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가 과로사를 한다더니 전업주부인 저도 때로 답답하다 싶을 때가 있습니다.
놀다가 지치는 건가요?
하여, 신문이나 인터넷에 나오는 여행기사를 읽으며
'언젠가 가 보리라' 꿈을 꾸기도 하고 실제로 작심하여 길을 나서기도 합니다.
어제가 그런 날이죠...
전에 사진은 거짓말장이라고 사진학을 가르치던 교수가 일갈했기에
'혹시 기사에 낚이는 거 아니야?"
하고 조마조마한 마음이긴 했지만 오전 8시 30분 남편과 집을 나섰습니다.
전북 완주군 상관면 죽림리의 공기마을과 상관저수지를 향하여...
걸을 곳이 제법 많겠기에 운동화 준비하고...
생각보다 전라도 완주는 가깝네요?
상관면 소재지에 이르니 우체국 건너에 상관저수지 산책로의 안내문이 보입니다.
찾기는 수월했습니다.
가는 길 주변에 잘 닦인 길과 흐린 날씨가 편안한 느낌입니다.
물가에 차 한 대 세울만한 곳이 있어 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걸을 준비를 합니다.
둘이서 걸을 때면 언제든 우리는 만난 지 얼마 안된 수줍은 연인처럼 느껴져요.
참 이상하죠?
주변에 인기척이 없으니 설레이기도 하구요.
날이 흐려 사진은 어둡지만 새벽 물가가 아름답다는 기사의 분위기가 어떨지 실감이 났습니다.
왜가리 한 마리가 다리를 접고 물가에 앉았다가 놀라 날아갔습니다.
신문에 소개 되고도 이렇게 고요한 관광지가 있다니...
평일이라고는 했지만 저수지가에 차라곤 달랑 우리 차 한 대...
푸른 여름이 그곳에 한 가득입니다.
누릴 사람이라곤 우리 두 사람..
비까지 내려 깨끗한 수변엔 섬바디 한마당와 씨앗 달린 냉이가 한참입니다.
그 길을 땀으로 끈끈한 손일지라도 마주 잡고 걸었습니다.
맨날 환자와 씨름하거나 어쩌다 시간이 나면 운동하러가는 남편이
'부부의 날'을 기념해 제게 시간을 허락했을 때
저는 최근에 저를 꿈꾸게 한 이곳에 가 보고 싶다 했습니다.
창포 한 무더기가 물 가에 작은 풍경을 만들어 얼른 달려가 자연을 가슴에 담아 봅니다.
저수지 건너 보이는 산자락이 정겹습니다.
산책로까지 쳐들어 온 물을 끼고 예쁜 꽃들을 벗 삼아 物我一體가 되어 봅니다.
풀벌레 소리조차 없습니다.
운동화 위로 물 머금은 풀이 인사를 하니 그만 바지 끝단은 물에 빠진 생쥐꼴입니다.
활엽수 그늘로 빗물 방울이 떨어지고 우산 하나로 둘이 쓰고 걷는 동안
옛 데이트 길이었던 삼청동공원이 퍼뜩 생각납니다.
너무 수선스럽게 사는 게 타성이 되었는지 둘이 걷는 게 문득 쓸쓸하게 느껴집니다.
'그만 돌아가자!'
고요는 소란함을 그립게도 합니다.
편백숲이 있는 공기마을은 완주군 상관면 죽림리에 있습니다.
숲을 찾아가는 길을 놓쳐 동네사람들에게 물으니
"다 왔어. 쭈욱~ 가면 돼. "
하는데 멀리 제3주차장이란 작은 안내문이 보입니다.
차 한대 겨우 지나는 마을 길.. 사람들이 몰려들면 길 때문에 걱정이겠다 싶습니다.
교행이 어려우니까..
주차장에 차를 세우니 비가 더 세게 내립니다.
산마루 쪽엔 구름이 모자를 씌웁니다.
입구간판엔 '치유의 숲'이라고 써져 있대요.
편백이 빽빽히 서 있는 치유의 숲엔 그래서인지 작은 비가림을 치고 누운 환자도 보였습니다.
그 사이 작은 오솔길에 접어 드니 피톤치드 향이 기분좋게 퍼집니다.
요즘 배가 뜨끔거려 여행이 아니었으면 오늘은 병원에 가 볼 참이었습니다.
그러니 숲 사이를 걷는 마음에 작은 기원이 생겼습니다.
'내일도 오늘 같기를....'
긴 우산을 지팡이 삼아 길을 오르니 길섶에 참 예쁜 버섯이 보입니다.
하루살이 '망태버섯'이랍니다.
너무 신기해서 사진을 찍고 다른이들이 볼 수 있도록 건드리지 않고 두고 왔습니다.
아마 습한 어제가 아니었다면 못보았을지도 모르겠어요.
이렇게 예쁜 버섯은 독버섯이라던 초등학교 자연시간도 생각났죠.
예쁘기도 하고 맛도 있어 인간에게 도움도 되는 버섯이었으면 더 좋았을 걸....
예정에 없던 여행이 추가되었습니다.
완주 가는 길에 전주방향의 이정표 아래에 치명자산성지라는 팻말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노는 것도 質이 있습니다.
여행을 하는 게 신자로 사는 데 보탬이 된다면 영혼과 육신이 고루 살찌는 은총입니다.
내가 사는 곳, 내가 속한 곳, 내가 다니는 성당이 세상의 전부는 아닙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안되려면 눈을 더 크게 떠야 하죠.
하긴 우리 아들 언젠가
"얘야! 네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는 아니야. 그렇게 살다간 우물안의 개구리가 된단다. "
하자, 냉큼
"난 우물 안에서 안 나갈거야. "
해서 拍掌大笑를 했지만....
어쨋든 세상이 넓음을 안다면
온 세상에 서로 다른 얼굴과 마음을 가진 60여억명의 인격이 있음을 알기에
작은 오해나 의견에 마음 상할 일은 없겠습니다.
서로 다른 것이 나쁜 것이 아니니 그저 '나와 다르구나!' 하면 그뿐....
치명자산성지는 전주지역의 신자인 유항검과
신앙의 진주라는 동정 부부로 살다 처형된 그의 맏아들부부및 가족.. 일곱분이 합장된 순교성지입니다.
전주의 전동성당과 함께 전주지역 순교성지로 많이 알려져
저야 오래전에 다녀왔지만 남편에겐 처음 가 본 성지였을 겁니다.
성지순례길을 오르는데 땀이 비오듯 흐르고 다리가 퍽퍽했지만
"어떤이는 죽어 주님을 증거했는데 죽으라는 것도 아니고.."
하며 씩씩하게 성지성당에 올랐습니다.
오르는 계단 곁엔 사랑초가 피어 있었고 군데군데 백합도 피었습니다.
남편은 십자가의 길을 오르며 14처를 한 처 한 처 소리내어 읽으며 묵상했고
저도 그를 도왔습니다.
명색이 교리선생이었으니 조금은 도움이 되었겠죠?
제 12처에 이르러 주님 죽으실 때 성서구절들이 생각나 마음이 물컥했습니다.
성서읽기를 하는 요즘이라 더 생생했지요...
성당 내부엔 두 부부의 모습이 모자이크 되어 있고 서간도 타일로 새겨져 있습니다.
십자고상이 전면에 걸려있지 않은 것도 독특했습니다.
성체조배를 하며 순교자를 위한 지향과 시복시성 기도문을 함께 바치는데
남편도 이젠 어색해하는 품이 아닙니다.
내친 김에 올라가는 길에 노인복지시설에서 사목하시고
사회복지학을 공부하시며 고생하는 신부님과 저녁을 함께 하자 했더니 흔쾌히 '그러마'고 합니다.
성당은 산정상 가까이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십자가 곁에는 성모상과 주님을 닮은 석상이 십자가 곁에 서 있습니다.
성당안은 후덥지근하니 기도를 하는 동안 등과 가슴 사이에 땀이 줄줄 흐릅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여행을 와서 남편에게 교리랑 기도를 알려주며
"여보! 모든 신자들이 다 알고 있는 건 아니야. "
"나처럼? 그저 왔다 갔다?"
"아마 그럴지도..... 허나 시간이 가면 또 나처럼 자신을 증거하게 되기도 하죠, 뭐.
당신은 사는 게 기도니까... 바른생활 첫페이지..ㅎㅎ"
성당 위에 모셔진 일곱분의 합장묘 앞에 지친 몸을 기대며
그분들의 순교정신을 마음에 새겨봅니다.
신부님도 교리를 하셔야 한다기에 시간을 맞추느라 무주에도 들렀습니다.
무주리조트 곤돌라는 네 시까지밖에 운행되지 않아 우린 헛걸음을 쳤지만
무주의 산세는 강원도와 달라 안개와 구름에 싸인 산봉우리가 정겹습니다.
고개마다 구비마다 새로운 별천지...
반딧불이가 있다는데 낮여행이라 그를 못 봐 아쉽습니다.
참, 잊을 뻔 했습니다.
전북 진안에서 무주로 가는 길을 국도로 택했더니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용담호던가요?
용담댐을 만들며 생긴 호수와 강이 장관이었습니다.
너르고 큰 계곡 사이로 난 길가를 지날 땐
마치 뉴질랜드의 한 장면처럼 시원한 전망을 가진 평야와 밭들이 펼쳐졌습니다.
꼭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어집니다.
오후 6시 30분.. 신부님도 교리가 끝나 함께 충남 연기군에 있는 산채원에 가서
곤드레 나물밥에 청국장을 곁들여 한 상 먹었습니다.
배가 부릅니다.
마음도 충만하여 꽉 찬 하루가 되었습니다.
하루가 이렇게 길고 유익한지 모처럼 깨닫게 됩니다.
첫댓글 내가 가고싶은 길을 먼저 가고있는 젬마님이 마냥 부럽습니다.
죄송합니다. 먼저 가서... 그래도 길 안내는 제대로 하지 않았나요? 다시 진안에서 무주를 달려보고 싶어요...^^*
기회 만들어 한번 가보고 싶네요....길 안내 감사합니다.
보노님! 찬미 예수님! 잘 지내시죠? 오늘 엄청 덥대요... 시원한 음료수 한 잔. 예쁜 옷! 다 준비 하시고 마음을 긍정적으로~~