나흘이나 지났지만 터진 입술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었다.
“유아씨!”
그녀가 직접 자신을 찾아온 것이 믿겨지지 않는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이거 의외인데요? 유아씨가 절 다 찾아오시고.”
“음...부탁할 사람이 승철씨 뿐이어서 이렇게 왔어요. 원하지 않으시면 그냥
돌아가겠습니다.“
말을 돌려가며 할 수 있는데도 유아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는 한번 들어나
보자는 심산으로 왼쪽 눈썹을 살짝 치켜 올렸다.
유아의 말을 다 들은 승철은 심각하게 인상을 구겼다.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만나보고 싶어요. 승철씨는 그 여자가 어디에 있는지 아시잖아요.
만나서 꼭 물어볼 말이 있어요.“
“죄송합니다.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군요.”
승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가서 밖을 바라보았다.
이연을 만나겠다는 유아의 부탁은 결코 들어줄 수 없는 일이었다.
유아에게 처음 접근을 시도했을 때라면 이연을 만나게 해주고도 남았을 것이다.
“갑자기 왜 서이연을 만나려 하십니까?”
그는 여전히 창 밖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의 거절에 폐색이 짙었던 유아는 마지막 희망의 불씨를 안고 대답했다.
“지은이가 현수오빠의 친딸이 아닐 수도 있어요. 병원에서 유전자검사도 하지 않고
판단한 제가 어리석었어요. 서이연씨를 만나서 지은이와 현수오빠 유전자 검사를
부탁하려고 합니다. 이건 중요한 문제입니다. 만나게 해 주세요.“
!!!
승철은 칼날 같은 날카로운 뭔가가 뇌리를 스치는 듯 했다.
‘유전자 검사.....!!’
**
백합 어린이집 앞에 선 승철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이끌림에 여기가지
오게 되었다.
유아가 현수와 지은이 친자관계가 정확한지 유전자검사를 해보자는
제안을 그는 단칼에 거절을 하고 확실한 친자관계가 맞다고 못까지 박았다.
그런 그가 우습게도 지은을 만나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만들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심장이 막상 어린이집 정문으로 들어가려 하니 속도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아이들이 좋아할 것 같은 앳된 외모의 선생님이 상냥하게 물었다.
“안녕하십니까? 서지은 엄마의 친구 되는 사람입니다.”
승철은 신분을 확실히 하기 위해 명함을 건네주었다.
“오늘은 제가 지은이를 일찍 데리고 갔으면 해서 왔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지은어머님께 연락드려 보겠습니다. 유아문제라서
확실하게 해야 되거든요.“
선생님의 말에 승철은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연이 지은을 그에게 맡길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으므로.
당장 망신당하는 일만 남았다.
역시나 선생님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이연이 거절했다고 알려주었다.
이연이 승낙을 했다면 그건 더 웃긴 일이지만 왠지 그래도 섭섭하기는 했다.
“그럼 지은이를 잠깐이라도 보고 가면 안 되겠습니까? 지은이를 못 본지 오래
되서요.“
“......네. 여기서 잠시 기다리세요.”
망설이던 선생님은 승철이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 보여 지은이의 손을 잡고 나왔다.
그는 지은이가 다가오자 무릎을 꿇었다.
양 갈래로 머리를 묶은 지은은 새하얀 토끼 같았다.
어찌나 앙증맞고 귀여운지 승철은 저도 모르게 꼭 아빠가 된 기분인양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지은은 헤어샵 앞에서 처음 승철을 보았을 때와 똑같이 싱긋 웃었다.
분명 승철이 지은에게는 낯선 인물인데도 말이다.
원래 낯가림을 하지 않는다 해도 승철에게는 지은의 미소가 남다르게 느껴졌다.
“지은아....안..녕?...”
그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인해 떨렸다.
“..안녀엉..하세요?...”
이렇게 승철은 눈 뜬 장님같이 자신의 친딸을 앞에 두고서도 딸인 줄 모른 채
첫 대화를 하게 되었다.
그가 두 팔을 벌리자 지은은 아무 거리낌 없이 그의 품에 들어갔다.
현수의 품에서는 훌쩍였던 때와는 달리 지은은 승철의 품에서 개나리 같은
밝은 미소를 지었다.
역시 핏줄은 무시못하는 것이며 거역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지은이 느낌만으로 승철을 대하는 것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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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죠?^^;
카페 게시글
로맨스 소설 1.
[ 중편 ]
사랑, 그 곳으로 [23]
천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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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9.09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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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너무 오랜만입니다ㅠ 기다리고 있었는뎅...ㅠ
에궁..기다려주시구ㅜ.ㅜ 오랜만인데 한 편 뿐이라...쥐구멍에 숨어야 되겠어요.(빨랑 써!!)
재미있습니다~^^
에궁...재밌게 읽어주시니 고마워요.ㅜ.ㅜ(빨랑 써라니까!) 쥐구멍에 숨어서 빨리 써야 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