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행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원장
어느 날 부모는 딸 셋에게 "누구 덕에 먹고 사느냐"고 물었다. 첫째와 둘째 딸은 "하늘과 땅, 부모 덕"이라 말했다. 그러나 '가믄장아기'는 "하늘과 땅, 부모 덕이기도 하지만 내 배꼽 아래 선그뭇(음부·陰部) 덕에 먹고, 입고, 행동한다"고 답한다. 당당하게 성 정체성을 주장한 '가믄장아기'는 화가 난 부모에게 쫓겨난다. 그 후 부모는 눈이 멀고 거지가 된다. 갖은 고생 끝에 거부가 된 '가믄장아기'는 '거지 잔치'를 열어 부모와 재회한다. 해피엔딩. 신화가 갖는 긍정의 힘이다. 그런데 참 당돌한 신화다. 과문한 탓인지 여성의 생식기에 대해 이처럼 돌직구를 던지는 신화는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한말(韓末) 제주에 온 미국인들은 이곳을 '조선의 아마조네스'라고 했나 보다.
척박한 화산섬, 제주엔 유독 신화가 많다. 1만8000여 신(神)의 태반이 여신이다. 먼바다로 나간 남자들은 돌아오지 못하고 가난했던 제주엔 돌·바람·여자들이 남겨져서다. 여자들은 맨몸으로 바다로 들어가 소라·미역·전복을 채취했다. 거친 생존환경에 지친 여자들에겐 신화가 필요했다. 생명과 풍요와 위로의 상상물인 강한 여신이. 그렇게 탄생한 여신이 '설문대할망'이고 '가믄장아기'다. 사회학자 질베르 뒤랑은 "신화라는 것은 인간의 원초적인 상상력의 진정한 활동이며 원초적 인간 정신활동의 보편적인 표현양식"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가믄장아기'에 대한 학예사의 설명에 얼굴이 붉어진 육지 참석자들이 "제주에선 성평등이 필요 없네"라며 박장대소했다. 그러자 설문대여성문화센터 고순아 소장, 목소리가 잦아든다. "요즘엔 육지의 가부장 문화가 엄청 들어왔다"며. 애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